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과 모두 같이한 남자 : 충남 공주시장 후보 김정섭 인터뷰

조회수 2018. 5. 31. 17: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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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ㅍㅍㅅㅅ 지방선거 특집: 충남 공주시장 후보 김정섭 인터뷰

리 : 잠은 제대로 주무세요?


김정섭 : 다섯 시간 정도? 저는 좀 충분히 자는 편이에요.


리 : 다섯 시간이 충분하다고요? 지난 선거 때 고생 많이 하셨나보네요.


김정섭 : (...)


리 : 지금 저한테 직접 쓰신 책을 주셨는데,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하세요?


김정섭 : 20대에 국회의원 비서로 들어갔는데 그때 하는 일이 글 쓰는 일이었어요. 인사말, 홍보물, 보도자료 등등 많이 썼죠. 그때는 출마하시는 분들 책도 써줬어요.


노무현 대통령 때는 3년 반 동안 국정기록비서실에서 근무하기도 했어요. 그때 주로 한 일이 대통령 행사에 배석해서 녹음하고 그걸 속기사가 풀어주면 문장으로 만들어 기록물로 남기는 일이었거든요. 그 뒤엔 지역 언론에 기고도 하면서 글을 많이 썼죠.


리 : 노무현 정부 때는 계속 거기에 계셨어요?


김정섭 : 5년 중에 3년 반 정도를 국정기록국장을 했어요. 최고 통치자는 많이 기록해서 많이 남겨야죠. 노무현 대통령이 거기엔 가장 철저한 분이었어요.

출처: 노무현재단
대통령기록물의 역사는 노무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만큼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기록물의 보존과 관리, 유지에 공을 들였다.

리 : 초중고를 다 공주에서 나오신 거예요?


김정섭 : 그렇죠.


리 : 그때보다 인구는 줄었나요?


김정섭 : 많이 줄었죠. 지금 10만 8천 정도인데 우리가 고등학교 다니던 80년대 초반엔 17만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는 도시 집중이 있긴 했지만 지금 같진 않았어요. 단적으로 80년대까지만 해도 국립 부산대학교가 좋은 대학교였어요. 커트라인도 높고. 그랬기 때문에 그래도 지방에 인구가 좀 있었던 거죠. 근데 지금은 그냥 지방대잖아요. 수도권 쏠림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작은 도시로 갈수록 인구가 줄었다고 볼 수 있겠죠.



고려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운동권 생활


리 : 고려대학교 정외과 84학번이시죠? 왜 거길 갔어요?


김정섭 : 학력고사 점수 맞춰서 갔어요. 저는 영문과나 국문과나 사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리 : 돌은 언제부터 던지셨어요?


김정섭 : 돌 던진 적은 없고요. 1984년엔 학원자율화국면이었거든요. 저희가 첫 자율화 세대였어요. 84년부터 학내집회를 경찰 없이 할 수 있었고 학교 당국을 통한 탄압도 줄어들고 학생회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되었어요.


3월에 입학식 하고 4월 초에 바로 대규모 학내 싸움을 해서 교문 박치기 하고 하는 상황이 처음엔 혼란스러웠죠. 하지만 당시 서클 활동이 만개할 때라 대부분 두세 개쯤에 적을 두고 활동을 했어요. 84년 1학기 때는 학회와 서클을 오가다가 2학기 때부터는 소속이 있는 학생운동을 하게 됐는데 ‘노래얼’이라고 노래패였어요.

김정섭 후보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전통 있는 노래패 출신...

리 : 87년까지 쭉 운동하셨어요?


김정섭 : 결과적으론 쭉 한 건데 85년 초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고려대학교가 사립이어서 등록금이 비싸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어려워지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등록을 어렵게 하고도 휴학을 했어요. 군대를 갔다 오는 게 좋겠다 싶어서 휴학을 하고 집에 내려가서 그해 6월에 신검을 받았어요. 근데 제2국민역이 된 거예요. 바로 민방위대에 편성이 되어서 40세까지 민방위 교육받고 비상소집에 응하는 거였어요.


리 : 6개월이었나요?


김정섭 : 아니요. 바로 민방위대에 편성된 거예요. 그래서 군대 3년 이라는 완충기를 갖지 못하고 다시 86년도에 복학을 했죠. 그런데 그러면 3학년 과정이 된 거잖아요. 그래서 3학년에 맞는 학생운동의 역할을 부여받았죠.


리 : 학생운동은 어땠어요?


김정섭 : 학생운동의 학내 공간은 열려 있었지만 항상 위험했죠. 청계천이나 구로동에 시위 하러 가면 이미 전경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쫙 깔려 있고 그랬거든요. 거기서 유인물 나눠주거나 구호 외치다 잡히면 바로 현행범이 되는 거예요. 잘못하면 구속도 되고 그러죠.


리 : 잡히셨어요?


김정섭 : 많이 잡히진 않았고, 훈방 조치 두어 번 받고 풀려났어요. 학교 밖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래요. 대신 학내 일을 많이 맡았어요. 86년도엔 서클연합회 집행부 역할을 했고 87년도엔 학생회 총무부장을 하고 88년에 바로 정치권으로 갔죠.


리 : 학생운동을 하면서 제일 기억나는 순간은 어떤 거였어요?


김정섭 : 제일 남는 건 6월항쟁 때죠. 86년도에 건대 시위로 학생 운동권들의 다수가 감옥에 가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87년을 맞은 거예요. 당시 전두환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4.13 호헌 조치를 할 때 학생운동의 변화가 이루어졌죠. 선도투쟁이 아니라 대중운동으로 노선 변화를 한 거예요.


총학생회 구성할 때부터 학내에서 학생대중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대중적이고 점진적인 방향을 채택했어요. 그러다보니까 1987년에는 우리가 과격한 시위를 안 했어요. 그러다보니 왜 파출소 깨부수지 않고 민정당사 점거하지 않느냐란 일부의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막상 6월 항쟁 때는 수천수만의 학생들이 같이 하게 된 거죠. 그때 고려대학교 대운동장에서 6월 항쟁 출정식을 하는 데 만 명이 모였어요.


리 : 우와.


김정섭 :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라면 그때 출정식 하는 날 각 단과대에서 어깨 걸고 수 백 명 씩 와서 만 명이 모인 것.

출처: 고대신문
1987년 고려대 대운동장에서의 학생집회 모습

리 : 학생운동 끝나고 나서 바로 정당을 선택하신거죠?


김정섭 : 87년에 직선제 개헌을 하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명이 붙었죠. 당시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에요. 그때 김대중을 통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리 : 백기완도 인기가 많지 않았나요?


김정섭 : 거긴 일부였죠. 김대중이 500만이라 그러면 백기완은 100표 이하. 왜냐하면 당선될 수 있는 후보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당선될 수 있는 후보 중에 누가 가장 시대적인 흐름을 받아 안을 수 있냐 해서 김대중을 밀었어요. 그런데 3등으로 떨어지고 나서 88년 1월이 되니까 김대중 정계은퇴 얘기 나오고 욕을 엄청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택한 방법은 운동권들이 평민당으로 대거 들어간 거예요. 문동환, 이해찬, 임채정, 이상수 등등 해서 백 명이 들어갔어요. 저도 그때 들어간 거죠. 그래서 뜻하지 않게 정치생활을 일찍 시작한 거죠. 학교 졸업하기도 전이었어요. 가장 막내였죠.


리 :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요?


김정섭 : 우리는 그걸 민주화운동의 연장이라고 본 거예요. 그 전에 우리가 6월 항쟁을 만들고 대통령 선거까지 치르고 왔잖아요. 그 열기로 88년 4월에 13대 총선을 치렀어요. 거기서 평민당이 제1 야당으로 일어선 거죠. 민정당이 1당이지만 소수가 되고 평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합치면 여소야대가 되는 상황이었죠.

88년 2월,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라는 이름으로 재야 운동권 다수가 제도권 정당인 평화민주당에 집단 입당, 정치계에 큰 파문을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평화민주당으로 가다


리 : 평화민주당에선 어떤 일을 하셨어요?


김정섭 : 당시 김대중 총재가 당원들을 잘 길러내야 집권을 할 수 있겠다, 생각을 해서 당원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 일을 맡은 것이 나중에 국회의장이 된 임채정 선배였어요. 임채정 선배가 중앙정치연수원장을 하고 그 밑에 유시춘 부원장과 저같이 학생운동 했던 사람들이 들어가서 사무당직을 구성했어요.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길게는 3박4일 동안 전국 당원들을 교육시켰어요. 그걸 2년 반 정도 했어요.


리 : 신기하네요.


김정섭 : 진보적인 정치학자나 대중 강사들이 다 거쳐 갔죠. 3박 4일 하면 제일 마지막 강의는 김대중 총재님 강의였어요.


리 : 김대중 총재는 그때부터 말을 잘했나요?


김정섭 : 그 전부터 잘하셨죠. 제가 김대중 연설문집 출간 작업도 도와드린 적 있는데 그 분이 연설한 걸 글로 옮겨보면 굉장히 정련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리 : 미리 준비했단 거예요?


김정섭 : 엄청난 준비를 한 거죠.


리 :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셨는데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김정섭 : 노 대통령은 그렇게 판에 짜인 연설을 안 하셨죠. 노 대통령은 그날 전달할 메시지에 집중했어요. 논리 개발을 많이 하고. 우리가 흔히 그런 얘기를 해요. 노 대통령이 말이 많다. 그게 사실 단점인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빠져들 수밖에 없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설득을 해버리려고 하셨기 때문에. 뒤에 할 거 미루고 자기 할 얘기 다 하시니까 길어지고 어떤 경우는 글로 봤을 때는 감동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죠.


리 : 노 대통령에 비해 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말을 잘 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떠세요?


김정섭 : 논리적이죠. 정치를 오래 하시면서 큰 분이 아니기 때문에 현장성은 조금 떨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아주 정련되고 논리적인 스타일이에요.


리 : 사실 연설 자체가 재미는 없어요.


김정섭 : 연설이 꼭 재미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요. 뜻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걸 단박에 설득시키는 건 문재인 스타일은 아니죠.

출처: 한국일보
전설적인 연설가였던 김대중은 수십만 청중을 폭소와 울분으로 쥐락펴락했다. 1969년 효창운동장에서 있었던 전설적인 3선 개헌 반대 연설

리 : 평민당에 들어가서 92년 대선을 치르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은 어떠세요?


김정섭 : 평민당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말단 당직자 생활을 90년 초까지 하고 90년 말에 김원기 의원실로 들어갔어요. 그 분 밑에서 2년인가 일하다 92년 대선이 온 거예요. 그때는 지는 선거라는 걸 알고 했어요. 3당 합당으로 해서 호남이 완전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최대한 캠페인을 했죠.


그때 김원기 의원이 당 최고위원으로서 홍보 책임자였었어요. 저도 제가 모시던 의원님이니까 홍보기획단 간사 역할을 했죠. 이후엔 김대중 총재는 대선 패배하고 정계은퇴 선언하고 영국으로 가셨죠. 그 빈자리를 이기택, 김상현, 김원기 세 사람이 채우다가 결국 김대중 총재가 95년도에 돌아와 새로 당을 창당하셨죠.


리 : 결국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김정섭 : 정계은퇴 하실 때도 이게 정계를 완전 은퇴한 건 아니고 일시적인 후퇴라고 저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정계복귀하면서 새로운 당을 창당해서 기존 당을 깨고 이리로 들어오라고 하셨죠. 그런데 그럼 그 전에 김대중 총재가 없을 동안 당을 지키고 야당을 해 온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그래서 저희는 새 집을 짓는 것엔 반대했어요. 그것 때문에 분당이 됐죠.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원혜영, 유인태 같은 분들은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와 다르게 민주당 내에 인사들과 시민운동권 인사들과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구성했어요. 목표는 지역주의 반대와 보스정치 탈피였는데 96년 총선에 대거 낙선하게 되면서 결국 수평적 권력교체를 기치로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와 통합하게 되었죠.

출처: 노무현재단
통추 그룹의 좌장이었고 열린우리당의 초대 당 의장이었던 김원기는 이해득실보다 정치적 신념을 따른 노무현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린다.

리 : 97년 대선 때도 본부에서 일하셨어요?


김정섭 : 그랬죠. 대선 본부의 상황실장이었죠.


리 :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김정섭 : 반신반의였어요. 저쪽은 돈과 관변조직, 언론 등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이회창이 김대중의 대항마로 뽑혀 나오는 과정에서 저쪽 세력이 갈라졌거든요. 결국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이 여당 후보인 이회창을 돕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집권그룹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이인제가 나오니까 사람들이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를 미나보다 해서 표가 쏠린 거예요.


리 : 그래도 감개무량 했겠어요.


김정섭 : 처음 이룬 정권교체니까. 세상 뒤집어졌죠.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밤 꼬박 새우고. 저희는 쟤네가 투표부정, 개표부정 할까봐 모든 투표소에 당원 파견 시켜서 별도 집계를 하게 했어요.


리 : 그리고 청와대로 들어가셨나요?


김정섭 : 아니요, 우리는 집권세력 내 비주류였어요. 저 같은 경우는 통추로 해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세력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중앙당에서 4년 있었어요. 기획조정위원회 총무국에 갔어요. 집권 정당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별 걸 다 했어요. 회의 체계 조정하고 물품 입찰하고 납품받는 체계 바로잡고 했죠. 그러다 나중에 새천년민주당으로 재창당할 때 창당기획단에서 일하다가 2000년에 기획조정국으로 옮겨서 정국 및 선거 기획 업무를 했죠.


리 : 정신이 없으셨겠네요.


김정섭 :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할 때 중간 세력을 모아 정치의 흐름을 바꾸려고 했었거든요. 그렇게 창당해서 집권 5년 중 절반 정도가 흐르니까 이제 차기 주자들의 물밑다툼이 치열해졌죠. 이인제도 다시 받아들이고 노무현이 해양수산부장관하면서 커가고 있었고 김근태, 김중권, 한화갑, 한광옥 같은 사람들이 군웅으로 떠오르던 때였어요.


리 : 바로 노무현 쪽에 붙으신 건가요?


김정섭 : 아니요, 통추그룹이지만 이른바 캠프에 속하진 않았어요. 저는 그때 당의 기획 업무를 맡고 있었어요. 당시 국가전략연구소를 만들어서 장기적인 집권플랜을 짰는데 가장 중요한 게 어떻게 후보를 뽑을 것인가였어요. 그래서 나온 게 호주식 선호투표를 통한 국민경선이었죠. 그 전까진 전국의 대의원을 만 명 정도 뽑아서 후보를 뽑는 체육관 선거였죠.


우리는 미국식으로 붐을 일으키기 위해 일반국민을 선거인단에 50%를 참여시키고 시도를 다 돌아서 오는 지역순회경선을 하고 선호투표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국민경선 드라마가 펼쳐졌던 게 제일 작은 데부터 시작하다보니까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 됐어요. 어쨌든 참신한 기획이라 국민관심이 굉장히 높아졌죠.

출처: 오마이뉴스
2002년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경선은 국민참여경선과 선호투표제를 결합시켜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성공을 거뒀다.

리 : 광주 경선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데요. 거기 김대중 총재의 뜻이 반영되었다는 말도 있는데 그랬나요?


김정섭 :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시에 내가 청와대 1부속실에 있었는데 그때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해의 최고 관심사는 본인의 자기 건강이었어요. 그 다음이 월드컵. 그리고 대선이었어요. 당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시기는 했지만 누구도 밀어주진 않았어요. 하지만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을 압도하면서 치고 나오니까 좋아하시긴 하셨어요.


리 : 왜요?


김정섭 : 3월 경선 할 때 노무현이 이회창을 이기는 여론조사가 나왔었어요. 그 시점엔 대선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을 때였는데 청와대에서 보기에 이회창을 이기는 후보가 나오니까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죠. 그렇게 노무현이 후보가 되고 나니까 우리는 선거 다 끝난 줄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청와대에서 바로 노무현 후보 확정 후 불러다가 환대하고 앞으로 노무현 후보 측에 나하고 똑같은 자료를 주라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말씀하시고.



노무현 청와대의 마지막 부대변인


리 :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되실 거라 생각하셨나요?


김정섭 : 사실 조금 위험할 거라고 봤어요. 솔직히 정몽준과의 단일화 결과도 확신을 못했고. 그때 청와대 일부도 흔들리긴 했어요. 하지만 설령 지더라도 노무현으로 져야지 남의 당 후보를 밀 수는 없었죠. 당일 날 출근해서 여러 가지 상황도 체크해보고 했는데 단일화 파기되고 나서 움직임들이 있었어요. 오후에 젊은 사람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가고. 이런 징후들을 보고 아슬아슬하게 이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리 : 97, 2002, 2017 세 번의 대선 중에 어느 게 제일 기뻤어요?


김정섭 : 97년이 더 컸죠. 첫 승리였으니까. 그 다음이 2002년. 정부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당시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 같은 자발적 국민참여, 국민 경선 드라마 같은 것을 통해 이겼다고 생각을 하지만 정부 안에 있던 저 같은 사람들은 국민의정부 5년의 성과를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죠.


리: 노무현 정부 초기에 청와대에 들어가셨죠?


김정섭 : 저는 계속 있었어요. 누가 대통령이 되든 간에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저희는 그때 퇴임 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죠. 퇴임 준비는 크게 두 갈래로 했어요. 하나는 대통령 기록물을 잘 정리해서 가지고 가실 것과 정부에 남길 걸 구별하는 거였고 또 하나는 대통령이 퇴임하시고 나서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어요. 당시 휴면 상태에 있던 아태재단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해서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을 만드는 작업을 했죠. 그리고 인수위원회에 들어가 연결고리 역할을 했는데 전임 대통령이 남긴 자료를 후임 대통령에게 바로 인계해서 국정 운영에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법 규정이 있어요.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대통령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

리 :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엔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김정섭 : 김 대통령은 굵직한 국정과제에 집중하셨어요. 그리고 중간에 장관 수석 등 중간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권한을 나눠 가지면서 책임을 지는 구조였는데 노 대통령은 좀 달랐어요. 꼼꼼하기도 하고 굉장히 많은 정보와 지식 습득을 하셨어요. 일단 노 대통령 기질이 그랬고 나이가 젊었으니까요.


김 대통령은 이 일은 누구에게 맡기면 잘 할 거야 하는 스타일이었다면 노 대통령은 이 일은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놔야 잘 돌아갈 거다 하는 거였죠. 관료를 잘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료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민간 전문가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래서 국정자문위원회도 많이 만드셨죠.


리 : 일종의 숙의민주주의네요.


김정섭 : 그렇죠. 그러다보니 관료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행정 시스템들을 혁신해야 했어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던 거니까.

2002년 12월 23일,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청와대에서 만난 두 사람.

리 : 참여정부의 마지막은 그렇게 좋지 못했었는데요. 정치적 실패라는 얘기도 나오고 했었는데요.


김정섭 : 저는 그건 외부에서 씌운 프레임이라고 봐요. 결과적으로 정동영 후보를 뽑아서 이명박 후보에게 졌다, 그 과정을 보니까 대통령이 당을 믿지 못하고 컨트롤 하지 못하고 나중엔 정무수석도 없앴잖아요. 이렇게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다는 프레임이 있는 거죠. 그건 노무현 대통령으로선 다음 정권을 만드는 것이 대통령의 책임은 아니라고 보는 거죠. 그건 집권 여당의 책임인 거죠. 노 대통령은 당을 일일이 컨트롤 하지 않았어요. 그걸 안 하니까 말이 많이 나왔죠. 김근태, 정동영 같은 분을 경쟁하게 하면서도 손학규 같은 경우엔 우리 당의 후보가 되어선 안 된다고 확신하셨죠.


리 : 김근태와 정동영 중에 누구를 더 선호하셨나요?


김정섭 : 잘 알 수 없죠. 김근태 의원에 대한 신뢰가 있었는데 기질이 잘 안 맞는 게 있었죠. 김근태는 대한민국의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은 운동권의 로열패밀리고 노 대통령은 그에 비하면 변방이고 비주류고 마이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기질 차이가 좀 있었죠.


리 : 노 대통령 퇴임한 다음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김정섭 : 2007년엔 제가 청와대 부대변인으로 일했습니다. 근데 대변인 업무는 그날그날의 일이거든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08년부터 엄청난 탄압을 해서 노무현 관련된 정책과 사람은 다 잘랐어요. 그러다 2009년 그 사태를 맞게 된 거죠. 저는 일종의 실업 상태였지만 어떤 책임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뭘 잘못해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었을까. 우리가 잘못해서 국민들이 고생한다는 성찰적 자세를 갖고 있었죠. 다만 대통령께서 봉하 마을 가서 정치 관여는 안 하시지만 여전히 기지 역할을 하셨으니까 수시로 내려갔죠. 참여 정부의 공과 과를 냉철하게 복기해서 이후 지방선거와 총선에 대비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리 : 2009년엔 어떠셨어요?


김정섭 : 노 대통령께서는 스스로 소신공양을 하신 거죠. 저는 나이에 비해 길게 정치를 한 사람으로서 본인의 몸을 던져서 정치의 흐름을 바꿔내서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것에 대해 노 대통령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제가 그 분의 희생 위에서 작은 일이나마 하고 있단 생각을 하고 있죠.



선출직 생각이 없었던 그가 공주 시장에 출마한 이유


리 : 오면서 놀랐던 게 공약 중에 여성을 위한 게 따로 있던데, 총선도 아니고 지방선거에서 굳이 여성 코너를 따로 만든 이유는 뭔가요?


김정섭 : 솔직히 이 정책들은 저보다는 여기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만든 거에요. 공주라는 지역 사회가 아직도 보수성과 봉건성이 있어요. 선배가 후배를 억누르고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고 기득권층이 서민과 약자를 억누르고 토박이가 외지인을 핍박하는 구조가 있는데 그게 지난 4년간 더 강화되었어요. 지금 시장이 그런 것의 상징이거든요. 기득권, 남성성, 재력 이런 것으로 4년을 지배하다보니까 여성의 지위는 더 낮아졌어요.


리 : 지역에서 여성의 지위라는 것은 어떤 걸까요? 서울하고 다른 게 있나요?


김정섭 : 아무래도 여성의 권리신장이나 정치적 참여 같은 것이 작은 단위로 갈수록 훨씬 어렵죠. 단적으로 장인장모상을 서울은 똑같이 다니잖아요. 시골은 안 다녀요. 덜 가요. 그 정도로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못 내고 여성 지도자들도 잘 안 나와요. 그런 것들이 지역의 활력을 많이 떨어뜨리죠.

출처: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충남 지역의 여성 대표성은 전국 평균에 상당히 못 미치는 상황이다.

리 : 그런데 총선에 나오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2014년부터 지역으로 출마하신 거예요?


김정섭 : 저는 원래 선출직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참모나 기획 업무를 오래 해왔기 때문에. 그런데 안희정 선배가 2010년 선거에서 도지사가 된 뒤에 같이 고향에서 일하자고 해서 2011년 초에 내려오게 된 거죠. 그리고서 2012년에 박수현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거예요. 박수현 의원이 굉장히 지역에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보니까 시장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여기는 야당 도시에요. 그 야당이 근데 자민련, 자유선진당이에요. 그래서 그 전까지 민주당에서 공주시장 나온 사람 중에 10% 득표 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원장을 하고 있을 때 보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독배를 마시겠더라구요. 선거 나오라고 할 거 같아서. 그래서 제가 아예 스스로 일찍이 결심하고 선거에 나가겠다 해서 준비했죠.


리 : 질 걸 알고 나갔다는 건데.


김정섭 : 아니요. 저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 했어요. 왜냐면 안희정도 이겼고 박수현도 이겼잖아요. 그건 도전적인 좋은 인물들이 민심에 맞춰서 활동을 한 결과거든요. 저도 떨어지긴 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 지역에서 박근혜 대 문재인 표차가 –14%였어요. 근데 제가 2년 후에 시장 선거에서 –11%로 졌어요. 저도 지역에 오래 있지 않고 새로 내려온 고향 사람이지만 제대로 준비해서 하면 될 수 있다고 본 거죠.



점점 낙후되는 공주, 어떻게 살릴 것인가


리 : 공주는 왜 점점 낙후되고 있을까요?


김정섭 : 대전, 세종 같은 대도시 옆에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 대도시들이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주변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도시 옆에 있는 도시들은 위성도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1932년에 도청을 대전에 빼앗긴 뒤 충남도청이 대전에 오랫동안 있었어요. 안희정 지사 때 비로소 충남 안으로 도청이 왔죠. 그런데 만약 도청이 공주나 충남 안에 있었다면 자생력을 가지고 더 클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쉽죠.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시와 지리적으로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안습의 위치 (...)

리 :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앞으로도 계속 세종시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나요?


김정섭 : 세종, 대전, 공주가 역할분담을 해야죠. 공주를 세종이나 대전과 같이 국책으로 키우는 곳과 똑같이 바라보는 건 인식의 잘못이라고 봐요. 공주는 그 전에 정치적, 경제적, 행정적인 위상이 컸기 때문에 더 박탈감을 느끼고 아쉬워하는데 그 추세를 막을 수는 없거든요. 이 속에서 역할분담을 해나가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리 : 그 역할은 어떤 건가요?


김정섭 : 공주는 역사도시잖아요. 백제는 물론 조선시대에 330년 동안 충청 감영이 있으면서 역사의 지층이 켜켜이 쌓인 도시거든요. 그건 신생도시인 다른 신도시엔 없는 공주만의 특색이죠. 거기에 공주의 발전 전략이 있다고 봐요. 또 세종시가 다 소화하지 못하는 기관을 유치할 수도 있고요.


리 : 보니까 여기는 대형마트도 없는 것 같더라구요. 시민들의 편의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김정섭 : 대형마트는 그동안 규제 때문에 새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마트가 있느냐 여부가 소비행태를 많이 좌우하는데 사실 그렇다고 지금 공산품을 구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아요. 그리고 규제 문제도 있지만 사실 대형마트가 들어오기엔 인구 규모가 작다고 사업자들이 판단할 수도 있지요.


리 : 이것도 해소하기엔 힘든 면이 있네요.


김정섭 : 이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여기서 15분밖에 안 걸리는 세종시 끝 쪽에 이마트가 있어요. 공주랑 바로 붙어 있는 곳이거든요. 결국 대형마트나 쇼핑몰을 세우더라도 세종시 쪽 인구를 같이 고려하는 전략을 취해야 수익성이 나요. 그렇지 않고는 지금 경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대형마트 때문에 다른 골목상권 소매상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어요.


리 : 지역 경제가 대학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지방대학교가 위기잖아요. 이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김정섭 : 지금 여기 대학이 세 개가 있어요. 공주대, 공주교대, 한국영상대. 원래 영상대가 공주에 있었는데 세종시가 출범할 때 그쪽으로 넘어 갔어요. 그렇지만 생활권은 이 쪽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 개 대학으로 보는 거죠. 대학이 있어서 젊은 인구가 유지가 되고 다른 유학생들도 오는 거 아니에요? 대학의 연구력이나 어떤 일을 맡아나갈 수 있는 역량도 되기 때문에 이걸 잘 활용해야죠.


그 전에는 제대로 대학 상권을 형성할 준비가 덜 되어있었어요. 예를 들어 일 년에 수 천 명이 공주로 유학을 온다고 하면 그들을 잘 맞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는데 원룸이나 음식가격 같은 걸 담합을 해서 막 올려놓고 이러면 서울이나 여기나 차이가 없잖아요. 그러면 대학과 지역이 상생이 안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 행정이 해야 되는 역할이 많다고 생각해요.

출처: MBC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

리 : 인구 유출을 막기 힘든 가장 큰 이유가 일자리잖아요.


김정섭 : 여기 대학 세 개가 있는데 그 학생들이 여기서 벤처창업 같은 걸 할 수 있잖아요. 역사문화적인 자원을 활용해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콘텐츠를 창출해낼 수 있는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게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리 : 공주역을 가보니까 아주 엉망이던데 거기 상권을 만든단 얘기도 있던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김정섭 : KTX가 공주 남쪽에서 정차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어요. 좋은 점은 서천, 부여, 논산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균형 발전엔 맞죠. 그런데 이용객이 더 많이 늘어나야 되는데 이걸 위해 도로를 놓는다든가 대중교통을 연결시킨다든가 하는 일이 필요하죠. 또 하나는 기왕에 그 지역에 KTX역이 생겼으니까 거길 다양하게 개발을 하면 그 지역 주민에게도 도움이 되죠.


리 : 가능할까요?


김정섭 :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에요. 다른 지역도 KTX가 생기면 쇼핑몰을 같이 놓잖아요.


리 : 그런데 그건 접근성이 좋을 때 가능하지 않나요. 제 고향이 경주인데 신경주역은 여기보다 교통여건이 낫긴 해도 쇼핑몰이 있진 않거든요. 그냥 밖으로 빨리 나가는 게 중요하지.


김정섭 : 지금 거기에 쇼핑몰이 들어오지가 않죠. 사람이 없는데 어떤 기업에서 거기에 만들겠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KTX 이용객을 더 늘리는 일과 함께 주변에 맞춤한 개발계획을 찾아서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공주역... 이게 다 ㅇㅅ역 때문이다 ㅠㅠ

리 : 현실타당성을 많이 따지시는 것 같은데 공약은 100개나 적어 놓으셨네요.


김정섭 : 그런 걸 고민하다보니까 여러 방향을 제시해 놓은 거죠. 근데 솔직히 KTX 역세권은 공약을 못했어요. 그냥 말로만 던져 놓고. 이용객을 늘리고 역세권에 적절한 개발을 하는 걸로 방향만 제시했지 구체적으로 거길 뭘 놓겠다는 아이디어는 제시 못한 거예요.


리 : 공약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김정섭 : 최소한 4년 안에 삽이라도 뜰 수 있는 공약을 해야죠.


리 : 저는 공약을 믿지 않고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도 아니라서. 근데 되게 세밀하게 공약을 잡아 놓으셨던데요?


김정섭 : 할 수 있거든요. 여태까지 못한 거지.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적어 놨어요. 그걸 통해 시민들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리 : 가장 큰 주안점이 시민의 행복인가요?


김정섭 : 그렇죠. 모든 것이 다 거기에 수렴되어야죠.


리 : 근데 이제까지 왜 그걸 못했을까요?


김정섭 : 아까 말했던 지도자의 문제죠. 선출직 지도자의 비전과 철학이 부족했어요.


리 : 근데 지방자치단체장은 여기저기서 압박이 심하지 않나요?


김정섭 : 그걸 적절하게 잘 조정하면서 할 수 있는데 왜 못했냐면 4년 간 뭘 해야겠다는 구상이 없고 그걸 시민과 소통하는 절차도 없었어요. 그걸 통해 사람들이 내가 요구했던 것이 정치를 통해 바꿔지는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 더 정이 가고 선순환이 되는데 내 얘기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거꾸로 가면 나 이곳에 애정 없다 그러고 빠져나가는 거죠.

김정섭 후보의 말대로 지난 지방선거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효능감이 최저로 떨어진 선거였다. 이번 지방선거는 달라질 수 있을까?



지방정치에서는 깨끗함이 중요하다


리 : 본인은 어떤 대통령과 어떤 점이 제일 비슷했던 것 같아요?


김정섭 : 비교하기는 좀 그렇네요. 김대중 대통령은 워낙 아버지같은 분이고.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일했는데 아까 말했지만 3년 반 동안은 매일 대통령과 배석해서 워딩을 수백 페이지나 생산하는 일을 하고 나중엔 대변인 업무를 했기 때문에 대단히 밀착도가 높았죠. 문재인 대통령은 비서실장으로 계실 때 1년 동안 매일 아침 회의를 같이 하고 제가 부대변인으로서 혼자 발제하는 역할을 했어요. 문재인 대통령은 굉장히 정제된 사람이었고 저에게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하는 건 많지 않았지만 항상 협력구조 속에서 일을 했죠. 굳이 비교할 것까진 없지만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나라를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에 대해 늘 함께 호흡하면서 그렇게 왔기 때문에 그분이 일하는 방법이나 자세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배웠죠.


리 : 이번에 당선이 되신다고 해도 언젠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실 텐데 공주시민들이 어떤 시장으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김정섭 : 바르고 깨끗하게 한 사람. 그리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 지방정치에서는 깨끗함이 되게 중요해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각종 부패 때문에 시민들이 상처를 많이 받아요. 그리고 약속을 쉽게 하지 않고 그 약속을 꼭 지키는 게 중요하죠.


리 : 지금까지의 공주와 김정섭의 공주는 어떻게 다를 거라 생각하세요?


김정섭 : 공주 시민들이 시민으로서 자신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갖게 될 거예요. 시청이 멀리 있지 않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내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알 수 있게 되고, 다른 지역에 가서 공주에선 이런 것도 한다면서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리 : 아까 말씀하신 공약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듣는 창구가 중요할 것 같은데 그런 건 어떻게 마련하실 생각이세요?


김정섭 : 저는 100인의 원탁회의를 만든다고 공약을 했어요. 시민자문회의죠. 이 분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얘기를 들으려고 해요. 그 100인 시정 자문회의와 더불어 시민방송을 만들려고 해요. 시민 방송은 시장의 말도 전달하고 시의회도 중계하고 어느 마을에서 문제가 생기면 마이크 빌려드리기도 하고. 여기 크기가 서울의 1.4배이기 때문에 소통하기가 힘들어요. 한쪽에서 일어난 일을 다른 데선 모르거든요. 그런데 이 시민의 방송을 통해 공론의 장을 열 수 있을 겁니다. 공주의 무궁무진한 유.무형 자원을 골고루 드러내고 활용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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