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

조회수 2018. 11. 20. 13:1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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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나는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
팀장님, 회사를 그만둬야겠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퇴사라는 단어가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오고 그 단어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2016년 6월 15일, 나는 회사에 정식으로 퇴사를 통보했다. 처음으로 퇴사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품은 지 6개월 만에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통쾌할 것만 같았던 그동안의 기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연인에게 이별을 말하고 뒤돌아섰던 날처럼 후련한 슬픔이 내 곁에 가까이 와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 했어야 할 일을 드디어 했다는 시원함과 함께 지금까지 내 삶의 중요한 한 축을 잃는다는 묘한 안타까움이 동시에 나를 기다렸다. 청년실업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고 멀쩡히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잘려나가는 이 시점에 남들은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인 회사를 박차고 나간다는 일은 보통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퇴사를 결심하고 많은 사람이 왜 퇴사하는지 끊임없이 물어왔다. 분명히 나름대로는 많이 생각한다고 했는데도 나의 대답은 항상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민의 결과 내가 왜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나는 ‘새장 속의 새’였으며, 회사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

날이 저문다 오늘도
새장 안에서 새는 생각한다
안데스산맥에 산다는 께찰을
잡히는 순간 죽어 버려
어디에도 가둘 수 없다는 새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
그런 새는 새가 아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새는 생각한다
깃털을 뽑으며 새는 생각한다
나는 새다
아니, 아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생각한다
벌겋게 드러난 목덜미 다시 쪼아 댄다
제 머릿속 하늘을 물어뜯는다
발갛게, 빠알갛게

- 박은율, 「생각만 하는 새」 전문, 『절반의 침묵』

퇴사를 결심한 첫 번째 이유는 생각만 하는 ‘새장 속의 새’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했을 때 나의 삶은 항상 ‘도전’이었다. 실업률이 14%가 넘어 현지인도 일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 제1회로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을 때도, 히치하이킹으로 겁 없이 유럽을 여행할 때도, 아무 정보도 없는 중동 한복판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도, 모두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아직은 이름 붙지 않은 모호한 곳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도전이었다.


불안하고 걱정도 됐지만 매번 새로운 도전을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설렜다. 항상 잃을 것에 대한 걱정이나 계산보다는 새로운 것들을 찾고 자유롭게 도전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내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엑셀 속 네모반듯하고 작디작은 셀 안에 갇힌 채로 허우적대며 입사 전의 나를 잊은 채 살았다. 안데스산맥을 날아다니다가 붙잡힌 께찰처럼 회사라는 새장 속에서 조금씩 죽어갔다.


아무리 회사에서 나는 다른 월급쟁이들과 다르게 산다며 ‘나는 새다’라고 홀로 머릿속으로 되뇌어도 냉정하게 내가 회사에서 하는 행동을 다시 생각해보면 ‘아니,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새인지 계속 ‘생각하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말, 옛날의 나답게 무모하지만 자유롭게 캄보디아를 여행했다. 특별한 장소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현지인도 잘 가지 않는 길을 새벽어둠 속을 뚫고 위험 속에서 홀로 달릴 때, 문득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겁도 없이 달리는 이 모습이 진짜 나인데 그동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 나의 께찰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만 하다가 나의 모든 깃털을 나 스스로 뽑고 싶지 않았다.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나는 것을 잊기 전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내가 퇴사를 결심한 두 번째 이유는, 회사는 ‘모두 병들었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던 회사는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한 비즈니스맨들이 다수를 구성하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봤던 회사는 프로페셔널이라기보다는 그저 적당한 삶을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스펙만으로 평가한다면 회사의 구성원들은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대한민국 최고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1류 인재들을 모아 2류의 방식으로 3류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입사 전 꿈꿔왔던 회사는 항상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일하고 또 항상 최선의 결과를 위해 공부하는 곳이었지만 현실은 치열한 일 처리보다는 적당한 타협이 현명하다고 여겨졌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퇴근 후 회식 자리를 한 번이라도 더 참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서로 업무를 보완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업무에 선을 긋고 중간에 떨어진 일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항상 회사의 리더들은 치열함과 끊임없는 발전, 그리고 팀워크를 요구했다. 또 모든 구성원이 그 필요성은 이미 잘 알았다. 그럼에도 모두의 머릿속의 모습과 당장의 행동은 전혀 일치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월급쟁이로 하루하루 살아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회사는 분명 ‘모두 병들었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환경에서 10년, 20년을 보냈을 때, 아무리 임원이 되고 CEO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 다른 월급쟁이들과 같이 병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병을 치료해볼 수는 없을까 나름대로 조직문화 활성화를 위한 특별조직에도 소속되어 노력을 해봤지만, 그 조직마저 월급쟁이 근성이라는 병으로 가득 찬 것을 봤을 때 대기업 병은 혼자서 발버둥 치기에는 역부족임을 느꼈다. 어느덧 나도 감염되어 병들기 전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래서 뭐 할 건데?

퇴사를 결심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래서 뭐 할 건데?’였다. 단기적인 계획은 분명하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 무엇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할지는 아직도 막연하고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최소한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곳에는 나의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내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할지는 확실치 않지만, 최소한 나는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확고한 한 번의 스케치나 10년 대계의 치밀한 하나의 계획 아래 완벽하게 채색된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은 대략적인 스케치 위에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부단한 덧칠을 통해서 나만의 색깔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불완하며 나답게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나는 불안을 자초했고, 이름 붙지 않은 모호한 곳을 향해서 달려간다. 안정을 버리고 가능성을 좇는다. 그런 지금이 불안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고 나답게 삶을 느낀다.


이제는 모두가 병들어 있는 회사라는 새장을 떠나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지 않겠다. 지금 나의 이 글이 허세가 될지 당당한 출사표가 될지는 내 손에 달려있다. 이제 회사의 틀을 벗어나는 만큼, 분명한 결과로 말하겠다. 수년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슬픈 자화상을 보지 않게 해준, 오늘의 결정을 내린 나에게 미리 감사해야겠다.


원문: 경욱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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