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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자해할 때 살아있다고 느껴요

자해는 살고 싶어서 그은 상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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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아임 낫 파인> 프로젝트로 출간되는 책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자해할 때 살아있다고 느껴요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은 특성상 익명성이 보장되는 트위터에서 활발하게 교류한다. '아임낫파인'도 초기부터 트위터에서 소통하며 도움을 받았는데, 우울증 친구를 찾는 아래와 같은 글을 쉽게 볼 수 있었다.

  • 우울계 자해O 사진 X

자해 사진을 올려서 공유하는 경우도 꽤 많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자해는 대개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깊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칫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일부 우울한 사람들이 동요되어 함께 하는 모습도 보여 걱정이 됐고, 한편으로는 그들끼리 위로가 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몇 명의 트위터 친구와 전화 및 DM(다이렉트 메시지)으로 인터뷰를 했다.

자해는 살고 싶어서 그은 상처예요

티티 님은 15살 때 자해를 시작해서 이제 4년째이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어느 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을 물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너무 힘들면 팔을 꽉 무는 습관이 생겼다.


스스로 자해를 시작한 건 열여덟살 부터였다. 커터칼로 ‘아프다’ 싶을 정도로만 긋고 있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폭력적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막다가 대신 맞았다. 그때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9살 때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 죄책감이 밀려올 때 자해를 한다.


자해가 발각되고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어 약을 먹고 있지만, 약을 먹는 것보다 자해할 때 빨리 감정이 진정된다. 후련해지고, ‘내가 사람이구나, 피를 흘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있다고 느낀다. 사실은 살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한다고, 그는 말했다. 모순적이라며.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몸이 이해를 못 한다고 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의무감이 들어요. 스스로 벌을 줘야 한다는 느낌이에요. 제 개인적인 과거가 좋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아프기 때문에 아무도 벌을 주지 않아요. 저는 벌을 받아 마땅한데 아무도 벌을 안주니까, 스스로에게 벌을 줘야 한다는 느낌으로 자해를 하고 있어요. 제가 미안함을 느끼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해봤는데, 친구의 결론은 ‘네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였어요. 그래서 저는 더 자해를 할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누나가 자해 상처를 발견하고 정신과에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정신과에 가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만류했지만 그의 팔을 보고는 결국 같이 병원에 가게 됐다. 엄마와 누나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어서 몰래몰래 했고, 이제는 다시 막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들에게도 처음에는 ‘긁혔다, 다쳤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상처가 많아져 자해를 했다고 얘기했다. 어떤 친구들은 많이 ‘많이 힘들겠다, 죽지 마라’ 하고 얘기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 콘셉트냐, 래퍼라도 할 거냐’하고 비아냥대는 친구도 있었다. 팔을 걷었다. 친구는 아무 말도 못했고 사이가 틀어졌다.


학교 가면 아이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손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때리려고 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공황장애가 오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고, 사람도 믿기 어렵기도 했다.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은 누나와, 키우는 강아지. 그리고 트위터 상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불행을 비교해요. 이러면 안 되긴 하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힘들고, 나는 덜 힘들고… ‘그래 아직 나는 행복한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 위안을 하게 돼요. 그럼 덜 힘들기도 하고. 오프라인에 진짜 친한 사람이 없다 보니 온라인에서 ‘살 수 있다, 괜찮을 거다’ 하는 게 고맙더라고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는 사람을 위로해주고 있는 느낌…

병원 선생님도 힘이 된다. 자해를 무작정 말리기보다는, “자살을 안 할 수 있으면 자해를 하는 게 낫고, 자해를 안 할 수 있다면 약을 먹는 게 낫다”라고 했다. 무조건적으로 자해를 말리지는 않았다. 친구나 부모님께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의사선생님께 말하는 것이 의지가 되었다.


약은 처음엔 효과가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 내가 괜찮아 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병원을 다니면서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해를 나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살고 싶어서 그은 상처예요.

비난하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sue 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자해를 시작해서 4년째 자해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학으로 시작했다. 벽에 머리를 박거나 손톱에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었다.


초등학교 때 집단 따돌림을 당해서 전학을 갔는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싸움도 잦아 동생과 매일 방안에만 있었다.


자학을 하면, 마음이 힘든 게 잊혔다. 자학이 부족하자 손목을 긋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사건이 있을 때 자해를 했다. 부모님이 싸우시거나 친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그렇게 힘들 때 자해를 하고 피가 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다 점차 사소한 일들에도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팔 뿐만 아니라 다리나 손, 발 여기저기를 그었다. 약하게 긋다 보니 흉터는 금방 사라졌다.


그러다 올해, 학교에서 친구들과 문제가 생겨서 wee 클래스 상담을 받게 되었다.(위클래스란 2008년부터 모든 학교 내에 설치된 상담 센터로, 다양한 청소년 문제를 다루고 상담한다.)


그때 상담 선생님이 손목에 있던 흉터를 발견하고 담임선생님께 알렸고,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께 알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에게 자해에 대해서 아무 말 하지 않으셨다. 다만 모든 커터 칼과 가위,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도구를 빼앗아 갔다.

서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모르는척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은 sue 님을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학교 상담을 계속 받고 있고 상담 선생님이 손목을 검사하는 바람에 자해는 비자발적으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은 다 뒤돌아서있고, 부모님은 바쁘시고, 선생님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 그녀는 곧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갈 일이 걱정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그녀가 자해를 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반 아이들은 그녀를 피하거나 자해하는 것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런데 트위터에는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에서 자해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이상한 건가 했는데, 트위터에는 비슷한 사람이 많으니 안심이 되었다.


때로는 우울함으로 가득한 트위터를 보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는데 나는 약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해가 무조건 나쁜 것이다, 유행이라고 말하는 게 화가 난다고 했다.

이해해주길 바라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보고도 모른척해줬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주변 사람이 자해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비난하지 말고, 상대방이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 사람도 분명 힘들어서 자해를 하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학생이라 혼자 병원에 가서 상담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금전적 여유가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개인 의사를 두고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고 말했다.



자해는 기분이 나아질 수 있지만 해결책은 아니에요


얼마 전 최의헌 원장님을 만났을 때 자해에 관해 물었다.

예전에는 자살과 자해를 비슷하게 취급했어요. 죽고 싶어서 한다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서 한다는 학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해요. 그런데 자살로 많이 연결되는 건, 목적 자체가 자살이거나 자칫해서 자살로 이어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요즘은 굉장히 세련된 자해를 하는 게 많아졌어요. 죽지 않을 수준으로 해요. 피를 보면 역설적으로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요. 또, 이걸 SNS에 공유함으로써 사회적인 욕구가 충족되기도 하죠. 위로받고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울증은 자극으로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아질 수는 있지만, 치료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자해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좋은 해결책이었다면 몇 번 하다 말겠죠. 그런데 자해는 계속 반복적으로 합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키우는 것이 될 수 있어요.

비슷한 게 술이에요. 잠깐 먹으면 좋아요. 어려움을 해소하죠. 하지만 반복적으로 자극을 추구하면 계속 쓰고, 자주 쓰고, 요령껏 쓰면서 병이 낫는 데는 결코 발전이 없어요. 우울증을 술로 해소하는 사람에게는 술 대신 약으로 바꾸자가 1차 목표예요. 

마찬가지로 자해를 하는 분들에게는 자극 대신 다른 것으로 바꾸자가 1차 목표예요. 요즘은 고무줄도 쓰고 타투도 해요. 자극을 추구하는 다른 방법들을 찾는 것이죠. 하지만 자극이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에요. 결국은 전문가를 찾아 치료를 받아야 해요.

어떤 선생님은 ‘자해는 너무 착해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해를 입히지 못하고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도 그랬다. 트위터 타임라인에 내뱉는 살벌한 말들에 비해서 1:1로 대화했을 때에는 다들 한없이 여리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번 인터뷰는 트위터의 특성상 청소년이 많았다. (자해로 병원을 찾는 분들 중에는 성인도 많다) 청소년은 혼자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적기 때문에 우울증에 더 취약하고 괴로워 보였다. 왕따나 가족문제의 경우 어른보다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믿고 도움받을 수 있는 방안이 적어서 더 고립된 것 같다.


자해를 발견한 어른들은 놀란 마음에 청소년들을 쉽게 나무라고 비난한다. 청소년 심리문제에 관한 더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자해는 ‘자극’을 통해서 우울한 기분 상태를 해소한다는 점에서 술이나 담배와 같은 일시적 방편이다. 그러나 자해를 실패한 죽음이라고 생각하거나, 노래 가사나 트위터를 통해 유행처럼 번진다고 말하는 언론, 또 주변인의 영향으로 자해를 하는 사람은 두 번 상처를 받고 있다.


자해가 당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이해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문: 찌라의 브런치


인물소개
  • by. 이가희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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