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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남성 가해자의 '면죄부'가 아니다

조회수 2018. 11. 28. 15: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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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용서'할 수 없다

심상대 씨의 새 소설 『힘내라 돼지』를 읽었다. 심 씨는 90년에 등단해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탄 중견소설가다.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사실은 몇몇 언론사들의 『힘내라 돼지』서평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항의'를 통해 알게 됐다.


독자들은 여성 폭행 전과가 있는 심 씨의 책을 소개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 명백해 보이는 『힘내라 돼지』의 책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전달하는 것 역시 범죄를 미화해주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심 씨는 2015년 내연관계에 있는 여성을 여러 차례 때리고 차에 감금하려는 혐의(특수상해 등)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집행유예가 나왔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피해 여성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의심해서 여성의 머리·배·어깨를 주먹·발·등산용 스틱으로 폭행했다. 이로 인해 피해 여성은 전치 10주의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피해 여성의 직장에 찾아가 "너 여기서 죽고 싶으냐. 직장 그만 다니게 개망신당할래“라며 뺨을 때리고 승용차에 감금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이 있다 보니 A 언론사 서평에서 "그것은 2016~7년 사이 폭행 등 혐의로 형을 살고 나온 작가 자신을 향한 응원의 말로 들리기도 한다"는 부분이 강하게 비판받았다. 결국 A 언론사는 사과문을 올리고 기사를 지웠다. B 언론사 역시 서평 기사를 지웠고, C 언론사는 신간 소개에서 이 작품을 뺐다.


그렇게 서평은 지워졌으나, 소설은 남았다. 여성 폭행 전력이 있는 소설가가 작품을 낸 것, 또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간 감옥을 배경으로 소설을 낸 것, 둘 다 무턱대고 비난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 소설을 통해 자기변명을 하면서, 스스로 '면죄부'를 만들려고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작중 화자의 말이나 생각이 곧 작가 개인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작가가 창조한 세계 역시 작가가 살던 시기나 경험, 사고방식 등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스스로 59년생 돼지띠에, 감옥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힘내라 돼지』가 "이 소설의 이야기는 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감안해서 평가를 해보려고 한다.



'아내 폭력' 죄수의 변명에 초점 맞춰


『힘내라 돼지』는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기보다는, 59년생 돼지띠인 '빈대코', '털보', '빠삐용'의 수감생활 중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옴니버스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감옥살이에 대해 "동무들과 어울려 소풍 온 듯 했다"(214p) '생애 가장 철저한 안전지대였고 가장 따뜻한 공동체'(296p)라고 묘사한다. 더불어 작중 인물들, 특히 59년생 돼지띠 세 명을 굉장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사람들로 그려낸다.


셋은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며 동지애로 뭉쳐, 세 명이 한 마을에 모여사는 '새 삶'을 꿈꾼다. 책 뒷면에 "극한 상황에 놓인 중년 남성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희망"이라고 쓴 홍보문구만 봐도 이 책의 주제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세 명은 '어쩌다 감옥'(38p)에 온 사람들처럼 묘사된다. 무려 죄목이 '(아내) 특수상해', '탈세', '뇌물 수수'인데도 말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채로 '억울함'을 안고 감옥에 왔으며, 사회에서 추방 받았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심 씨는 한국 남성의 약자성을 강조하고 '집단적 자기 연민'을 통한 연대 의식을 보여주기 위해 감옥이라는 공간을 재해석한 것이다.

감옥 내 남성연대에서는 살인이나 강간 급의 범죄가 아닌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특히 아내를 때려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빈대코의 경우에는 ‘여자가 맞을 만 하네’의 논리가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마귀할멈’, ‘여우’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과수원을 운영한 빈대코가 아내를 계속 때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내가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어머니 묘지’를 이장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세 번이나 폭행으로 기소됐다가 감옥을 오게 됐음에도, 빈대코는 반성하지 않는다. “아내가 경찰에게 허위진술을 했다”, “이웃 남자랑 붙어서 과수원을 독차지하려고 계략을 세웠다” 등등의 말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죄수들은 빈대코의 이야기를 듣고 피해자인 아내에게 ‘썅년’, “망치로 한 방 맞아야” 등의 욕을 퍼붓는다. 또 빈대코가 옥중 이혼당하자 죄수들은 “누가 잘못했나” 논쟁을 벌이는데, 이 부분은 감옥 내 남성연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참고로 쇼군은 방장이며, 기계조의 조장까지 맡는 감옥의 권력자로 등장한다.

우리가 남자라고 남자 말만 듣고 여자를 욕할 순 없죠.

쇼군이 화를 냈다.

 공평하기도 하다, 이 새끼야! 그래서 니도 수갑 차고 손도장 찍으러 갈래?(145p)

놀라운 것은 빈대코에게 특수상해가 적용된 것은 ‘감 따는 장대’로 아내를 때렸기 때문인데, 이는 심 씨가 사용한 ‘등산용 스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장치는 의도적으로라도 뺐어야 한다고 보는데, 고의적으로 본인을 투영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 다른 주인공 털보 역시 여성에게 배신당한 인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주유소가 망한 이유를, 이혼한 아내의 고모부가 운영하는 막걸리 양조장에 무리하게 돈을 빌려준 탓이라고 본다.


며느리는 손주들과의 ‘화상 접견’을 막는 존재로 등장한다. 빈대코와 털보는 여자에게 ‘당하고만’ 사는 남자들의 전형처럼 그려진 것이다.



범죄에 대한 ‘남성적 해석’


이밖에도 여성을 도구화시키거나 죄수인 가해자 입장에서의 서술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죄수들은 자기 본위대로 여성에 대해 판단하며, 이 과정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도구화된다.(작품에서 긍정적으로 표현되는 여성은 ‘죽은’ 빠삐용의 아내와, 수동적으로 그려진 척추 장애 2급인 털보의 여동생뿐이다)


여자 제자를 성추행해서 감옥에 있는 ‘선생님’은 매일 제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인물로 등장한다. 쇼군은 그에 대해 “존경할만하다, 변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말은 지극히 자기도취적이다.

순수한 아이들이라 용서를 빌면 받아들입니다. 용서하니 마니 그런 말을 주고받진 않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용서해요.”(77p)

문제 죄수였던 ‘동한’은 지체장애인 여성을 집단 강간해서 복역 중이다. 이로 인해 피해 여성은 임신을 해서 애를 낳았고, 동한은 “아이 사진을 들고 다니며 싱글벙글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피해 여성이 시댁에 맡겨놓았던 아이를 찾아간 뒤 잠적하자 동한은 우울증에 걸린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한 서술은 참담한 수준이다.

그러고 보면 동한이는 아들만이 아니라, 아이의 엄마도 지극히 사랑했던 셈이다.(255p)

이렇듯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해 ‘때릴 만 해서’를 포함한 남성적 해석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밖에도 ‘역차별’론을 연상하게 만드는 남성 피해자 서사, 성범죄에 대한 남성 중심적 사고 등이 무비판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어쩌면 일상적 공간이라면 소설의 윤리성을 걸고넘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심 씨는 감옥이라는 공간과 ‘죄인’이라는 신분을 배경 삼아 앞서 동한이의 이야기처럼 사실상 금기를 깨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금기를 깨는 것이 통속성을 부수거나, 새로운 윤리를 창조하는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힘내라 돼지』에서 죄수를 두둔하는 서술은 기존의 가부장적 편견을 확대하고, 역차별론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설은 용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스스로에게, 또는 미투와 문단 내 성폭력 국면에서 또래 남성에게 부여하는 ‘면죄부’라는 확신을 굳혔던 부분이 있다. 17살에 살인을 해 무기수가 된 레옹은 빠삐용과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짓말이 좋아요. 가장 깨끗하잖아요”(274p)라고 말한다. 이어 “소설은 이렇다 저렇다 가르치지 않고 재판하지도 않으니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소설한테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275p)라고 밝힌다. B언론사 서평에서는 이 부분을 소설의 ‘뼈’라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가 작중에서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레옹은 소설은 거짓말이라고 규정한 뒤, 그 안에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욕망한다.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고통을 토해내고 목숨을 건지면 그건 통속입니다. 그걸 꿀꺽 삼켜야 돼요.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부패시켜야 대속(代贖)할 수 있어요. (276p)

‘대속’, 대신 속죄한다는 것. “환갑 직전 돼지띠 동갑내기들을 위한 소설을 한 편 쓰겠다는 결심이 있었다”는 책 속 작가의 말에서 ‘대속’이 언급된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동시에 왜 이 소설이 희망적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헤밍웨이의 역경 많은 인생사를 언급하며, “운명이 눈앞에서 어정거리거듯 구둣발로 걷어차라”는 헤밍웨이의 말로 작가의 말을 끝맺는다.


그런데 용서를 왜 피해자에게 받지 않고, 소설을 통해 받으려고 하는가. 역설적으로 그런 용서는 감옥 내 남성연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은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반성하지 않거나, 반성한다는 이들도 자신의 죄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인물들 투성인 이 소설에서, 용서에 이은 ‘새로운 시작’은 가당치도 않다.


이 소설을 보고 위로받는 중년남성이 있다면, 자신의 윤리 의식이 소설에 등장하는 ‘죄수’들과 비슷한지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원문: 박정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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