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엄마가 우울증이었다

조회수 2018. 11. 29. 16: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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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게 아니고 마음이 좀 아픈 거잖아."

※ 〈아임 낫 파인〉 프로젝트로 출간되는 책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울증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책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가족 중에 우울증 환자가 있는 경우, 또 연인이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 무얼 해줘야 할지 몰라 너무 괴롭고, 또 우울한 감정은 쉽게 전이되기 때문에 함께 우울감에 빠지기도 쉽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동시에 끊임없이 관심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주제의 인터뷰이를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숱하게 거절을 당했다. 본인의 인터뷰는 허락했던 사람들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청에는 주저했다.

제가 우울증인 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요. 친척들도 모르고… 부모님 인터뷰가 나간다면 부모님께서 곤란해하실 거예요.
남자친구가 우울증이라 힘들긴 하지만… 저보다 본인이 더 힘들 거기 때문에 얘기할 수가 없어요.

〈아임 낫 파인〉은 사실 힘든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게 취지고 익명성을 보장한다. 그런데도 내가 아니라 행여 내 가족이 곤란해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이해 갔다. 그러니 이 가족들이야말로 어디 가서 쉽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우울증에 걸린 본인 만큼이나 힘들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 마음이 아팠다.


수소문으로는 인터뷰이를 찾기가 어려워 SNS에 글을 올려 두 분을 만났다. 두 분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사연으로 연락을 주셨다. 엄마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는 이야기였다.



A군의 이야기


엄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더라고요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켰다. 응급실에 모시고 가서야 엄마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워낙 밝은 분이고 항상 긍정적이며 아이들에게도 늘 이타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셨다.


게다가 병이 온 뒤에도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욕을 하고 비난하고,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십 가지 감정을 보이면서 웃다가 분노했다가 눈물을 쏟았다. 우울증 중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의 스트레스성 우울장애를 겪었다.

당시 집이 14층이었는데 화가 나면 계속해서 “너도 싫고 아빠도 싫고 다 싫다, 나는 이제 뛰어내려서 자살할 거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처음에는 A군도 같이 분노했다. 엄마가 불리할 때마다 무기 꺼내듯 아픈 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공황장애와 관련된 책을 찾아봤다. 책에서 권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병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아픈 게 보이지 않아도 인정해야 그때부터 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노력했다. 엄마가 화를 내면 같이 내는 게 아니라 아파서 그러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는 A군도 화가 나니까 잘 안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이고 엄마도 함께 어떻게 이겨나갈까 고민하게 되었다. 엄마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엄마가 오늘 몸이 안 좋구나, 감기 걸린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거구나’ 하면서 엄마의 감정의 집중해서 맞춰주고 이야기를 해나갔다.


병원을 따라가서 의사 선생님을 보면서, 엄마한테 가장 필요한 건 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듣기 힘들다. 감정이 극에 달하니 나쁜 이야기만 하게 된다. 하지만 듣다 보니 엄마는 내 마음이 아프니까 내 얘기를 계속 들어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가장 극단적으로 느낀 계기가 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보다 엄마의 화에 동조하여 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주로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랬어? 힘들었겠다’가 아니라 ‘나도 너무 힘들었다, 엄마만 그런 게 아니다, 나도 너무 싫다’라고 함께 외치고 욕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엄마의 편이고, 엄마 옆에 있을 테니 같이 이겨나가자고 말했다. 엄마는 그제야 ‘그래, 아들은 내 편이지’라며 아들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게 엄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다 감정을 담는 항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울증을 가진 사람의 항아리는 그저 매우 작은 거예요. 그 사람들은 감정이나 분노를 조절하는 힘이 훨씬 약하고, 빨리 해소해주지 않으면 터져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거죠. 그 차오르는 감정을 함께 해소하려는 노력만으로도 큰 도움이 돼요.

발병 후 7년이 지난 지금, 엄마는 이제 많이 나아지셔서 일도 하시고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여전히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아들, 엄마 오늘 몸이 안 좋아”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제야 책에서 읽은 ‘병을 인정하는 것’이 무언지 온전히 알 것 같았다. 발병 초기에 엄마는 “인정하기 싫다, 내가 어떻게 이런 병에 걸릴 수 있냐.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줄곧 말씀하셨다. 본인과 가족들이 부정하기 시작하면 절대 고칠 수 없다.


본인도 가족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감정이 안 좋아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약도 먹고, 외출을 해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요즘은 ‘엄마 오늘 또 몸이 안 좋은갑네, 잠깐 요 앞에 몇 바퀴 돌고 오자, 아파트 몇 바퀴 돌자’하고 말하면, ‘그래, 엄마가 또 이겨내야겠제~’ 하면서 따라 가주세요. 처음에는 절대 안 움직였거든요. 이게 몸이 안 좋다는 걸 인정을 안 하면 절대 안 움직여요. 스스로 인정되면 어머니도 저도 할 수 있는 행동이 훨씬 많아지는 거예요.

완치는 없다. 하지만 항아리의 크기는 늘릴 수 있다. 감정의 항아리를 조금씩 키우고 넘치지 않게 스스로 조절하게 되는 것, 그게 엄마와 아들의 목표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고, 가족들 나름의 방법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B양의 이야기


이제는 엄마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요


B양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과 3남매는 주말에는 같이 외식을 하거나 외식을 했다. 중학생 시절 갑자기 엄마가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점점 줄어든 게 아니라 갑자기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미성년자로서 허락이 필요하거나 의견을 묻는 모든 상황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은 빼빼로데이를 앞두고 늦은 시간에 편의점을 가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나가도 될지 몰라 혼자 방 안에 있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지금 과자 사러 잠깐 다녀와도 돼?
…….
엄마, 말하기 싫으면 고개라도 끄덕여.

여전히 아무 말과 표정이 없는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왔다. ‘이게 뭐라고 말을 안 해주지.’ 그 일은 B양에게 평생 깊은 상처로 남았다. 당시 주변에는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둘러댔다. 상황이 지속되니까 어른들끼리 상의를 해서 병원에 같이 갔고 1년 정도 입원도 하셨다.


꽤 떨어져 살다가 같이 살게 되었을 때는 엄마의 상태가 좋으셨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오늘날까지 말을 찾았다가, 다시 말이 없으셨다가 하는 시간이 반복됐고 가급적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어느덧 익숙하게 각자의 삶을 열심히 해나갔다.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더 자상하셨고, 남매들도 서로 의지하며 잘 성장했다. 다만 엄마와 함께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는 늘 걱정이 됐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엔 엄마가 못 오셨고, 커서는 결혼식에 엄마가 못 오시는 상황이 늘 걱정됐다(결국 엄마는 결혼식에 못 오셨다).

결혼 전에 엄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가 반년 정도 집중적으로 노력해본 적이 있다. 10대 때는 외면을 많이 했고, 20대 때는 계속 떨어져 지냈으니 결혼을 하기 전에 엄마와 관계를 회복해보고 싶었다. 가장 답답했던 점은 엄마의 병명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께 물어봐도 ‘그 시절은 정신과 병명에 귀 기울이고 기억하던 시대가 아니었어’라고 할 뿐이었다.


정신건강에 대한 관념이 많이 다른 시대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이지만, 실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적도 없었다. 적어도 알면 어떤 조치라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병원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예전에 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기억이 안 좋으셨는지 병원에 다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약으로 보이는 건 드시지도 않았다. 설득해보고, 졸라보고, 이판사판 울고불고 화도 냈지만 실패였다. B양은 엄마의 병명은 모르지만 그냥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B양은 어렸을 때부터 밝고 긍정적이었고, 또 엄마아빠와 함께한 유년 시절이 건강했기 때문에 다행히 사춘기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엄마가 아픈 건 속상했지만 탓해봐야 소용없고, 그녀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살았다. 커서는 그때 더 노력하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말했다.

언니, 우리 엄마는 이상한 게 아니고 마음이 좀 아픈 거잖아. 왜 이상하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나는 엄마를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리감을 뒀고, 고치려고 했구나. 엄마는 원래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고,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일 수 있는데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엄마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B양에 비해 동생들은 거의 처음부터 말수가 없었던 엄마의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그 모습을 엄마로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도 하나의 상태 값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랫동안 왜 우리 엄마는 남들과 다를까 생각하며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라는 사람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명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엄마와 엄마의 병,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루하루 더 행복하게 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우울증, 존재를 인정하기


우울증 초기에 있는 가족이나 연인을 만나면 갑작스런 부조화에 서로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입을 닫아버린 우울증 당사자와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가족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이겨내려고 혹은 가족의 우울증을 함께 끌어안고 살아온 A군과 B양을 보면 이미 우울증이 가족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은 편안해 보였을 뿐 아니라 사실 다른 가족들보다 더 농밀해 보였다.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고, 고맙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더 많이 했다.


두 사람의 얘기 중에 공통적인 키워드는 인정이었다. 우리 가족 안에 우울증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이들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가족이 있다면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싸워나갈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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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찌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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