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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자에게 권한을 주라고!' 서로 힘든 계단 타기에 대해

조회수 2018. 7. 25. 14: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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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해봐요, 1프로젝트 1담당자 1컨택포인트
담당자: 아! 맞다 그 자료 곧 넘겨 드릴게요.

담당자의 황급함이 카톡과 라이언의 땀방울로 전해졌습니다. 요즘은 효율적인 업무용 이모티콘이 많아서 매우 다양한 감정표현을 섬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5분 뒤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담당자: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그 자료는 제 쪽이 아니라 다른 쪽 담당자가 담당이라서 그쪽에서 드릴 거예요.
디자이너: 그분과 직접 컨택할 순 없나요? 어떤 채널로 주시는 거예요?
담당자: 잠시만요!

잠시라고 한 잠시가 흐르고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보통 잠시라고 하면 우린 그동안 다른 일을 하기가 참 힘들잖아요? 예를 들면 배가 아파도 화장실에 가기 뭐하고 밥을 먹으러 카페에서 나가기도 뭐합니다. 심지어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가는 것도 좀 애매하죠. 그냥 잠깐 네이버뿜이나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죠. 근데 그 잠시가 좀 길어지면 초조해집니다.

초조해… 초조하다고…
담당자: 메일로 보내 드렸다고 하네요! 혹시 받으셨나요?
디자이너: 네네, 메일로 오긴 왔는데 그럼 이 건은 이분께 드려야 하나요? 
담당자: 아니요, 그냥 저에게 주시면 돼요!
디자이너: 그럼 수정 피드백이나 추가 자료 요청은 어떻게 해요?
담당자: 아… 음 그건 그분께 받아야 하는데… 그럼 잠시만요!

마찬가지로 잠시가 흐른 뒤 재차 받은 연락은 이러했습니다.

담당자: 그럼 필요한 자료 말해 주시면 제가 요청해서 보내라고 할게요!
디자이너: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담당자님이 한 번에 해 주시면 안 돼요?
담당자: 아, 그럴까요?

받은 프로젝트는 사용 설명서와 홍보용 브로슈어에 대한 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설명서와 브로슈어의 담당자가 달랐던 것이죠. 일단 담당자 중 누가 선배고 누구 기가 더 센지 알 순 없지만 작업 시간 중 45분이 ‘잠시만’을 기다리다가 사라진 것은 명백했습니다.


다른 담당자에게 자꾸 물어보는 거로 봐선 아마도 그분에게 약점이 잡혔거나 빚을 졌다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둘이 참… 별로 안 친한가 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겠더라고요.

다… 담당자님께… 여… 쭤보고…

중요한 건 이거예요. 누가 전달하고 누가 컨펌하는가. 다음 사례도 한 번 볼까용. 어느 중소기업의 회사 소개서와 로고 리뉴얼 건이었는데, 아무래도 담당자가 육두품 신입이고 팀장님은 성골 귀족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화기 너머 담당자가 긁적이며(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긁적였을 것이다) 입을 열었어요. 

담당자: 아, 보내 주신 콘셉트 시안은 잘 받았고요. 이제 팀장님께 보고해서 결정한 뒤에 알려드릴게요.
디자이너: 그럼 콘택트 포인트는 어디로 정리할까요?
담당자: 일단 저에게 연락주시면 제가 팀장님한테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디자이너: 네(일단 뭐…)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한 뒤 하루가 지났습니다. 아니 팀장님이면 아무리 멀어도 지척에 있을 텐데 ‘혹시 어디 출장을 가신 건가’ 싶어 재차 연락했지요. 급하다고 했던 건이라서 저도 조급하긴 마찬가지니까요.

디자이너: 어제 말씀드린 콘셉트 시안은 어떻게 결정되었나요?
담당자: 아, 그게 팀장님께는 보고가 올라갔는데 일단 세 개 중에 하나로 말씀은 하셨거든요. 근데 이사님께도 보고를 드려야 하는데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돌아오시는 대로 확인해서 알려 드릴게요!
팀장님과 이사님 등장

새로운 미션의 등장. 이·사·님.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보통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에서 ‘잠시’는 12시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린 슈뢰딩거의 야옹이인 양 평행우주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자이너: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이번에는 이모티콘 없이 보내 보았습니다. 사실상 소심한 투정을 부린 것이지요. 마침표는 너무 심할 것 같아서 그래도 물음표로 마무리 지어보았습니다.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한참 뒤 담당자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담당자: 아…, 이사님께서 확인은 하셨는데, 대표님과 확인해서 피드백 주신다고 하네요.
끝판왕 등장

끝판왕 등장. 대·표·님. 대표님까지 올라갔으니 하루가 더 넘어가겠구나 생각하며 닭볶음탕에 소주 한잔했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글렀으니 오늘의 술은 오늘 마시는 것이 좋을 듯했죠.

담당자: 대표님께서 내일 중으로 바로 알려주시겠다고 하네요!

밤 12시에 온 카톡을 보니 마음이 짠해지고 애틋해지면서 뭔가 뜨거운 것이 뭉클하니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닭볶음탕이 매워서 그랬나 봅니다. 예상대로 다음 날이 되어서야 답변이 오긴 왔습니다.

담당자: 일단 모든 콘셉트를 확인은 했는데, 혹시 좀 더 다른 형태의 시안 한 개만 더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와서요! 세 번째 콘셉트에서 조금 심플한 느낌으로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디자이너: 대표님과 이사님 쪽에서 나온 피드백인가요?
담당자: 네네.

그렇게 하나의 시안을 더 만들어 보내 준 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팀장, 이사, 대표(역시나 이사님은 자리를 비우셨고, 대표님은 밤 12시에 피드백을 주신 모양)를 거쳐 실무자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정식 시안은 시작도 못 한 채 콘셉트 정하는 데만 정확히 8일이 걸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용?

네… 결국 3일 만에 회사 소개서를 만들어야 했고 로고는 만들지 않는 거로 했어요. 내 500만 원 어디 감……. 


음. 서두가 길었지만 본론은 간단합니다. 디자인 의뢰하기 전에 콘셉트 회의, 제작 부수, 페이지 구성 등은 미리 끝내놓읍시다. 그 후에 디자이너 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는 미팅 후 아무리 늦어도 2-3일 내로 바로 작업에 착수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구우우욷이… 미리 계약 맺어놓고 한도 끝도 없이 대기만 타게 하면 서로 긴장하고 피곤해지기 시작하거든요.

언제까지요?…

그리고 핵심. 실무자에게 권한을 주세요. 위에서 회의와 구성을 어느 정도 가닥 잡았으면 ‘이제부턴 니가 알아서 해라’고 어느 정도 맡겨야 해요. 자꾸 세세한 것, 토씨 하나, 컬러 하나까지 대표님까지 보고가 올라가면 그 시안은 억겁의 세월이 흘러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 거예요. 


실무자를 못 믿겠으면 본인이 직접 커뮤니케이션하세요. 그 불안불안함을 안고 그 못 미더운 분에게 맡기곤 자꾸 본인에게 가져와서 확인 맡으라고 하면 결국 본인의 일만 늘어나는 거거든요. 서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며칠까지 시안 3개로 추려서 가꼬 와.
  2. 그중 가장 괜찮다고 생각되는 거 1, 2, 3순위 잡아줘.
  3. 그 이유를 써줘.

하고 그냥 맡기는 게 짱입니다. 이게 자꾸 안 되는 이유는 3가지가 있더라고요.

  1. 윗사람이 굉장히 자기 의견 반영을 좋아하시는 분: 뭐라도 한마디 꼭 하고 싶으신 분.
  2.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떤 것을 잘못 넣으면 진짜 큰일 나는 회사: 생각보다 많습니다. 특히 대기업 대상 행사나 디자인할 때는 회장님의 언어, 그분의 말, 가치를 표현하는 데 있어 괴이이이잉~장히 신중해야 합니다. 점 하나도 틀리면 안 되거든요. 회장님 타노스인 줄.
  3. 실무자가 진짜 일을 못 하는 경우

거의 과반수의 경우는 1번 케이스가 많았습니다. 뭔가 팀장님이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라든가… 미술가 집안 분이시라거나, 또는 대표님이 유독 디자인에 덕력이 있다거나… 아니면 디자인과 상관없이 뭐라도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스타일이라든가, 이런 식이죠.


딱 잘라서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디렉션 방식이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계단 타기만 하면 잘 나올 디자인도 망합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수많은 사람을 거치며 말이 더해지고 그 말이 오르내릴 때마다 조금씩 바뀌거든요. 디자인은 길을 잃고 쑥대머리가 됩니다. 


결국 비싼 돈 들여서 이상한 시안을 받을 거고, 시간은 시간대로 썼을 거고, 실무자는 지쳐버렸을 거고, 디자이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떠날 겁니다.

이런 대우주적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 모두 실천해봐요. 1프로젝트 1담당자 1컨택포인트 니 선에서 정리하기, 정리된 것만 나에게 보고!


원문: 애프터모멘트 크리에이티브 랩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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