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를 나와 고향을 지킨 농민운동가, 진보정당 군의원이 민주당 군수로 전략공천 받기까지: 경남 하동군수 후보 이홍곤 인터뷰

조회수 2018. 5. 30. 10: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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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지방선거 특집: 경남 하동군수 후보 이홍곤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지겨운 질문이겠지만 가장 답변하기 편한 질문을 드릴게요. 어쩌다 하동군수로 출마하셨어요?


이홍곤(경남 하동군수 후보): 원래 민주당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는데, 추천을 받았어요. 전략공천인 셈이죠. 예전에는 통합진보당 소속이었는데, 정당 해산당하고 나선 소속이 없었죠.


리: 이전에 군의원을 두 차례 하셨던데요.


이홍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군의원을 했어요 민주노동당으로 선거에서 당선되었고요.


리: 군소정당 소속으로 지역에서 정치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이홍곤: 저는 대학 졸업하고 1994년부터 이 지역에 있었어요. 농민회에서 활동했고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서울대에 가기까지


리: 초중고는 어디서 나오셨어요?


이홍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고향인 하동 악양에서 나왔고요. 고등학교는 진주 동명고등학교 나왔어요. 김경수 도지사 후보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입니다.


리: 동명고등학교는 그때부터 공부를 잘했나요?


이홍곤: 2회 선배부터 평준화되었는데, 성과가 좀 컸죠.

경남 지역의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몰리는 진주 동명고등학교.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연예인 김정훈이 바로 동명고 출신이다.

리: 고등학교를 진주로 유학을 간 셈이네요? 공부를 잘하셨나 봐요. 


이홍곤: 가정형편이 많이 어려웠어요. 4남 1녀 중에 둘째인데,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등학교에 갔죠. 고등학교만 보내주시면, 대학교는 국비로 다닐 수 있는 국립해양대 같은 곳을 가겠다고요.


리: 자식들 중에 교육을 몰빵 받으신 거네요?


이홍곤: 그렇습니다. 가족 입장에서 봤을 때는 죄인이죠(웃음). 아버지 입장에서 형은 장남이니까 고등학교를 보내고, 너는 중학교만 나와라, 이랬는데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죠. 그래서 전액 국비고 기숙사 지원이 되는 국립해양대를 가야겠다, 이런 다짐을 했어요. 대학 가면서 또 집안에 부담을 주면 안 되니까요. 근데 학력고사 성적이 잘 나왔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형이 교통사고가 크게 났어요. 다리가 차에 깔렸죠. 14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보상금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형이 저에게 너는 공부 잘하니까 등록금은 보상금으로 대주겠다. 네가 원래 가고 싶었던 농대를 가라. 이렇게 얘기를 하셔서 서울대 농대를 가게 된 겁니다.



전방입소 반대 투쟁을 거쳐 운동의 길로 접어들다


리: 공부를 많이 잘하셨네요. 형님 돈으로 대학에 갔는데 데모를 시작한 겁니까(…)


이홍곤: 굉장히 갈등을 많이 했죠. 대학에 가니까 제가 생각했던 대학이 아닌 거예요. 원래는 해양대 가서 마도로스가 되자, 돈을 벌자, 이러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다가 기회가 주어져서 농대에 간 건데 막상 동기들을 보니까 80% 이상이 서울대 간판 보고 와서 재수 준비하거나 편입 준비하거나 그러더라고요. 저는 나름대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고, 가족에게 진 빚이 있어서 제대로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또 학교에서 학생운동을 만나게 되면서 기존에 품었던 생각 간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에는 가족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자는 생각과 다른 한편에는 모순된 사회현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에요. 저는 학생운동에서 이야기하듯이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농촌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만 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심훈의 상록수처럼 농촌계몽 같은 뜻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운동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전방입소 반대 투쟁이었죠. 2학년 때 전방입소 가는 과정에서 서울대에서 2명이 분신했어요.

출처: 김세진이재호기념사업회
대학생들에게 강제로 병영 훈련을 시키던 시기, 전방입소 거부 투쟁 도중 사망한 김세진과 이재호의 기억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에서 반미·반전 운동이 부상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리: 어쩌다가 분신을 하게 된 거죠? 


이홍곤: 당시에 학생운동권에서는 광주 사태의 배후가 미국이라고 봤죠. 또 농촌 입장에서는 농산물 수입개방이나 WTO 같은 문제가 막 밀려드는 단계였어요. 우리 농촌의 희생은 미국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 때였죠. 그래서 “양키용병 전방입소 반대” 이런 슬로건이 나온 건데. 제가 전방입소 갔다가 나오면서, 아 내가 지금까지 했던 생각이 순진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자퇴를 선택했어요(웃음).


리: 운동도 좋고 공부도 좋은데 왜 자퇴를(…)


이홍곤: 엄청난 양심의 갈등이 있었는데, 농민들을 위해서 내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실제로 구조적 모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형제들을 희생시키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고민도 있고. 그 과정 속에서 2학년을 채 못 마치고 자퇴서를 던지고. 주변에서는 그냥 휴학하라고 했는데, 휴학 기간이 다 지나가서 자퇴서를 냈어요. 근데 처리가 휴학으로 되더라고요(웃음). 나름대로 심각하게 휴학이냐 자퇴냐 고민했는데… 1986년에 군대를 다녀와서, 1989년에 복학하니까 이제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죠. 복학할 때쯤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면서, 여기와 관련을 맺으면서 농민들이 이 사회구조적 모순을 스스로 힘을 모아서 풀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리: 전농이 생기게 된 과정은 어떤 거죠?


이홍곤: 솟값 파동이 제일 컸죠. 전두환 정권 당시 전두환 동생 전경환을 위시한 측근들이 주도해서 미국산, 호주산 육우를 도입했죠. 그러다 보니 한웃값이 폭락했어요. 당시 소가 400~500만 원 정도 했는데 절반 이하로 떨어졌어요. 그 수입 육우를 농가에 보급하는 가운데 문제가 생겼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자치농민회 등등 농민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뭉친 게 전농입니다.

출처: 경향신문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5공 시절 새마을운동본부장으로 이른바 ‘새마을 비리’를 주도했다. 외국 소 수입권을 새마을운동본부가 독점하면서 호주산 소를 대거 들여오는 바람에 이른바 ‘소 파동’이 일어나 많은 농민이 고통받았다.

리: 후보님이 그 출범 과정에 참여하신 건가요? 


이홍곤: 저는 당시 학생이었는데, 복학한 다음 수대협(수원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에서 농학연대 담당을 맡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농활 사업을 한 거죠.


리: 그때 농활은 어땠어요? 저희 때는 뭐 일도 잘 안 시키고 그랬는데.


이홍곤: 선배들 시대보단 덜하긴 했어도 많이 치열했죠. 어떤 지역에서는 부딪힘도 많았죠. 받아주지도 않으니까 텐트 쳐놓고 농활을 하고. 얘네는 데모하는 애들이다, 학생들이 와서 농민들을 선동한다, 이러면서 숙소를 안 주는 거죠. 이런 이미지 때문에 농활을 막기도 하고. 그런데 개별 농민들은 또 학생들이 와서 일손 돕기를 원하잖아요. 그래서 텐트 치고 하고.


리: 그렇게 1년 지나고 나서는 전농 멤버가 된 건가요?


이홍곤: 농대 내에서 농활 사업 담당하다가, 수대협 차원에서 2년 동안 일하다가, 그러다가 1992년도에 졸업을 했고요. 그리고 평택에 내려가서 전농 경기도연맹에서 일했죠.


리: 졸업하고 취업할 생각은 전혀 없었군요(…)


이홍곤: 그랬죠(…) 제가 군대 가기 전에 갈등이 많았어요. 내가 가는 길이 탄탄대로가 아닌데, 하는 고민. 선택을 한거죠.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솟값 파동’으로 인해 농업 개방에 대한 농민 운동 단체들의 위기의식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농촌을 바꾸기 위해 농민 운동에 뛰어들다


리: 서울대 85학번이면 운동권 중에서도 나중에 중앙정치도 많이 가고, 재미 많이 본 세대잖아요?


이홍곤: 저는 정치 생각은 꿈에도 안 했어요. 정치에 대한 고민은 처음 지방선거 출마한 2006년. 그때 당에서 지역마다 무조건 후보를 한 명씩 내자는 방침이 있었죠. 당시에 농민운동은 결국에는 정치를 바꿔야 농촌이 바뀐다고 봤고. 그래서 전농 차원에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했죠. 당에서 후보를 내라고 하니까, 별로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보면서도 출마를 했어요.


리: 지금이야 직업 정치인이 된 거지만, 그때는 답이 없는 운동이었잖아요. 왜 그렇게 그걸 하고 싶었어요?


이홍곤: 대학 가게 되면서 형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대학에 가라’고 했던 것처럼 중학교 때부터 그런 결심이 있었어요. 나름대로 농촌의 계몽, 교육을 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농대를 갔는데, 대학에 가니까 그냥 계몽, 교육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이런 농업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소명이 있어서 전농에서 일하게 된 거고. 제가 지난 선거에 출마 안 하면서 4년을 쉬었는데, 돌이켜보면 참 바보 같이 살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 길을 택하면서 잃은 부분이 많았거든요. 가족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고.


리: 1992년에 평택에서 처음 하던 건 뭐였어요?


이홍곤: 처음에 경기도연맹 연대사업부장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죠. 그 주변에서 조건이 안 좋은 논밭, 휴경지 같은 곳을 임차를 받아서 농사를 지었죠. 상근자 하면서 당시에 30만 원을 활동비로 받았고, 생활은 농사를 지으면서 꾸려갔죠. 그렇게 2년 반 정도 일했는데, 고향 집안 사정이 안 좋아졌어요. 아버지가 심장판막증이 있으셨고, 동생이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가 있었는데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제가 집으로 가자, 어차피 농사짓던 거 고향 가서 하자고 생각했죠.


리: 직접 농사를 지으니까 어땠어요?


이홍곤: 사실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래도 쌀이 수매제잖아요. 일정 정도 수익이 되는 상황이었죠. 농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으니까, 먹고 살자고 하는 거니까요.


리: 상당히 편하게 하신 것 같네요.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화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이홍곤: 평택에 저뿐 아니라 농민운동을 하러 들어간 청년들이 좀 있었는데 서로 농사지으면서 도와주기도 하고. 근데 논이 정말 안 좋아서, 기계가 못 들어가는 논도 있고 그랬어요. 그런 점에서 고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농민 스스로 농민의 삶을 바꾸는 정치


리: 고향에 내려와서는 어떻던가요?


이홍곤: 일단 생계 문제가 걸리죠. 농사를 지어서 제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 2년간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지었죠. 그러다 보니 규모도 늘리고 소득도 안정돼서, 결혼도 하게 되고. 내려와서 한 2년 정도는 지역 농민회가 무너진 상황이었어요. 이전과 다르게 계모임 수준이 된 거죠. 그러다가 경남도연맹하고 이야기가 돼서, 옥종면 농민회랑 저랑 연결이 되어서 하동군 농민회를 꾸리게 되었죠. 그때 제가 사무국장 역할을 했고요.


리: 농민회에선 어떤 일을 하신 거예요?


이홍곤: 당시에 수입개방으로 농업이 무너지던 때였으니까 수입개방 반대투쟁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농민회 면지회가 악양, 북천, 적량까지 확대가 되고 그랬죠. 농민운동도 결국 사람의 문제인데, 교육을 하고 훈련을 하면 쉬울 수도 있겠지만 계속 사업 개발을 해야 하고, 또 정부에 의해 깨지는 과정도 있고 쉽지는 않았죠. 그런데 역으로 봤을 때,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한다, 뭉쳐야 한다 이런 분위기도 있었고요.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사업을 하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특작 연구도 하고. 화목 보일러 제작해서 보급도 하고 이런 자구책을 많이 찾고 있죠.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농업 개방이 본격화되면서 1990년대 내내 농민운동은 수입 개방 반대 운동에 나섰다.

리: 후보님은 내려와서 2~3년 만에 상황이 괜찮아졌다고 했는데 전체적인 지역 농민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이홍곤: 뭐 바로 생존의 문제가 닥치고 그러진 않고요. 수매제가 있으니까. 그런데 자녀 교육 문제라든가,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 같은 문제가 있어요. 군의원이 되고 나서, 이런 문제를 정치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고 개방에 밀리는데, 여기서 농민들을 지원할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요. 제가 의회에서 한 성과 중에 하나가,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 지원 조례가 있어요. 또 ‘단 한번 농약’이라고, 벼농사할 때 농약을 여러 차례 치지 않고 모 상태에서 한번만 처리하면 앞으로 안 쳐도 되는 농약을 군에서 2010년부터 지원하도록 했죠.


리: 2006년에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하셨잖아요. 그때 왜 민주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으로 나가신 건가요?


이홍곤: 당시 전농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라고 조직적 결의를 했거든요. 지금도 민주당하고 진보정당의 차이가 있잖아요. 남북 관계라든가, 노동자 농민의 문제를 전면에 내거는 것과. 큰 틀에서 하나씩 풀어가는 그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리: 그런데 이번에 어찌 민주당에 전략공천까지 받았어요?


이홍곤: 원래 지역에서 민주당이 어려운 곳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재선까지 했고. 대중들을 만나는 전문성이 인정받았다고 생각해요.


리: 처음엔 선거에 어떻게 나가게 되었던 건가요?


이홍곤: 원래는 농민운동에만 뜻이 있었지 정치에 대한 생각은 안 했어요. 전농의 결정에 의해 당에 가입했고, 농업 문제가 정치로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또 당에서 선거 출마 방침이 나오니 출마했던 거죠. 우리나라 농업의 문제가 결국엔 정치적인 힘으로 농업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정치를 누가 할 거냐, 우리가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었어요.



나홀로 야당 지방의원, 8년간의 고군분투


리: 군의원 돼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이홍곤: 조례 제정하고 약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감시의 기능을 제일 잘 했다고 봐야겠죠. 행정에 대한 감시. 실제로 지방 의회 분위기가, 의회에서 결정하고 사무 감사하고 승인하는 과정을 보면 거의 거수기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야당임에도 공무원들에게 인기가 좋았어요. 합리적으로 문제 제기하고, 대안을 잘 찾으니까.


리: 군의원이 몇 명이었어요?


이홍곤: 총 10명이었죠. 야당으로서 제가 혼자였고. 야당이 민주노동당 혼자. 나머지 9명은 다 새누리당 쪽이고(웃음).


리: 놀랍네요 정말. 계속 그렇게 이어져 온 거네요 이 동네는.


이홍곤: 보통 거의 지역 유지, 토박이죠. 새누리당 말뚝만 꽂아도 당선되는. 한 명이 민주당으로 당선되서 들어왔다가 중간에 당적을 바꿨어요. 9:1이다 보니 맨날 싸울 수도 없고,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서 제대로 잡는 거죠.

대략 이런 모양새(…) 무소속이라 해도 결국 새누리당 경력이 있는 분들이다.

리: 솔직히 군의원 하면 경제적으로 이득 볼 게 많아요? 


이홍곤: 관여할 수 있죠. 공사에 붙어서 뭘 한다든지. 1,000만 원짜리 공사한다면 커미션을 받는다거나. 그런 거래가 일반화되어 있는 측면이 있어요. 공사 입찰할 때 87% 수준에서 입찰을 하거든요. 1,000만 원짜리 발주하면 보통 870만 원 정도에 낙찰이 됩니다. 근데 지자체가 2,000만 원까지 수의계약이 가능해요. 2,000만 원짜리를 하면, 10%까지는 커미션으로 상납이 되는 거죠, 의원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많진 않지만, 작정하고 덤비면 다 할 수 있죠. 또 비리가 있는 게 하도급. 10억짜리를 하도급을 주는데 누구누구 줘라, 이런 식으로 의원이 관여하는 거죠. 가장 흔한 경우에요. 8년 군의원하면서 그런 문제를 많이 보면서도, 제대로 확인이 안 되잖아요. 양심선언이 있다거나 하지 않으면 드러나기 어려운 거죠. 그래도 대충 눈치는 채죠.


리: 2010년에도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하신 거예요? 두 번째 출마하니까 좀 어떠셨어요?


이홍곤: 갈수록 한계를 많이 느끼죠. 여전히 9명 다 저쪽이고. 의원들도, 제가 처음 군의원 된 게 5대 의회였는데 5대 때는 분위기라도 좋았어요. 6대 들어와서는 분위기도 삭막해졌죠. 제 지역구에서 한 명이 더 당선되면서, 저를 밟고 올라가려고 견제가 치열해진 거예요. 그래서 좀 재미가 없었어요.


리: 중간에 통합진보당 사태가 터졌을 때는 어땠어요?


이홍곤: 참담했죠. 적어도 대중 정당인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것도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조작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제가 볼 때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죠. 어떤 명분으로든 이해가 안 되잖아요. 당에 대한 전체적인 회의가 많이 들었죠. 이렇게 무너지게 둘 건 또 뭐냐… 의회 내에서도 한계를 느끼다가 당도 이런 상황이 되니 3선에 출마를 안 하고 포기했죠. 무소속으로도 출마할 수 있었지만, 정치인으로 연명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간 거죠. 그러고 경남도연맹에서 일하다가 작년에 하동군 농민회 회장을 했어요.



농민 운동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다


리: 사실 농산물 수입 개방이라는 게, 결국 열릴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여기에 대해 농민들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이홍곤: 수입 개방을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농민회가 봤을 때 식량을 외국에 의존하면 우리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거죠. 1979~1980년에 이미 그런 문제를 겪었습니다. 냉해가 들고 병이 번져서 흉년이 드니까 쌀이 모자라잖아요. 그래서 미국산 쌀을 수입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쌀을 5년 치 계약해야 한다고 나왔어요. 그렇게 수입하다 보니 1980년대 중반에 쌀이 남아돈 거죠. 식량이라는 건, 한번 무너지면 정말 되돌리기 어려운 거예요. 미국에서 농산물 개방을 하라고 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의 농업 생산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거다, 이렇게 봅니다.


리: 식량을 시장에 맡기기보다는, 국가가 더 개입하고 세밀하게 컨트롤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홍곤: 정부가 농업의 기본적인 것들은 책임져야 한다는 거예요. 문재인 정부가 남북 대화 분위기를 만들고, 교류와 협력을 하고 있잖아요. 지금 북한이 2014년부터 식량 자급을 하고 있어요. 근데 막상 내용을 보면 감자, 고구마, 옥수수가 주 내용이고, 곡물이 아닙니다. 결국엔 남한의 쌀, 곡물 중심의 식량 자급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남북을 묶어서 생각하면 쌀이 남아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식량은 한국이 당당할 수 있는 자주적인 기반의 밑거름이 된다고 봐요.

출처: The Business
한국의 식량 안보 문제에 대한 우려는 점차 강해지고 있다.

리: 이번 선거에 전략 공천되었는데, 그동안 지역에 민주당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건가요? 


이홍곤: 여긴 30년 지방자치 역사 중에서 민주당이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선거구에요. 사실 제대로 선거를 준비한 적도 없었죠. 전체 판을 바꾸고, 승리의 확신을 줄 수 있는 후보가 없었으니까요.


리: 출마 제안 들어왔을 때 많이 고민하셨을 텐데요. 정치를 떠나기도 했고 민주당 소속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고민으로 출마하게 되신 건가요?


이홍곤: 결국 제가 살아온 과정은 농업으로 출발했지만, 세상을 바꿔서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지금 세상이 바뀌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 좋은 기회에 지역에 사람이 없다고 하고. 그럼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게 제가 살아온 과정이었고.


리: 사실 농민운동 쪽에서는 엘리트였다고 할 수 있지만 군수란 자리는 좀 다르잖아요. 그게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이홍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적응이 빠릅니다(웃음). 혹자는 의원은 잘하지만 행정하고는 다르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저는 기본적인 원칙과 기준을 잘 지킨다면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행정의 역할이라는 게, 원칙을 가지고 전망 속에서 계획과 비전을 제시하는 거잖아요. 그 과정에서 전체의 의견을 잘 수렴하고 조율해야 하고. 내가 지도자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이런 게 아니잖아요.



돈을 부어도 해결되지 않는 하동군의 문제들


리: 수렴과 조율을 말씀하셨는데 지금까지의 하동군은 그게 잘 안 되었던 건가요? 동네가 주민도 적고 지역 조직도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이홍곤: 지금 상황은 심각하죠. 논의 과정 자체가 없죠. 전임 군수가 4년 동안 그 부분을 완전히 뭉개버렸어요. 이전 군수들은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갈사만 산업단지 문제만 보더라도 문제가 심각하죠. 지금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고, 부채가 많으니까 굉장히 심각하다고 말하죠. 근데 중요한 건 이 사업이 가능하느냐 마느냐를 판단하는 거예요.


리: 하동군 1년 예산이 얼마나 되죠?


이홍곤: 5,000억 원정도입니다. 보조 사업이 많습니다. 세수만 놓고 보면 500억. 교부금이 한 1,000억. 합쳐서 1,500억 정도를 가용할 예산이라고 보면 되는데, 보조사업이라는 건 농업 보조나 공모사업인 거죠. 공모사업이면 국비 50%, 지방비 30%, 군비 20%로 구성되거든요. 만약 1,000억으로 국비를 받는다고 하면 5,000억짜리 사업을 만들 수 있는 거죠. 보조 사업 성격은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농업 구조를 개선한다든지, 농민들에 대한 보조가 있고. 농촌 지역 대중교통 보조가 있고. 여러 보조가 있는데 이런 게 합쳐진 거죠.


리: 돈을 박으면 장기적으로 효과가 나와야 되는데. 이 정도로 돈을 투입해도 별로 성과가 없다는 느낌인데요.


이홍곤: 그런 부분이 많죠. 지역에서 예산을 가지고 주민들을 현혹하죠. 우린 예산 많이 따온다고. 근데 그게 얼마나 내실 있고 알찬 예산인가를 따져야 하는데, 의회나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죠. 예산을 따서 보통 토목공사비로 많이 쓰이죠. 일반적으로 대도시는 토목공사 할 만한 곳이 많지 않잖아요. 근데 여긴 수해 나면 수해복구, 하천정비 이런 공사가 생각보다 많아요. 그런데 실제로 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에요.



병든 하동군, 새 판을 짤 군수


리: 김경수 경남 도지사 후보와는 어떤 인연인가요?


이홍곤: 네, 고등학교와 대학이 같습니다. 그냥 멀리서 서로 응원하는 정도? 기본적으로 당이 달랐으니까 지척에서 일했던 것은 아니었지요.


리: 앞으로 경상남도랑 같이 할 사업이 많이 있을까요?


이홍곤: 하늘이 도운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갈사만 산업단지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동군의 가장 큰 이슈죠. 더 이상 군단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거든요. 도나 정부 차원에서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김경수 경남 도지사 후보와 함께 이 문제를 국가적 사안으로 부상시키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갈사산단 성공의 대전제는 조선업 호황이었어요. 그러나 2008년 글로벌 위기 이후 이미 해양플랜드 조선업도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이제 고민해야 되는 것은 조선업 호황을 근거로 진행되었던 갈사산단을 다른 방향의 산업 단지로 전환하는 게 가능하냐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지금은 우리 군 주민들과의 협의 속에서 산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출처: 중앙일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붙어 있는 하동과 광양. 섬진강에서 나는 재첩국이 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리: 여기 위치가 애매하잖아요. 경상도인데 재첩국 먹고. 전라남도랑 풀어야 하는 그런 문제도 있나요? 


이홍곤: 바로 광양시하고 강 하나 사이에 있잖아요? 그래서 제철 산업하고 연계해서 같이 할 것들이 있죠. 저쪽은 이미 포화상태잖아요. 그래서 이 지역과 묶어서 시너지를 만들 수 있겠죠. 이 지역 특성을 살려서 마그네슘, 망간, 니켈이나 티타늄이라든지 신소재 부품소재 가공 산업을 하는 산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어요. 5월 21일 저 그리고 경남도지사 후보, 전남도지사 후보와 이와 관련한 협약식을 맺었어요. 이 자리에서 두 도지사 후보와 하동 갈사만에 희유금속을 활용한 신소재부품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이를 여수·광양의 소재부품단지와 잇는 소재부품 광역클러스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지요.

출처: 뉴스프리존
5월 21일 경남-전남 상생발전 정책협약식 모습.

리: 사실 군수가 되더라도, 군의원들이 다 저쪽 사람들이면 일하기 좀 어렵지 않을까요? 


이홍곤: 기본적으로 판도가 많이 변화할 거라고 보고요. 사실 의원하고 단체장을 비교했을 때는 단체장의 권한이 절대적입니다. 예산 편성권은 물론이고.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반대할 수는 있겠지만, 합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면 명분이 없겠죠.


리: 당선이 되시면 하동군을 어떻게 바꿀 거라 보세요?


이홍곤: 갈사만 빚에 눌린 게 있으니 빚 정리부터 해야죠. 전망을 세워서 해결해야 하는 작업이 기본이 될 거고요. 현 군수가 4년간 공무원사회를 완전히 병들게 만들었어요. 막 불법적인 부분을 공무원에게 강요하고. 군수가 민원인들 앞에서 공무원한테 입에 담아 전하기 어려운 정도의 욕설을 하고, 하대하고. 군수가 공무원들을 독려하고 손잡아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거의 학대한 거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거든요. 불법, 탈법으로 제 욕심을 차리려고 하는 거죠.

출처: 경남신문
군수의 공무원 괴롭히기 사례

리: 곡성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지방선거 가면 보통 개발공약 많이 얘기하는데 이번 선거는 교육, 환경 얘기 많이 하거든요. 근데 여긴 교육 보육 문제 해결하기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이홍곤: 실제로 젊은 사람이 동네에 살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교육 문제가 핵심일 수 있죠. 교육 문제는 많이 어렵습니다. 우선적으로는 여기 있는 사람에게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봐요. 환경도 바꾸고, 혜택도 주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하동군에 남는 게 혜택이라고 할 정도로 지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리: 사실 여기 인구가 적어서 돈을 막 써도 되지 않나요? 얼마 전에 최문순 강원도지사 만났는데 아이 낳을 때마다 매달 50만 원씩 지원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말이 되냐고 하니까 우린 애들이 적어서 상관없다고.


이홍곤: 실제로 그렇죠. 그냥 돈을 주면 반발이 있을 수 있지만, 학교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겠죠.



스스로를 단련시켰던 바보 같은 선택들


리: 그동안 인생에 있어서 유리할만한 선택을 안 했잖아요. 서울대 인센티브도 활용 많이 안 하셨고, 취업도 안 하셨고, 당도 약한 정당에서 활동하고. 그러다가 이제서야 메이저로 가는 환경이 된 건데. 그동안의 선택을 돌아봤을 때 이건 잘 했다 이건 아니었다 하는 게 있나요.


이홍곤: 그게 항상 상대적인데요. 4년 쉬면서 참 바보 같이 살았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랬던 게 지금 와서는 나를 단련시킨 거구나, 그런 생각도 들죠.


리: 쉬는 4년간 행복하셨어요?


이홍곤: 쉰다기보단 나름대로 뭔가를 많이 해서. 만약 농사만 했으면 부자가 되었을 텐데(웃음).


리: 재산 신고액이 얼마에요?


이홍곤: 1억 8,000이었나. 사실 저는 빚이 1억 5,000이고, 각시가 벌어서 총합이 이 돈인데(웃음) 사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빚 정리를 좀 했는데, 올해 선거에 나와버렸네요.


리: 공천 과정에서 민주당 내에서 반발은 좀 없었어요? 아무리 이 동네 오래 했어도 딴 정당 출신인데.


이홍곤: 네, 다른 후보들이 원래 이야기하셨던 게, 이홍곤이 나오면 양보한다 그랬거든요. 물론 실현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셨겠지만(웃음). 막상 공천되니까 얘기는 많지만 정리가 잘된 거 같습니다.


리: 나중에 자서전을 내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리하고 싶으세요?


이홍곤: 아직 미완성인데…(웃음) 주어진 삶에 충실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선택을 바보스럽게, 미련하게 했던 부분이 있는데. 그렇지만 지금 다시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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