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는 어떻게 할리우드가 되었을까?

조회수 2018. 11. 28.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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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연중무휴 따뜻해서, 영화를 찍기가 쉬웠다!

※ KCET의 「How Did Hollywood End Up in… Hollywood?」를 번역한 글입니다.


서부에서 빈털터리가 되면 기찻삯을 보내주마. 늘 그랬던 것처럼.

1913년 ,윌리엄 드밀은 탐탁지 않아 하면서 동생 세실에서 편지를 썼다. 세실은 영화 을 촬영하기 위해 뉴욕을 출발해 서부로 가는 중이었다.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된 최초의 장편 영화가 된다. 형 윌리엄은 이런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아무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싸구려 오락거리에 왜 그리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하지만 세실 드밀이 기차로 동료들과 함께 동부 해안을 출발해 향한 원래 목적지는 애리조나의 플래그스태프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리우드는… 할리우드가 되었을까?

비타그래프 스튜디오의 야외 촬영 세트, 1917년



1. 연중무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날씨


드밀의 이야기에서는, 출처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당시 플래그스패프의 날씨만 좋았다면 지금의 할리우드는 애리조나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드밀은 이렇게 회상한다.

플래그스태프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자, 뉴욕을 떠날 때보다 더 추웠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를 찍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기차에 올랐고,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실제로 이전에도, 1906년 제작된 와 1909년 제작된 같은 영화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제작되었다. 하지만 1909년이 지날 무렵이 되자, 영화의 인기가 커졌고 수요를 맞추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뉴욕, 뉴저지 및 시카고가 초기 영화 제작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영화감독을 비롯한 촬영진은 일 년 내내 햇살이 비치는 안정된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 같은 일부 지역이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습기와 허리케인 등 또 다른 계절적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그렇지 않았다. 1911년 영화 업계지 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는 연중 320일 동안 화창한 날씨를 유지했다. 영화 제작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출처: ⓒPEXELS
보기만 해도 따-뜻

당시 로스앤젤레스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노동자도 일할 수 있는 ‘오픈숍’의 중심지로 유명했고, 대규모 인력을 저렴한 값에 활용할 수 있었다. 영화 역사가 로버트 스클라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와 세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숙련된 목수, 전기공, 재단사 등 많은 전문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제작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를 제작한 드밀도 목수와 다른 전문가의 임금이 동부보다 25%에서 많게는 50%까지 더 저렴했다고 한다. 역사사 스티븐 J. 로스는 “친기업적인 성향의 법원과 시의회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켜 고용주를 돕는 데 일조했다.”라고 말한다.



2. 또 다른 이점: 도망치기도 쉬웠다!


당시 영화 산업의 또 다른 문제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과 ‘트러스트(the Trust)’라는 영화 관련 특허 관리 회사였다.


에디슨은 영화 제작 및 상영과 관련된 특허권을 무기로 영화 산업에서 막대한 사용료를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진절머리가 난 영화 제작자들이 남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로 떠나게 된 것이다.


할리우드는 멕시코 국경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에디슨의 대리인이 쳐들어와 특허 사용료를 요구해도 국경을 넘어 도망치면 되었다. (하지만 스클라는 “당시 멕시코 국경까지는 차로 5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그러려면 하루 제작비를 날리는 꼴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남부 캘리포니아에서의 영화 제작은 더 많은 이점이 있었다. 좁은 지역 안에 산, 바다, 사막 등 각종 지리적 환경이 있었고, 도심의 건물도 각양각색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장면을 촬영하는데 아주 적합했다.


게다가 땅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링컨 하이츠에서 산 페르난도 밸리까지, 그리고 에코 파크에서 산타 모니카까지에 이르는 땅을 빌려 궁전과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할리우드는 진정한 영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럽산 영화가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이를 대체할 만큼 영화가 제작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더 효율적인 제작 설비가 필요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되려면 더 많은 극장이 필요했다.


이 모든 일들이 할리우드 전체가 오직 영화 제작을 위한 곳으로 변모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출처: ⓒPixabay

물론 ‘할리우드’란 명칭 자체는 상징적인 것이다. 공식적인 지역 밖의 훨씬 넓은 지역도 할리우드라고 한다. 영화감독 존 포드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할리우드는 지리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곳이다. 어디를 딱히 할리우드라고 정하기란 정말 곤란하다.

끝으로 할리우드(hollywood)라는 지명은, 호레이스 윌코트 부부가 지역에 호랑가시나무(holly bushes) 덤불 몇 그루 심었고, 그 지역을 할리우드로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USC Libraries – California Historical Society Collection」에서 발췌한 할리우드 유명 스튜디오들의 당시 사진이다.

픽크포드-페어뱅크스 스튜디오, 1926년
골드윈 스튜디오, 1919년
브런튼 스튜디오와 그 주변, 1918년

원문: 피우스의 책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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