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영어가 뭐라고

조회수 2018. 7. 5. 14: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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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이해와 감수성이거든.
윤한이는 “Would you like something to drink?”도 한다더라. 아리는 어떻게 ABC도 몰라.

엄마가 살짝 눈물을 보였다. 여기서 윤한이는 내 조카고, 아리는 내 딸이다. 둘 다 다섯 살이다. 오해할까 싶어 말하는데, 이거 코미디 아니다. ‘두 딸 뼈 빠지게 뒷바라지해 서울에 입성시켰다’고 자부하는 우리 엄마, 성 여사의 진심이다. 나는 웃으려다가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았다. 도대체 그놈의 영어가 뭐길래, 이렇게 난리인 건지.

고작 어린이집을 다닐 뿐인데 ‘영어에 대한 유혹’은 광풍처럼 분다. 누구는 디즈니 영어를 한다더라, 매일 원어민과 전화를 한다더라, 웬만한 생활영어는 마스터했다더라 등 ‘카더라’들은 날 혼란스럽게 한다. 어린이집 학부모들, 직장 동료들, 게다가 지금은 가족까지 이 난리이니 정작 그 바람을 피해 가는 건 나뿐인가 한다.


갈수록 심해질 듯한 들볶임을 피하려 나만의 논리를 정립해보기로 했다. 경험도 더듬어보고 자료도 찾아봤다. 그리고 이건 세상에서 가장 설득하기 어렵다는 우리 엄마에게 바치는 편지다.



영어는 좀 달랐어


엄마 나야. 우선 정말 고마워. 청주 촌구석에서 좋은 대학 갈 수 있었던 거 다 엄마 덕분이야. 일도 포기하고 전업주부 하면서 좋은 책, 교구는 누구보다 먼저 사줬잖아. 본인 옷이랑 화장품도 안 사면서. 그토록 희생적인 ‘교육열’이 있었기에 나 정말 죽어라 공부한 것 같아. 울 엄마 고생하는데 교잿값이라도 남겨야지 싶어서.


근데 영어는 좀 달랐어. 엄마가 너무 강요를 하더라고. 특히 매일 저녁 윤선생 영어교실 틀어놓고 발음 체크하는 거 되게 싫었어. 좀 멋없는 느낌? 왜 있잖아. 너무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 거.


체스 천재들을 만든 한 아빠의 이야기 알아? 헝가리 교육 실험 학자 폴가르의 실화야. 그는 어느 날 신문에 광고를 냈대. 천재 만들기 실험을 위해 여자를 구한다고. 근데 정말 어떤 여자가 왔고, 둘은 결혼을 했고, 딸 셋을 낳았지. 그리고 정말 그는 딸 셋을 다 ‘체스 천재’로 만들었어. 방법은 하나야. 혼자 체스를 두고, 같이 두고 싶어 하는 딸들이 다가올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좀, 참아. 이렇게 재미있는 건 좀 더 커야만 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의 딸은 역사상 최강의 여성 체스 선수가 되었다…

얼마나 멋진 일화야? 밀어낼수록 다가온다, 호기심은 이렇게 발동시키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중학교 이후로 영어를 갑자기 잘하게 된 거, 윤선생 때문이 아니야. 한글 덕분이야. 나는 아직도 “한글을 잘해야 영어도 잘한다”는 것을 굳게 믿어. 언어는 기계적인 게 아니거든. 이해와 감수성이거든. 


한글을 잘 익힌 아이가 문장과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영어를 대하면 단어 몇 개 익히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봐. 누군가는 3-6세에 언어 생성능력이 시작된다며 이 시기를 강조하지만, 난 언어이해능력이 자라는 측두엽의 힘을 믿어. 그 시기가 7-12세라고 하더군. 모국어를 완벽히 익힌 그 이후지.



영어는 무기가 아니야


난 엄마의 맘도 이해해. 세계화 물결에 좌절했던 1990년도에 ‘영어공용화론’ 이 한창 득세했으니까. 복거일 작가였나? 영어의 경제성(미국 같은 강대국과 쉽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한글의 표현력 한계를 근거로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했지.


근데 말이야. 이젠 중국, 인도 등 신흥국가가 부상한 것은 물론 영어 통역 앱까지 등장한 시대야. 갑자기 삼천포로 좀 샜는데 영어를 잘해 손해 볼 건 없지만 전부는 아니란 거야. 특히 요즘처럼 ‘놀 권리’가 없는 애들에게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는 주지 말자. 불쌍하잖아.


그리고 난 영어 사용을 좀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이 있어. 글로벌 회사에서 잠깐 일을 배웠을 때의 일인데.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다 마친 과장 둘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것을 사용하더라고. 평소에도 서로 제니퍼와 레이첼로 칭하는 분들인데, 뭐 여기까진 OK. 설렁탕을 먹으러 가서 웃기게 주문을 했어.

설렁탕에 파 Many Many.
더 Many Many

그 ‘매니매니’의 부분에선 두, 세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는 표현도 하더군. 이런 일화는 정말 매 순간 있었지. 지금 회사에도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어. 속칭 ‘영어 사대주의자’들. 분명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아이비리그 좀 나왔다는 이유로 꼭 엘리베이터에서 영어로 대화를 해. 들어보면 별말 없어. 오늘 뭐 먹을까, 이 식당 맛있다 등. 


오히려 영어를 진짜 잘하는 사람들은 겸손해. 각 문화에 대한 이해도 완벽하지.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지? ‘영어’가 마치 무기처럼 어설프게 인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특히 어릴 때 너무 ‘영어, 영어’ 하면 한국어보다 비하해 인지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엄마, 우리 이번 주말엔 아리 데리고 공원에나 가자. 영어 교재, 그거 내가 때 되면 알아서 사 줄게. 괜히 쌈짓돈 털지 말고, 엄마 좋은 거나 사. 덧붙이면 ‘파파고’라는 번역 앱의 철학은 “언어 장벽 없이 대화하는 세상을 꿈꿉니다”래. 우리,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벽부터 허무는 건 어떨까?


원문: 이승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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