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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그냥 기다릴 뿐입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아무나 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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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루의 과업을 수행해가며, 캘린더에 빼곡히 적힌 일정을 쳐내기 바쁘며 그러다 주말과 같은 휴식이 주어지면 피곤하고 지친 몸을 해소하기 위해 잠을 자기 바쁘다. 또한 잠자는 이외의 시간에는 역시 무언가를 하느라 바쁘다. 아니, 해야만 한다고 느끼기에 바쁘다.


우리에겐 어쩌면 휴식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정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수십 년 생애 동안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심리적 강요와 압박감에 짓눌려왔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감.


과연 과도한 피로로 인한 신체적 휴식이 아닌 나를 위한 감정의 휴식이 있었을까? 일상에서 벗어난 마음의 휴식이 없기에 생각과 감정이 마치 빽빽하게 채워진 도서관 책장의 책들처럼 빈틈이 없지는 않았을까? 그러기에 한편으로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것을 겪어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우리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끌리지 않는 캐리어와 남겨진 캐리어

영화 〈안경〉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바다를 배경으로 비추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조용한 마을에 낯선 중년의 여인 다에코가 온다. 한눈에 봐도 닳고 닳은 캐리어는 매우 무거워 보이며, 잘 끌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캐리어를 놓을 수 없으며, 모래사장에서 질질 끌고 힘겹게 숙소 ‘하마다’까지 온다.

하마다 숙소의 주인 ‘유지’는 다에코에게 자신이 캐리어를 옮겨줄 테니 편하게 들어오라고 하지만 막상 들어오니 캐리어를 놓고 자리를 비우고, 결국 덩그러니 남겨진 캐리어는 다에코가 챙기며, 그녀는 캐리어를 놓지 못한다.


또한 다에코가 다른 민박집에 가보았다가 돌아올 때 즈음에는 다에코는 닳고 닳은 캐리어가 잘 끌리지도 않아 피곤하게도 그 자리에서 버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버릴 수 없다. 그리고 영화 중반 즈음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문을 열 때쯤에야 비로소 캐리어를 손에서 놓는다.

과연 이 캐리어는 다에코와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다에코처럼 마음속에 내재한 캐리어를 짊어지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내재한 마음의 메타포가 캐리어가 아니라 핸드백일 수도 있고, 어쩌면 캐리어보다 더 크고 무거운 가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하루하루는 매우 무겁고 힘들다. 놓고 싶지만 놓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같은 캐리어를 계속 짊어져야 하기 때문에 쉬는 것이 쉬는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언제쯤 다에코처럼 이 캐리어를 버리거나 혹은 작은 가방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불안하다. 덩그러니 남겨진 캐리어를 챙기고 돌아오는, 힘든 자갈밭에도 버리지 못하고 끌고 오는 다에코처럼 불안하다.

어쩌면 다에코처럼 뒷자리에 타기만 하고, 누군가가 앞에서 자전거를 운전하는 상황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의 사쿠라처럼 가벼워지고 다에코처럼 캐리어를 버려야만 한다. 영화에서 다에코가 캐리어를 버리고 나서야 편안히 잠을 자고 사색을 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감정이 적힌 지도와 팥빙수의 값


영화에서 지도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도의 개념이 아니다. 보통 지도란 객관적으로써 정확한 지명과 거리를 제시함으로써 누구나가 봐도 혼동이 없이 인지 가능해야 지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민박집 주인 유지가 제시하는 지도의 개념은 좀 특이하다. 지도상에서 중요한 지역 랜드마크의 정보가 아니라 장소에 대해 느꼈을 감정으로 대신한다.

장소에 대한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장소에 대한 감정(Emotion)이다. 이는 영화 〈안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써,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변화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개체에 대한 해석을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감정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 〈안경〉의 등장인물에게 객관적 정보는 중요치 않다. 오직 어떠한 개체를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 어떠한 감정으로 느꼈는가가 중심이다. 이 같은 그들의 접근은 다른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다에코가 사쿠라에게 팥빙수의 값은 얼마냐고 했을 때 사쿠라의 대답이 재밌다.

소녀에게서 빙수값으로 받은 것은 다름이 아닌 종이로 접은 코끼리였다. 그녀가 어린 소녀에게서 받은 것은 귀여운 소녀에게서 코끼리를 받을 때 느낀 마음(감정)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상에서의 팥빙수 가격보다 더 값어치가 있을 법하다. 즉, 그들에게 있어 감정 그 자체는 그 어떠한 것보다 우선시한다.



현실에 덧대어서 보는 뿔테 안경


영화에서 또 하나 재밌는 메타포는 등장인물들이 뿔테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하마다 민박의 주변 등장인물이나 이 마을로 오는 다에코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온전한 자신의 눈이 아닌 뿔테 안경에 비친 세상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감정을 느끼며 사색하고, 특별한 행위 없이 감정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눈과 귀로는 환상적인 바다가 주는 풍광과 소리를 듣고, 입으로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그 시간을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안경을 쓰지 않은 인물이 있다. 바로 다에코가 하마다를 잠시 떠나 들렸던 다른 민박집의 주인과 그곳의 사람들이다. 그곳의 사람들과 주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계속 일하며, 노동을 함으로써 얻은 밥은 그만큼 가치 있다고 다에코에게 설득한다.


즉 이곳은 무언가를 해야 가치 있다고 깨달을 수 있는 현실의 세계를 비유하여 표현해 낸 세계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직시하기 위해서인지 안경을 쓰고 있지 않다.

시간이 흘러 다에코는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풍광을 맞는데, 이때 그만 안경이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다에코는 여행을 왔을 때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얼굴로 풍광을 맞는다. 이상의 세계가 끝나고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이상의 세계에서 충분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후련한 듯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종반부 섬에 돌아온 다에코는 다시 안경을 썼다. 영화 〈안경〉에서 안경이라는 것은 현실에 덧대어서 보는 이상의 세계,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위에서 오롯이 내 감정만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매개체다. 



꼭 뭘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런 사람이어도 괜찮아


하마다의 사람들은 위에서 본 옆 민박집 사람들과는 다르게 일을 안 한다. 그냥 먹고, 자고, 하루를 시작하는 체조를 하고, 사색할 뿐이다. 그냥 그뿐이다.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프롤로그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나 자신을 옥죄면서 살아왔고, 그래야만 이 사회의 타의 모범이 되는 일원이 된다고 암묵적인 강요를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다에코의 말처럼 아무런 사람도 아니다. 그냥 나 자신일 뿐이다. 꼭 무언가를 할 필요도, 누군가가 될 필요도, 누군가에게 비치는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그냥 내가 나를 바라봤을 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면 된다.

팥빙수의 맛있는 팥이 되기까지 긴 시간을 지켜보며 졸이는 것 같이 당장 무언가, 누군가가 되지 않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하마다의 그들처럼 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그냥 기다릴 뿐입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다에코는 유지에게 물어본다. 사색하는 요령이라도 있냐고, 그리고 유지는 대답한다.

그저 여기서 차분히 기다릴 뿐입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이는 역설적 표현이면서, 삶의 정도를 나타낸 대사이지 않을까 한다. 우리 삶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간에 흘러가면서 당시 순간만큼은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즐길 뿐이다.


어쩌면 사색이라고 하는 것도 0시 0분 0초에 흘러가 버려 현재가 과거가 되는 무언가를 듣고 보는 것을 짧게나마 느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삶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고, 이 순간만큼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흘러가 버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즐기는 것이 이번 삶을 온전히 즐기는 방법이지 아닐까 한다.

감정의 공간과 여백


우리의 감정에도 공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 공간에는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하기 위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스스로 강요하면서 그 공간을 자꾸만 압박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해했다. 마치 다에코처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아무나 될 권리’가 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권리행사’다. 지금 내 주변을 스쳐 가는 모든 것들은 흘러가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일상의 것들을 즐길 권리가 있다. 어쩌면 나의 시간 위에 올려진 원초적이거나 너무나 평범한 일상에 충실한 것이 나의 삶 속 진정한 이상을 보는 안경이지 않을까?


마치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서 어떠한 대상물이 배경에 빼곡히 채워진 게 아니라 배경에 여백이 존재함에 따라 대상물이 돋보여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되듯이, 우리도 일상 속 감정의 공간에 무언가를 빼곡히 채우지 않고 일정 정도의 감정의 여백을 남겨두어야만 우리의 일상도 어떠한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은 일종의 여행이며, 그럼에도 이 여행은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가끔 이 여행 속에서 흘러가 버리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느껴 볼 여백이 필요하다.


원문: Jaehwan Jeon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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