권력투쟁을 향한 혐오

조회수 2018. 12. 21.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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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투쟁은 혐오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다.

더불어민주당 유력 정치인의 추락 혹은 그 추락과 압박의 과정들에 대해, 계파 간의 세력다툼으로 보며 비판의 날을 들이미는 경우를 가끔 본다. 안희정, 이재명의 논란에 이어 다른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도 그렇게 소환된다.


이른바 잠룡들을 향한 집권 주류 세력의 제거 작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 가령 몇몇 권력 파벌의 핵심 인사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문파로 불리는 이들이 손발을 맞추는 형국이라는 ―나아가 부화뇌동 내지는 적극 찬동 한다는― 주장도 펼쳐진다. 내홍을 멈추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내가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특이하게 생각하는 점은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을 도덕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시선들이다. 거기엔 권력투쟁은 나쁜 것이라는 도식이 감춰져 있다.


나는 논란이 된 인사들의 문제점이 비교적 명확히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문제점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안 보이는 곳의 권력 집단 간 세 다툼이 있다고도 추측한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가. 중요한 건 권력을 향한 경쟁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아니라, 그 투쟁이 얼마나 건강하게 관리되느냐 하는 것에 있다. 잘 관리되는 권력투쟁은 정치 정당의 저력을 끌어 올린다.


과거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이 장기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 내부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빈번히 그리고 생각보다 정교한 적자생존의 피라미드 프로세스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낡은 약육강식의 비민주적 성격이 극단에 치달으며 자멸을 부르긴 했지만, 구시대의 문화 주파수와 동기화되던 시절엔 힘이 있었다. 그걸 이명박 시절을 넘어 박근혜 때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뿌리까지 흔드는 바람에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권력투쟁이 동력이 되지 못하는 정당이 됐다.

사람들은 간혹 다자간의 정치 활동이 하나의 특정한 윤리적 기준을 중심으로 맞춰져야 한다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관념을 실현하려 할 때가 있다.


윤리의 사회적 합의 테두리 이내에서 각자의 윤리는 미세하게 다르다. 그걸 모으고 엮어 저마다의 불만을 최소 상태가 되게끔 조정하는 게 정치다.


그 과정에서 권력 투쟁을 통한 사상의 경쟁은 각 세력의 주장을 선명하게 만들고 동참자들을 위한 이익의 분배를 더욱 넓게 하는 방식으로 정치화된다. 그게 정치집단이 갖는 힘의 바탕이 된다.


만약 권력투쟁을 관리하지 못하여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이미 실패한 정치집단인데, 그 상황에서 권력 수성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미래에 무슨 득이 되겠나. (그래서 박근혜가 탄핵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력투쟁을 관리해야 할 당사자인 정당인 또는 시민들의 역량이 정치집단의 역량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다.


당장엔 마치 암투와 모략이 판을 치거나 음모와 간계가 휩쓰는 것처럼 보여도, 그 투쟁의 과정을 보다 정교한 동력 장치로 하나씩 제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 넓게 실현하며 사회를 발전시킨다.


거기엔 많은 이들이 할애해야 하는 긴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한 인류는 느리지만 최소한 만년 정도 그렇게 발전해 왔다.


다자가 참여하는 장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은 여러 가지 복잡한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현상을 잘 관리하다 보면 원인이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 권력투쟁은 혐오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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