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고 출신 시골 수재, '행정의 달인' 되어 안동으로 돌아오다 – 경북 안동시장 후보 이삼걸 인터뷰

조회수 2018. 6. 8. 14: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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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지방선거 특집: 경북 안동시장 후보 이삼걸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몇 시에 일어나셨어요? 거의 못 주무시죠 요즘?


이삼걸(안동시장 후보): 그래도 토론 있을 때는 너무 피곤하면 토론이 안 돼요. 그래서 전날 몸 관리를 좀 하고 있어요.


리: 몸 관리를 하시는 것 치고 지금까지의 삶은 굉장히 노력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이삼걸: 삶이 도전의 연속이었죠.


리: 중학교 때까지 안동에 계셨죠? 고등학교 때는 어떻게 서울 올라가셨어요?


이삼걸: 고등학교 때 서울에 형님들이 계셨어요. 큰 형, 작은 형. 보통 그렇잖아요. 형님 계시니까, 형님 줄로 해서 무조건 올라갔죠.


리: 형님들은 서울에서 대학 나오신 거예요?


이삼걸: 작은 형님은 서울에서 제가 졸업한 덕수상고를 나왔고. 큰 형님은 안동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선생님을 그만두고 서울에 와서 사업하셨어요.

출처: 중앙시사매거진
본래 야간학교로 출발한 덕수상고는 ‘가난한 수재들을 위한 금융사관학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금융권 인재들을 길러냈다.

리: 다들 서울로 가서 공부했는데 상고를 다니고. 형님들도 다시 안동으로 돌아오시고. 집이 굉장히 힘드셨나 봐요.


이삼걸: 네, 우리 집이야 재산이 없었지만 형님들부터 학교를 잘 다닌 편이고, 제가 처음 고등학교 가려고 할 때는 상고가 아니라 일반고를 가려고 했어요. 시골에서는 공부 잘한다고 했죠 (웃음) 그렇게 서울로 갔는데, 그때 큰 형님이 서울에서 사업하다가 빚을 졌어요. 집에 어른들은 모르고. 나는 모르고 올라갔다가, 그 사실을 알고 인문계 고등학교 가는 걸 포기하고 상고 야간부를 갔죠.


리: 고등학교도 야간부가 있어요?


이삼걸: 1부, 2부가 있어요. 그렇게 학교 마치고 외환은행에 들어갔죠.


리: 야간고를 다녔으면 오전엔 일하신 거예요?


이삼걸: 요새로 따지면 알바 정도고, 고정적인 직장은 아니었죠. 이것저것 많이 해봤죠.


리: 고등학생이 고정적인 직장이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


이삼걸: 그래도 같은 친구 중에서는 매일 법원에 출근해서 신발 닦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 친구는 지금 변호사 되었죠. 정용환 변호사라고.


리: 그때부터 일하고, 대학교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이삼걸: 대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외환은행에서 일하게 된 거죠. 이용득 의원하고 제가 덕수상고 동기입니다. 저는 외환은행 다니고, 이용득 의원은 상업은행 가고. 그래서 상업은행 갈 때 제가 공부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죠. 용득이가 공부를 안 하고 좀 놀았거든요. 용득이는 호적이 1953년생이고 저는 1955년생이에요. 자기가 동기들보다 2살 많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 가야 하니까 은행에서 그 나이에 뽑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런데 알아보니 갈 수 있는 게 그때 상업은행이 가능했어요. 그래서 불과 한두 달 공부를 해서 은행에 가게 되었죠.

이삼걸 후보 개소식에 참석한 이용득 의원. 한국노총 위원장을 지낸 민주당의 대표적인 노동 전문가지만 이삼걸 후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

리: 그때 은행 간다는 건 어느 정도 지위였어요? 오늘날로 따지면 대기업?


이삼걸: 요새 삼성 현대 가는 것보다 뭐, 고등학교 졸업하고 갈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죠.


리: 공부 잘했나 보네요~


이삼걸: 월급이 그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은행에서 받은 월급이 나중에 고시 합격하고 사무관 때 받은 월급의 세 배니까.


리: 어마어마한 직장이네요.


이삼걸: 제가 다닐 때 은행 대우가 참 좋았어요.

1977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어서 알바를 병행하는 공무원의 슬픈 현실을 지적하며 대졸자가 공무원에 지원하지 않아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 같아서는 뭐 (…)

리: 아니 그런데 대학교는 왜 갔어요?


이삼걸: 대학교는 당연히 가야되는 것처럼 생각했으니까 야간대학교를 갔죠. 은행 다니고 야간대학교도 다니고. 그때 형편이 좋으니까 술도 많이 먹어서 1, 2학년 때는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2학년 마치고 군에 갔는데, 군에 가서 공부를 좀 단단하게 했죠. 내가 야간대만 나와서 되겠느냐, 제대로 공부를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복학하고, 은행에 복직하고 하면서 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리: 야간고등학교는 생각해보면 가난한 고학생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야간대학교는 어떤 분위기였어요?


이삼걸: 야간대학교는 전부 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우리 행정학과에 많이 있었고요. 그리고 은행 다니는 사람들. 건대 2부 대학이 종로 낙원동, 낙원상가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서울 시내 근처에 있는 은행이나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죠.


리: 직장인들이 모여서 대학 다니면 재밌었겠네요.


이삼걸: 보통 양복 입고 와서 술 먹고 놀고 그런 분위기였죠. (웃음) 그럴 정도로 야간대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제가 그래서 3학년 복학하면서 주간으로 옮겼죠.

70년대 당시 건국대 야간부는 낙원상가 뒤편 건국빌딩 자리에 위치했었다. 오늘날에도 포장마차가 즐비한 거리인 만큼 당시 야간대의 분위기도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

자존심 하나로 개척한 사무관의 길


리: 제가 이번에 돌아다니면서 행시 출신 여럿 봤는데, 그때 행시는 사람 적게 뽑아서 지금보다 빡셌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직장 다니면서 공부할만한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삼걸: 제가 정확히 1979년 1월 23일 날 제대하고, 4월 2일 자로 은행을 그만뒀어요. 그리고 주간 대학으로 옮겨서 도서관 생활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 9월 30일에 1차 시험을 합격했어요. 10월 달에 2차 시험 합격하고.


리: 빨리 합격하신 거네요… 은행 연봉이 지금으로 따지자면 6,000~7,000은 했던 것 같은데 그걸 왜 관뒀어요?


이삼걸: 일단은 어릴 때부터 공직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두 번째는 어릴 때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저 자신을 시험해본다고 도전해본 거죠.


리: 어떻게 보면 자존심이 엄청 셌네요.


이삼걸: 네.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운이 좋게 19개월 만에 1, 2차 다 되었으니까. 빨리 된 거죠.


리: 명문대 다니는 사람들도 두세 번은 도전하던데…


이삼걸: 운도 좋았고. 시험에 도전한 거죠. 은행 그만두고 집에 와서 아버님한테 얘기하니까, 왜 좋은 직장을 상의도 없이 그만뒀냐. 그래서 아버님, 제가 2년만 공부하면 4학년 졸업하는데, 고시 안 되면 은행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그 정도는 대학 졸업하고 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죠. 공부한 게 어디 가겠어요. 우리 학교가 184명이었는데, 제가 11등이었어요. 점수가 좋았죠.


리: 승부욕이 세다고 해야 할까, 자존심이 세다고 해야 할까…


이삼걸: 승부욕도 있지만 내 자존심, 내 값어치에 대해 시험하고 싶었죠. 고등학교, 대학교를 스카이 대학, 명문대를 안 쳐봤으니까. 그런 실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 촌에서 공부 잘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게 전국에 통하는가 아닌가.

출처: 중앙일보
문재인 정부 들어 덕수상고의 전성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리: 덕수상고 다니셨는데 그럼 잘한 거죠 사실.


이삼걸: 지나고 나보니까 그런데, 동기 중에 조재연 대법관도 나오고.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도 나오고. 사시도 행시도 많이 붙고. 주간 6개 반, 야간 4개 반인데 야간부에도 우수한 애들이 꽤 많았어요. 아무튼 그 당시에 촌에서 다 올라온 애들이 70~80%였어요. 그때는 촌에서 날고 기는 애들이 상고 갔죠.


리: 공부하면서 어려운 지점은 없으셨나요?


이삼걸: 운이 좋았다고 봐야 되는 게. 군대 제대하고 막바로 하다 보니 몸도 건강하고, 집중력도 뛰어나고. 이전에 은행 다니면서 연애도 하고 할 거 다해봤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욕구가 없었어요. 스물여섯이었는데.


리: 합격하니까 기분이 어떻던가요?


이삼걸: 야, 나도 할 수 있구나. 세상 별거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수한 성적으로 되었으니까. 우리 박남춘 의원, 이계호 의원, 정두언 의원이 동기죠. 동기들이 정치계에 많이 갔어요.

출처: 경북매일
역대 경북도지사들. 관선 시대가 이어졌다면 이 리스트에 후보의 이름이 올라있었을지도…

리: 사무관 생활하니까 어떠셨어요? 어느 부서로 가셨죠?


이삼걸: 내무부로 갔죠. 제가 내무부를 원해서 갔어요. 어릴 때 촌에 있으면서 지역이 낙후되어 있으니까, 지역에서 뭔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내무부를 간 거죠. 그 당시에는 지방자치제가 아니었으니까, 임명직이었으니까 지역에서 뭔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지방자치제가 안되었으면 제가 나이 40대 초반에 안동시장했을 수도 있겠죠. 50대에는 지사도 되고(웃음).


리: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사까지 막 하고(웃음).


이삼걸: 관선 때니까. 관선 때는 지사하고 나서 차관을 하거든요. 제가 차관을 했으니까. 제가 부지사로 일할 때가 예전으로 따지면 지사를 한 겁니다.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내무부의 코스가 그랬어요.


리: 생각해보니 조순 시장 같은 경우는 엄청 일찍 했네요.


이삼걸: 조순 시장은 민선으로 된 사람이고. 관선은 공무원 출신밖에 안 되었습니다. 관선 때 같으면, 제가 부지사를 2009년에 한 거니까 지사 한 거죠.



공무원 연금 개혁이라는 난제를 풀다


리: 지방자치제 민선 되면서 짜증 났겠네요. 나의 꿈이 깨졌어, 그러면서 (웃음)


이삼걸: 지방선거 처음 한 게 1995년도인데, 1995년도에 늦게 유학을 갔어요. 미국의 시라큐스 대학으로.


리: 어떤 걸 배우러 가신 거예요? 행시 출신은 워낙 생활이 빡세다 보니까 유학 아니면 쉴 틈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삼걸: 저는 유학을 좀 늦게 간 편이에요. 서기관 달고 과장 달고 갔으니까. 사실 그때 원래대로라면 군수 내려갈 때가 되어서, 어릴 때 꿈을 이룰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지방 자치제가 된 거예요. 원래 생각하던 길이 막힌 거죠. 그래서 지방자치제 되니까 머리를 식힐 겸 공부를 하러 갔어요. 그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죠.


리: 유학 전 10여 년 동안 내무부 생활은 어떠셨어요?


이삼걸: 제가 1981년에 공무원을 시작해서 15년 후에 유학을 가게 되었죠. 사무관 때는 전부 다 보고서 쓰고 기획하고… 자기 얼굴로 낼 수 있는 업무들이 별로 없어요. 아침부터 새벽까지 근무하는데, 토요일도 근무하고. 일요일도 상황 업무 때문에 오전에 출근했죠. 힘든 생활이었죠. 공무원들이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차관 할 때도 업무 파악하려고 담당자 직접 불러내고 그러지 않았어요. 다 전화로 얘기하고. 예전에는 휴대폰이 없어서, 전부 다 직접 가서 보고해야 하니까 매일이 상황 대기입니다.


리: 사람을 빡세게 굴렸네요.


이삼걸: 노는 날 할 일 없어서 바둑을 두고 있어도, 사무실 근처에 있었어야 했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리: 시장 되시면 또 공무원들 빡세게 굴리시는 거 아니에요?


이삼걸: 에이, 제가 국장 되고 나서 직접 공무원 불러내지 않았어요. 제가 공무원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차관 때도 내일 아침 청와대 보고서가 있다. 내가 봐야겠다 해도 직접 사무실에 안 나가요. 내가 사무실 나가면, 아래 줄줄이 다 사무실에 나와야 하니까. 요새는 뭐 메신저로 파일 다 보내니까, 파일 받아서 보고 말죠. 저는 옛날에 하도 고생을 해서, 그런 식으로 빡세게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일은 효율적으로 책임 있게 해야죠.

사무실로 불러내는 대신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

리: 저는 행시 출신들 보면 정치인들보다 좀 꼼꼼하게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당시에 추진했던 것 중에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이삼걸: 예전에 총무처하고 내무부하고 합쳐져서, 서로 과장들이 교류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복지과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무원 연금 문제를 맡게 된 거예요. 당시 공무원 연금이 시간이 지나면서 적자가 나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공무원들의 혜택을 깎고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연금법을 개정하는 걸 맡으러 제가 갔죠. 가서 해보니까, 공무원들에게도 설득해야 하고 국민들도 설득해야 하잖아요. 또 전문가들도 설득해야 해요. 전문가들은 공무원 연금의 특수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국민연금을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어려운 상황에서 설득하느라 힘들었죠.


리: 어떤 포인트가 어려웠던 거예요?


이삼걸: 공무원들은 내는 게 많고 받는 게 줄어드니까 반대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공무원들에게 그렇게 얘기했어요. 남의 손에 의해 칼질당하면 더 상황이 안 좋아진다. 우리 스스로 고치는 것이 그래도 우리에게 낫다. 그렇게 공무원 연금 개혁의 틀을 만들었죠. 당시엔 나이와 상관없이 퇴직하자마자 공무원 연금을 줬어요. 그게 적자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니까, 1차적으로 60세까지 지급 연령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한 번에 그렇게 정하면 저항이 강하니까, 2년마다 1살씩 지급 연령을 높이도록 설계를 했어요. 그래서 당장 퇴직자들은 영향을 덜 받게. 그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죠.


리: 공무원 연금 개정을 그렇게 하셨는데, 사실 일반 국민들은 공무원 연금을 어떻게 개혁하더라도 불만이 많단 말이에요. 국민들보다 혜택이 좋으니까. 국민들 설득은 어떻게 하셨어요?


이삼걸: 국민연금하고 공무원 연금하고 출발 기원이 틀려요. 그걸 설명했죠. 공무원 연금은 처음에 퇴직금을 일시불로 선택하거나, 연금으로 하거나 선택하도록 했어요. 퇴직금이 따로 없고, 퇴직금 대용으로 연금을 만들어놓은 거죠. 근데 처음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는, 시중 은행 금리가 워낙 좋으니까 연금을 선택한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전부 다 일시불 선택하니까 문제가 없다가, 나중에 시중 금리가 낮아지면서 연금을 선택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갑자기 적자가 불어난 거죠. 그러니까, 공무원 연금은 퇴직금 대신에 생긴 연금이다. 그 특수성을 인정해달라고 이야기했죠. 두 번째로, 그 당시에 공무원들의 월급이 매우 적었어요. 제가 사무관 처음 갔을 때 은행 월급 1/3이라고 했잖아요. 사무관인데도. 그래서 평소에 공무원 급여가 적은 대신 노후를 보장해주는 거다. 그런 논리를 끌고 온 겁니다.


리: 지금도 뭐 기업체에 비해 많이 받는 편은 아니니까요.


이삼걸: 그래도 지금은 생활할만하니까. 월급은 괜찮죠.

출처: 동아일보
공무원 연금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던 공무원들을 위한 복지 혜택이었으나, 국민연금의 탄생 이후 형평성 문제와 재정 적자 문제가 제기되면서 지난한 개정의 역사를 밟았다.

성실성으로 트리플크라운 이룬 ‘독일 병정’


리: 시라큐스 대학에 유학을 가시게 되었는데, 가서 어떻게 공부를 하셨어요?


이삼걸: 제가 애가 셋인데, 다 초등학교 보냈죠. 업무로부터 벗어나니까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게 된 거죠. 2년 동안 있었는데, 우선 사고의 다양성이 생겼어요. 또 우리 사회와 다른 것들을 금방금방 느끼게 되더라고요. 이런 경험이 잠재되어 있다가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공무원 개혁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전 인종이 모여서 살잖아요. 그에 맞는 제도도 다양하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리: 대표적으로 한국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은 뭐였나요?


이삼걸: 소수자에 대한 배려. 한국은 획일적인 문화였는데, 미국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일반화되어 있더라고요. 인종이 다양하니 그렇겠지만. 여러 가지 과목을 듣다가 국방학을 들었는데, 교수가 연세가 많으셔서 목소리가 작아서 맨 앞자리에 앉아 들었어야 했어요. 그분이 얘기하는 거 보면, 매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나온 기사를 이야기해요. 과제 내는 것도 어느 신문사 무슨 칼럼을 읽고 리포트를 내라고 해요. 교수가 정말 실력이 있다는 거죠. 평생을 공부를 쌓아도, 매일 뉴스를 체크하는 거죠. 그 모습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곳이 만만하지 않다. 그런 깊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사회도 깊이 있는 인적 자원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시라큐스 대학 맥스웰 스쿨은 공공행정학 분야의 톱클래스 학교로 잘 알려졌다.

리: 2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내무부가 바뀐 거죠?


이삼걸: 행정자치부가 되었죠. 처음에 왔을 때는 내무부였는데, 6개월쯤 있다가 DJ 정부가 들어오면서 행정자치부가 된 거죠. DJ 정부 들어서 제가 복지과장 지원해서 공무원 연금 맡게 된 거고. 연수 다녀와서, 일부러 남들이 안 가려고 하는 일에 자원을 했던 거죠. 그런 공으로 나중에 감사과장, 재무과장, 행정과장 다 하게 된 거고. 보통 재무, 행정, 감사를 3대 부서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보고 트리플크라운을 했다 이렇게 얘기를 했죠.


리: 어떻게 그렇게 중직을 맡게 된 걸까요?


이삼걸: 제가 백그라운드가 약하잖아요.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지도 않고. TK라고는 하지만, 경북고 출신이 아니고 서울에서 상고 나왔으니 TK 주류도 못되죠. 그런데도 제가 할 수 있었던 부분은 일로서 증명한 거죠. 윗사람이 봤을 때 책임감이 강하고 소신이 있다고 평가받았으니까요. 연금법도 그렇지만 상당히 여러 고비가 있었는데, 그걸 설득하면서 헤쳐나가는 걸 보고 그 당시 최인기 차관이 저보고 ‘독일 병정’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 했던 부분이 힘이 된 거 같아요.


리: 그렇게 일을 하면서 당시 지방자치의 여러 문제가 많이 보였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온갖 유혹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삼걸: 내무부는 민간 기업을 상대하는 일이 잘 없어요. 내무부는 지방자치단체를 상대하고, 로비하는 사람들은 지방자치단체로 찾아오죠. 옛날 총무처의 경우에도 각 부처가 인사나 조직을 총괄하니까, 부처 공무원이 클라이언트에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있어도 공무원끼리 술 한잔하고 이런 건 있을 수 있어도 일반적으로 민간하고 엮이고 이럴 상황은 없어요.


리: 지자체에서 이런저런 요구가 들어온다거나 할 것 같은데요.


이삼걸: 있기야 있죠. 그래도 공무원 사회의 로비라고 하는 건, 일정한 룰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돈 놓고 돈 먹는 그런 아사리판은 아닙니다. 위험하지 않죠.



지방자치제, 마인드 개선이 필요하다


리: 지자체의 빈틈이 많이 보이진 않나요?


이삼걸: 지금도 안동에서 그런 걸 많이 느끼지만, 지자체가 위에서 내려온 지침 가지고만 일하고 스스로 창의적인 일을 안 해요. 지방자치제가 되면 알아서 창의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보통 선거에만 영향을 받지 창의성을 가지고 일하는 경우는 없어요.


리: 제가 중소도시를 돌면서 보니까, 그래도 서울은 견제와 감시가 되는데 지방은 예산이 개판으로 쓰이는 거 같아요. 짬짜미도 많고.


이삼걸: 물론 감사과장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봤지만, 요새 선거하면서 더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제가 선거를 하기 위해서 안동에서 활동하니까 안동시의 모든 업무가 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게 보여요. 민관의 유착 같은 것도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시장이 재선하기 위해 어떤 문중을 지원한다거나, 기업을 도와준다거나 이런 일이 있다는 거죠. 선거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 지원이 반복되니까 유착이 되고 특혜가 생기는 겁니다.


리: 처음부터 짜고 친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서로 엮인다는 거죠?


이삼걸: 선거 때문이죠. 선거 없을 때는 그런 식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지방자치의 폐해에 대해 주장하는 사람도 많죠. 그래도 저는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을 키워야지, 제도 자체를 없애는 건 좋지 않다고 봐요.


리: 관선보다는 민선이 옳다는 거죠?


이삼걸: 1995년에도 제가 군수의 꿈을 포기해야 했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이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안동을 보면 안동시민 전체 하나하나가 깨이고 마인드가 바뀌어야 경쟁력이 생깁니다. 이를 위해서 공무원들부터 바뀌어서 영향을 미치든가, 민이 성장하든지. 한국 민주화의 역사가 그런 거니까요.



적극적인 개방과 투자가 안동을 바꾼다


리: 안동 지방의 경우 안동 특유의 가문 문화가 세잖아요. 그 가문과 지자체의 관계가 눈에 띄더라고요.


이삼걸: 어느 성씨를 불문하고, 문중이 굉장히 강해요. 대도시에서 느끼지 못할 분위기. 그 성씨 문화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 점에서 전근대적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폐쇄적인 사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농경 사회에서는 이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내부적으로 단결하고 외부에 대해 대응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개방 사회에서는 외부에 대해 폐쇄적인 경향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죠.

출처: 오마이뉴스
도산서당에 모인 안동의 문중 대표들. 우리가 생각하는 안동의 모습은 주로 이런 풍경이다 (…)

리: 지금 TK 지역이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안동이 특히 낙후되어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번에 신도청도 오는데 왜 특히 낙후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이삼걸: 신도청이 오는 배경도 낙후되었기 때문에 균형발전의 측면에서 오게 된 거예요. 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포항이나 경주 같은 동남권이 발전해 있고. 경부선이 내려오면서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닿는 구미, 김천, 경산은 발전되어 있는데, 북부 지역이 발전이 안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도청이 여기에 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문제 제기하는 부분은, 도청만 갖다 놓는다고 해서 발전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리: 도청이 온다는 게 중소도시에서 절대 작은 일은 아니잖아요.


이삼걸: 도청이 오고 공무원이 늘어난다고 해서 이 지역이 발전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거꾸로 되어있죠. 도청이 아예 안동시 중심에 오면 공무원 숫자도 늘고 소비자도 늘어나는데, 신도시를 만들고 그쪽으로 가니까 이 구도심 지역까지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안동 경제가 좋지 않습니다.

출처: 한국일보
웅장한 규모로 유명세를 탄 경북신도청이 안동 인근에 큰 규모의 신도시를 형성하면서, 오히려 안동 구도심이 위협을 받고 있다.

리: 이게 참 딜레마네요. 그렇다고 구도심에 도청이 들어올만한 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도시에 독자 상권이 생기면, 구도심하고 같이 살리기는 어렵잖아요.


이삼걸: 구도심이 계속적으로 성장할 동력이 있으면 상관이 없겠지만, 점점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처에 신도시가 생기면 블랙홀처럼 빨려가는 거죠. 신도청 부근에 아파트가 들어서니까 이걸 구매하면서 시내에 있던 돈이 빠져나가잖아요. 그러다 보니 시내 상인들은 대번에 주름살이 생기고. 그런데 신도청 인근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예전만큼 안 팔려요. 빚을 내서 계속 이자 내며 버티는 건데, 안동 지역 경제가 좋지 않으니까 집값이 내려가는 거죠.


리: 이건 지방 도시들이 많이 가진 딜레마 같은데 결국 해결책은 어떻게든 일자리를 만들어서 사람을 늘리든가, 뭔가 고소득의 신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거잖아요.


이삼걸: 어차피 경제는 외부의 돈이 안동으로 흘러들어 와야 하는 거잖아요. 보통 이곳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서 외부에 팔아야 돈이 들어오는 건데, 여긴 그런 조건이 안 되는 거죠. 그러면 외부 사람이 여기 와서 돈을 쓰도록 해야 하는데, 결국 관광 산업에 있어서 지나가는 관광이 아니라 머무는 관광을 하도록 만들어야겠죠. 즐기고, 먹고, 휴양할 여건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겠죠.

흔히 안동하면 하회마을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안동 시내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안동시는 ‘머무는 관광’의 경제적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리: 그런 관광 인프라를 만드는 건 보통 호남 지역에서 잘 만든 거 같고, 경북에서는 경주 정도만 된 것 같아요. 안동은 테마파크가 있긴 하지만 돈 낭비라는 얘기만 많이 듣고… 어떤 쪽으로 관광 발전을 시키려는 거예요?


이삼걸: 시설만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마인드가 바뀌어야 하는 거지만. 시설만 보더라도 너무 흩어져 있어요. 도산서원, 하회마을… 그러면 사람들이 누가 여기에 와서 똑같은 걸 계속 구경하기 위해서 머무르겠어요. 잠을 안 잔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동은 물이 풍부하니까 아시아급의 워터파크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댐의 물을 이용해서 큰 수상 놀이 시설을 유치하면 서울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매력적인 곳이 될 수 있겠죠.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행정의 기술


리: 말씀하신 산업을 만들려면 부지가 필요하고 예산이 필요한데요, 이게 확보가 가능할까요?


이삼걸: 부지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데, 유치하는 게 어려워요. 유치하려면 자기네들의 계산이 맞아야 하는데. 그래서 이건 중장기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게 만들려면 일단 교통을 만들어야 하고. 부지와 물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정화시설도 만들고. 이렇게 여건이 마련이 되면, 샌디에고의 시 월드 같은 모델로 국제자본과 국내 컨소시엄이 맞물린 계획이 가능하겠죠. 이런 게 되어야 안동이 도청 소재지로서 인구 50만 도시로 가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또 제가 당장 공약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 광복절 때 대통령이 임청각 복원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임청각은 지금 민주당 정부의 정신적 뿌리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임청각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 집이잖아요. 이상룡 선생이 원래 부자였는데, 나라를 빼앗기고 나니까 가문이 뭐가 중요하냐, 노비를 전부 방면하고 땅을 팔아서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우셨죠. 그 당시 만주에서 활동했던 분들이, 유교 엘리트층인 양반 계급과 상민 계급이 같이 활동한 거잖아요. 자기 종이었던 사람들과 동지로 활동을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갈등이 있었고, 또 독립운동의 노선을 두고 갈등이 있었죠.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이 있었죠. 사회주의 노선이 그 당시에 상당하게 세력을 얻었어요. 노동자, 소작농의 처지나 나라를 빼앗긴 피압박 민족의 처지가 비슷하니까. 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받아들여서 활동했던 분이 석주 선생님입니다.

이상룡은 영화 ‘암살’로도 유명해진 독립군 양성 기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갈라진 임시정부를 통합하려 노력한 독립운동가다.

리: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 통합의 정신과 유사하네요.


이삼걸: 통합의 정신이고, 그 당시 유학자의 범주를 벗어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돈을 내놓아 학교를 열었고, 또 내각제였던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아서 독립운동을 이끈 거죠.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이름만 걸쳐놓고 하와이에 가서 활동했잖아요. 그러다 하와이 교민들 돈 쓰는 문제로 탄핵당하면서 내각제가 되었죠. 문제는, 나중에 정권을 잡은 건 이승만이었고. 그러다 보니 석주 이상룡 선생님 후손들이 많이 고생했어요. 여기 이항증씨라고 지금 임청각 지키시는 분은 어릴 적에 고아원에 있었어요. 해방 후에도 이상룡 선생 자손들이 빛을 못 봤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는 똑바로 서야 한다는 거죠. 독립운동한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임청각을 복원하는 것. 일제시대 때 철도 건설하면서 임청각이 중간이 잘려버리거든요. 그걸 정상화한다는 생각으로 임청각을 복원한다는 겁니다. 저는 임청각을 단순히 건물만 복원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복원한다는 생각으로 이 지역 전체를 역사문화단지로 만들자는 거죠. 안동시의 관광지로도 활용하고. 마침 철도노선이 이선이 되면서 안동역사하고 철도청 부지가 그대로 남게 되었어요. 이 부지를 활용해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문화관광 단지를 만들자는 생각입니다. 이걸 시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으니 국가사업으로 육성하자는 것이고요.

출처: 문화예술채널
지난해 광복절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청각에 대해 언급한 이후, 재빠르게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국가 기획으로 큰 역사문화단지를 만들고, 또 안동 도심 내에 천리천이라는 곳이 있어요. 물이 흐르던 천인데, 지금 현재 물이 안 흘러요.


리: 어쩌다가요? 위에 시설을 잘못한 건가요?


이삼걸: 예전에도 물이 상시 흘렀던 것은 아니고, 비가 오면 하천이 되는 곳이었어요. 지금은 우수 처리를 따로 하니까, 천이 죽어버렸죠. 이걸 안동 댐의 보조 댐과 연결해서,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서 보트가 지나다니고 카페가 있는 수상거리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이걸 임청각을 포함한 역사문화단지와 연결하면 시내 자체가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지금은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이 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별로 시내에 영향이 없다고 보죠.


리: 안동의 관광자원, 문화자원이 나쁜 도시가 아닌데. 왜 이렇게 발전이 안되었다고 보세요?


이삼걸: 필사적으로 경쟁력을 강화해야 했는데 그런 마인드가 안되었죠. 안동에 투자하고 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오든지 말든지 하는 마인드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위에서부터 생각을 바꾸고 세일즈를 해야 합니다. 지금 안동에선 장사를 해도 별로 친절하지 않아요. 그런 면에 좀 약했고.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키는 데 많이 힘을 썼지만, 이걸 문화 산업화하는 데 소홀했다고 봐요.


리: 후보님은 문화 산업화에 대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삼걸: 제가 그런 경력이 전문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가진 행정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산업이 육성되고 발전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필요한 아이디어나 방향은 전문가들이 낼 거고, 그 방향을 실현하기 위해 규정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돈은 어떤 식으로 밀어줘야 하는가 그런 시스템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리: 이런 여러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문 대통령과의 교감이 있는 건가요? 대통령은 임청각 복원 외에 어느 정도까지 계획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이삼걸: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어느 정도 계획이 세워지면 중앙에 있는 손혜원 의원 같은 분과 만나서 큰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리: 손혜원 의원이 국정 홍보와 관련해서 역할을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또 연이 닿으신 건가요?


이삼걸: 임청각도 같이 갔고, 제 개소식도 오시고. 처음부터 친분이 있던 건 아니고 같이 민주당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된 거죠. 그분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감각이 굉장해요. 임청각을 그냥 옛날식으로 복원하는 게 아니라 역사와 연결해 복원하는 고민이 있더라고요. 전문가들을 모아서, 큰 그림을 그리고 시 차원에서 안을 만들어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해야죠. 임청각 복원을 넘어서 독립운동 성지로 복원해보자는 거죠.


리: 양반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의 도시이기도 하니까요.


이삼걸: 독립운동가가 제일 많이 나왔죠. 기존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과 연결해서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구슬들은 많이 있지만 꿰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구슬을 꿸 촉매제 역할을 할 곳이 시내에 하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게 잘되면 성곡동 관광단지도 민간이 들어오리라 봅니다.



이념을 넘어 지역을 바꾸자


리: 2016년이 첫 선거셨던 거죠? 표 꽤 받지 않으셨어요?


이삼걸: 첫 선거였죠.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40% 이상 받았죠. 시내에서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진 거죠. 차관 출신이 왜 여기 와서 시장을 하려고 하지? 이런.


리: 전임 권영세 시장도 행시 출신 아니에요?


이삼걸: 행시 출신이지만 대구 부시장에 그쳤지 중앙에서 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런 부분을 시민들이 많이 봐주신 거고.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야당이나 무소속에는 표를 잘 안 줘요. 될 만한 곳에 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리: 그런데 저도 TK 출신이지만, TK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물어보면 항상 뽑을 사람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항상 민주당은 안 뽑는다고 하거든요. 좀 변화가 있을까요 이번엔?


이삼걸: 이번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바뀝니다. 물론 아예 생각이 안 바뀌는 사람들도 있어요. 지금 저를 뽑아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민주당으로 지지 성향이 바뀐 건 아니에요. 저는 중도 개혁적인 성향의 사람입니다. 그래도 제가 공직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를 보수라고 봐요.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저에게 빨간색을 입히려고 하죠. 그런데 제가 걸어온 길을 봤을 때 그게 잘 안 되는 거죠. 저를 지지하는 분들은 민주당은 싫을 수 있어도, 저라는 인물이 괜찮다고 보고 있어요. 만약 상대 후보도 인물이 괜찮다면 그쪽으로 쏠리겠지만, 그쪽은 이미 8년 간 능력의 한계가 검증이 되었어요.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이 된 상태고. 새로 자한당 후보가 된 분도 안동 시민들이 봤을 때 경력이 부족하다고 보는 거죠.

출처: 영남일보
아직 다른 지역에 비해 부족한 정당지지율, 이번 선거는 안동 변화의 씨앗이 될 것인가, 아니면 민주당의 시련이 될 것인가?

리: 이번에 전략 공천되셨는데, 다른 민주당 정치인 중에서는 안동으로 나오려는 분이 없었나요?


이삼걸: 있었죠. 있지만, 저는 안동에서 제대로 싸워보려면 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공천이 필요하다고 봤고요. 경선을 하면 경선 후보끼리 상처를 많이 받잖아요. 가뜩이나 민주당이 약한 안동에서 그런 건 좋지 않다고 봤어요.


리: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하고 꽤 좋은 관계였잖아요. 경선을 하더라도 유리했을 텐데요.


이삼걸: 전략 공천의 의미는 단순히 경선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에요. 전략공천의 진정한 의미는 만약에 제가 안동 시장이 되면 말 그대로 전략적으로 지원을 하겠다는 게 내포된 거죠. 그런 약속을 받지 못하면, 제가 앞서 말했듯이 문재인 대통령과 안동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고 질문받았을 때 시민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전략공천이라는 신뢰도가 있으니까 저에게 힘이 실리는 거죠.


리: 사실 후보님이 과거 새누리당 탈당 경력도 있고 해서 여러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부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좋은 관계로 갈 수 있게 된 걸까요?


이삼걸: 제가 과거에 새누리당 타이틀을 달고 국회의원이나 시장 선거에 나온 게 아니었잖아요. 그냥 당원으로서 정세에 맞게 활동을 했던 것인데, 오히려 새누리당이 저를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던 거죠. 제가 지금 민주당에 있다고 배신자, 철새라고 이야기를 하려면, 새누리 쪽에서 호의호식하다가 넘어와서 또 호의호식해야 맞는 경우죠. 그쪽에서 호의호식할 기회도 안 줘놓고 무슨 저에게 배신이라고 이야기를 합니까(웃음). 그렇게 따지자면 현재 권영세 시장이야말로 8년 동안 새누리당 타이틀로 시장 하다가 이번에 자기 후보 안 시켜준다고 무소속으로 튀어 나온 거죠.

출처: 연합뉴스
혼돈의 카오스가 되어가는 안동시장 선거… 과연 결과는?!

리: 하지만 솔직히 감사하고 있잖아요. 그분이 나와서 3파전이 되어서 희망이 생긴건데 (…)


이삼걸: 그건 그렇죠. 제가 지난번에 권영세 후보랑 붙어서 11% 차이로 졌어요. 안동 권 씨인 현역 시장이 표를 그렇게밖에 못 받았다는 건 벌써 힘이 떨어졌었다는 얘기죠. 안동 최대 성씨인데.



정치의 변화가 안동 발전의 동력


리: 지난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가 있었잖아요. 어떻게 보셨어요? 안동에서는 어땠나요?


이삼걸: 안동에서는 많이 모이진 않았어요. 그때는 제가 서울에 자주 갔는데, 촛불 집회도 많이 참석했죠. 당시 촛불 집회는 시대적 흐름이었고, 앞으로 세계적인 사건으로 역사에 남을 거예요. 민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선진국에서도 쉽지 않죠. 민의 힘으로 권력지도를 바꾼 거니까요. 안동에서는 그렇게 강력하게 흐름이 있진 못했어요. 아쉽게도 아직 안동에서는 정치적인 세가 없다는 거죠. 서울처럼 되려면, 민주당이 안동에서도 수권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에서의 힘을 가져야 하고요. 결국 선거는 과반을 만드는 싸움이니까, 지역에서 힘을 가지지 않으면 어렵죠.


리: 후보님이 행시 출신으로, 여러 정부를 봤잖아요. 그러한 흐름에서 문재인 정부는 어떤 정부인 것 같아요?


이삼걸: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민주당보다도 오히려 대통령 개인이 굉장히 점수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길이 인권 변호사로서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서 배려가 몸에 배어 있어요. 그게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고 봐요. 국민들에게도 신뢰를 주고, 그러한 신뢰가 있는 사람이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 정치를 하고 있지만, 보통 정치인으로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은 대화할 때 몇 수 진심을 깎아내리고 보게 됩니다. 사실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진정성이 굉장히 잘 나타나고 있는 사람이라고 봐요. 또 과거 노무현 정부 때의 실패 사례를 잘 복기하고 있다고 봐요. 사실 뭐든지 실패 사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실패를 조목조목 예방을 하고 대비를 하면서 정부를 끌고 가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현재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 세 가지 키워드가 나왔는데 진정성과 신뢰, 그리고 실패의 경험이거든요. 이 키워드를 가지고 본인이 시장이 되면 어떻게 시정을 잘 이끌어나갈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삼걸: 저는 이번에 시장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시민들이 이제는 제 진정성을 많이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판에서 선거를 움직이는 꾼들, 선거꾼들이 있어요. 사실 이 사람들을 활용하지 않고는 선거를 이기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그런데 선거법이 워낙 엄격하니, 선거의 프로들이야 그걸 잘 피해 가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잘못하면 끌려가 버리겠죠. 그래서 저는 아예 처음부터 원칙을 지켜가면서 선거운동을 하고, 그런 점을 지역에서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해요. 또, 제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에 이어 민주당으로 출마를 하잖아요? 그 자체가 안동 사람들이 봤을 때 또 죽으러 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한편으로는 제가 그만큼 시장으로서 안동을 바꾸기 위해 필사적이구나, 이런 진정성을 알아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진정성에 대한 신뢰가 형성된 거죠.


리: 아까 본인이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특히 개혁의 첫걸음은 공무원 사회를 바꾸는 거잖아요.


이삼걸: 공무원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관의 방향을, 마인드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 이후 제가 행동 하나하나부터 공무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면 공무원 사회의 개혁은 어렵지 않으리라 봐요. 사실 제 지지자들이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분들이에요. 그분들이 처음에 인물만 보고 저를 지지하고, 점차 민주당이라는 정당에 대해서도 인식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 자체가 안동에서는 큰 변화에요. 제가 민주당으로 시장에 당선되는 것부터가 사실 안동시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거죠. 개혁은 동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지금도 촛불이라는 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남북 대화의 분위기도 만들어지고,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수사도 가능한 거잖아요. 안동의 발전, 변화의 동력도 예전처럼 자유한국당이라면 막대기만 꼽아도 당선되는 분위기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지역에서 시장을 하려면, 지역 고등학교를 나오고 지역에서 인기 많은 당을 선택해야 해요. 성씨도 중요하죠. 그런데 저는 세 개 다 해당되지 않습니다. 학교도 여기서 나오지 않았고, 당도 지역에서 인기 없는 당이고. 대성씨도 아니죠. 그래도 시민들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번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저를 당선시켜주실 때, 안동시의 개혁과 발전의 동력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유권자들부터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리: 만약 안동 시장으로 일하시다가, 시장직을 떠날 때 안동시민들이 후보자님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이삼걸: 실제로 4년 동안 가시적 업적을 만들려고 하면 무리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물줄기의 방향을 튼 사람이다,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다, 변화의 흐름을 만들고 기차의 레일을 놓은 사람으로만 평가되어도 만족할 것 같습니다. 기차를 레일 위에 올리면, 힘만 가하면 달리기 시작합니다. 레일 위에 기차를 올려놓는 것이 제 시장으로서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싶어요. 좀 여유가 닿으면, 속도를 내서 기차를 달려볼 수도 있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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