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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과 비트코인 역사 이면의 트라우마

조회수 2018. 9. 20. 12: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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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부동산 시장은 트라우마 진흙탕 같다

최근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비트코인: 암호 화폐에 베팅하라〉와 김수현 사회수석의 저서 『부동산은 끝났다』를 보고 읽었다. 다른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 두 콘텐츠인데 시청/독서 후 뇌리에 남는 단어는 똑같다. 바로 ‘트라우마’다.


비트코인의 역사는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서 시작됐다. 4대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마저 속절없이 파산하자 기존의 금융 체계를 거부하는 심리에서 태동했다. 자본과 정보를 독점한 특정 주체를 거치지 않는 투명하고 평등한 시스템 구축이 목적으로,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이퍼펑크(Cypherpunk)족을 자처했다.


다시 말해 금융 위기로 말미암은 트라우마가 비트코인을 위시한 블록체인의 개발과 성장을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비트코인은 또 다른 트라우마와 맞닥뜨리며 위기를 맞는다. 바로 9·11로 대표되는 테러에 대한 공포. 익명성을 보장하는 비트코인이 테러 조직의 은밀한 자금줄로 기능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실제로 비트코인은 ‘실크로드’라는 웹사이트에서 마약 거래에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사유재산을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쓸 수 있는 자유를 누군가는 그렇게 활용한 것이다. 이게 가능하단 말은 테러 자금줄로도 유용하단 소리여서 큰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실크로드 관계자와 비트코인 개발자 여럿은 법으로 처벌받기에 이른다. 형량은 무려 종신형 또는 20년형으로 다들 지금 감옥에 있다. 트라우마에서 태동한 비트코인이 다른 트라우마에 한 대 얻어맞은 상황.

김수현 수석의 저서 『부동산은 끝났다』는 2년 만에 다시 읽은 것이다. 처음 읽을 땐 부동산 시장의 구조, 생리, 현황, 모순 등의 얼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교과서 정도로 여겼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화가 없다. 부동산 시장 전반을 개괄하기에 (내 독서 범위 이내에선) 이보다 적합한 책이 없는 듯하다.


한데 다시 읽으니 한(恨)으로 지칭해도 될 법한 트라우마가 군데군데 배어 있는 게 보인다. 예전엔 가볍게 넘겼던 대목들이 지금은 묵직하게 다가온다. 서문에 ‘노무현 정부 당시 부동산 정책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회고, 반성, 대안을 내놓는 사회적 책임감’이라고 썼는데 지금 읽으니 책 전반에 모종의 울분이 스며있음이 느껴진다.


특히 공급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시장 절대주의자’라고 지칭하며 반복해서 거부감을 피력하는 대목에선 제법 놀랐다. 대단지 재개발, SOC 투자 등은 재벌 토건족과 적폐 언론이 자기네 돈벌이를 위해 주장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맞서 싸워야 한다는 뉘앙스. 현재 부동산 시장의 논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공급 확대엔 소극적이면서 수요만 죄려 한다’는 것인데 어찌 보면 이 책으로 이미 방향성을 천명한 것일 수도?


짚어볼 건 지금 그가 적극적으로 내거는 정책이 노무현 정부 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비판받는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이번에 성공을 거두면 과거도 재평가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슬프게도 현재 시장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장하성 정책실장의 인터뷰를 보니 ‘결국엔 우리가 시장을 이긴다!’고 확신하던데 솔직히 난 모르겠다. 시장과 맞서겠다는 인터뷰는 처음 봤다. 시장의 빈틈을 보완하는 것과 시장에 맞서는 건 결이 너무도 다르지 않나. 

출처: 뉴스1

작금의 부동산 시장은 트라우마 진흙탕 같다. 예전의 그 정책으로 집값을 잡음으로써 과거를 재평가받고 싶은 위정자들의 트라우마, 똘똘한 한 채로 업그레이드하려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트라우마, 똘똘한 한 채는 고사하고 변변한 내 집도 아직 마련하지 못한 이들의 트라우마, 출퇴근에 두 시간 이상 쓰며 도심 진입을 꿈꾸는 이들의 트라우마, 억 소리 나는 기사를 보며 그저 소외감만 느끼는 이들의 트라우마, 이 기회에 부자 새끼들 좀 때려잡자는 철 지난 입진보들의 트라우마 등등.


트라우마는 온전한 치유가 어려운 영역이다. 잠재해 있다가 계기가 주어지면 공격적으로 돌출한다.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필요한데 현실에선 도무지 쉽지 않다. 각자의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는 사회는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걸까? 삶의 터전인 집이 모두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사회란 어딘지 서글프다.


원문: 길들지 않기를 꿈꾸는 철부지의 생각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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