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운동으로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도의원, 파란 하늘의 청주를 꿈꾸다

조회수 2018. 4. 26. 17: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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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장 예비후보 이광희 인터뷰

리(ㅍㅍㅅㅅ 이승환 대표, 이하 리): 학교 다닐 땐 어떤 학생이었죠?


이광희(청주시장 예비후보, 이하 이): 그렇게 번듯한 환경에서 자란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반항기가 좀 있었어요. 하루종일 영등포 시장가를 배회하면서 탁구장 가고 그랬죠.

지금은 이렇게 멋찐 으른이 되셨다

리: 어쩌다 충청도하고 연을 맺게 된 거죠? 


이: 충북대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중고생 생활을 보내다가 운이 좋았는지 시험을 잘 봤어요.


리: 시험 대박이 났군요?


이: 이게 계기가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야간고 다니던 학생들이 주로 정독도서관 가서 놀았어요. 다른 도서관은 건물 안에 들어가면 못 나왔는데, 정독도서관은 운동장이 있었어요. 하여튼 거기에서 우연히 어떤 남자를 만났어요. 담뱃불이 필요하다고 접근하셨는데, 나중에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까 광주 때문에 도망 다니는 신세라고 하시더라고요.

공부하기에도 좋지만 놀기에는 더 좋은 정독도서관의 풍경

리: 그때는 광주항쟁에 대해 전혀 모르던 상황이었고요? 


이: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해 5월에 광주가 터졌죠. 그해 11월쯤 됐을 땐가 만난 사람이에요. 그 전까지만 해도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제 인생과 크게 상관이 있다고는 생각 안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대학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거예요.


리: 그래서 공부를?


이: 일단 진짜로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죠. 하필이면 그분 만나고서 며칠 후에 우리 1년 선배들이 시험을 봤어요. 그러면 그 1년 후에 제가 시험을 보는 거지 않습니까. 그 날부터 일기를 쓰면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어요. 365일 전, 364일 전, 363일 전…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서 20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 도서관 가서 진짜로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야간고등학교 졸업 마지막 시험 때 제가 1등 했어요.


리: 야간 학교의 기적!


이: 그때 야간고등학교에서는 1명이라도 더 대학을 보내고 싶어 했거든요. 선생님이 너 이거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저에게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집이 불도 나고, 형편이 안 좋았어요. 아버지가 우리 애 바람 넣지 말라고 선생님을 설득하겠다며 학교로 가셨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누가 등록금 내고 학교 가라고 그랬냐고, 충북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는 충북대학교인데 거기로 가서 장학금을 받아서 가면 될 것 아니냐 한 거예요. 그 말에 아버지가 넘어가셨어요. 충북대 발표 날 때 합격자 명단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장학금 명단부터 봤는데 있더라고요. 그렇게 진학했죠.

납득 ㅇㅋ

촌놈, 얼떨결에 NL의 거두가 되다


리: 충청도 내려오니까 삶이 어떻게 바뀌던가요?


이: 서울하고는 전혀 딴판이었죠. 아무리 군부독재 시절이었다고는 해도 서울은 굉장히 화려하고 번잡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청주는 너무 건전하더라고. 거리도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물 좋고 이런 시골 동네. 그래서 그렇게 청주에서 대학을 다닌 게 제 운명을 바꿨죠.


리: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뛰어들게 되었습니까?


이: 제가 우연한 기회에 충격을 받고 휴학계를 빨리 냈어요. 농활을 갔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농업과 농민에 대한 환상이 바로 깨진 거예요. 이런 공부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리: 환상이 어떻게 깨졌다는 거죠?


이: 농촌, 농업에 대한 목가적인 환상이 완전히 깨졌죠. 척박하고 어렵기 그지없는 험한 농업 현장을 목격한 거예요. 내가 본 게 과연 사실인가… 그때 학교에 휴학계를 집어 던지고 다시 들어갔죠. 그런데 그 동네로 다시 들어가니까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왔었나 봐요, 그것 때문에 얼떨결에 영장을 받았죠. 그 영장이 무슨 영장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군대에 갔습니다.


리: 그러니까 강제징집되신 건가요?


이: 비슷한 거였어요. 우리 때에는 군대 간다고 하면 1년을 기다려서 갔거든요. 베이비붐 세대였으니까. 그런데 저는 신체검사 받으러 간 날 현장에서 영장을 받았어요. 당장 다음 주에 오라고… 하여튼 그렇게 군대 다녀와 가지고, 86년도에 충북대에 돌아갔어요. 그런데 그때 충북대가 데모 안 하는 걸로 유명했던 것 같아요. 이화여대 총학생회에서 고추하고 가위를 학교로 보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저거 하면 안 될까 생각했어요.


리: 충북대가 시위 같은 걸 잘 안 했나요?


이: 거의 안 했어요. 운동권이라고 하는 친구들도 몇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하면 저것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싶더라고요. 마침 운동권 쪽에서 저보고 부총학생회장으로 나가자는 거예요. 저는 주류 운동권이 아니라 딱히 나갈 이유는 없었는데,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저 친구들이 굉장히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뭔가 도와주고 싶었고… 그렇게 부회장을 했어요. 그게 5월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달에 6월 항쟁이 터진 거예요.


리: 와, 1987년 일이었군요?


이: 네, 1987년도요. 그래서 얼떨결에 1987년 6월항쟁을 부총학생회장 신분에서 하게 됐죠. 당시 학생운동의 한가운데 끼게 되었죠.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386이 된 거예요.


리: 충청도 지역에서도 탄압이 굉장히 강했나요?


이: 네, 여기도 심했죠. 전국이 다 비슷했죠.


리: 학생들은 얼마나 많이 모였나요?


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죠. 청주시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까. 처음엔 파업이나 휴업이나 이런 건 안 하고, 순순히 시험을 치렀을 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6월 10일에 몇몇 대학들, 여대들과 충북대가 조용히 시험을 치렀다는 방송이 KBS 9시 뉴스에 나간 거예요. 그거에 열 받은 사람이 아주 많았죠. 저희도 수치스럽다 보니 후배들이 동을 떴는데, 삽시간에 2천 명이 모인 거예요. 다 같이 충북대에 모여서 정문으로 진격을 했죠.

청주도 이 도시 중 하나였다

리: 그걸 진두지휘하셨나요? 


이: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나 이런 사람들이 진두지휘한 건 아니었어요. 원래 시위를 하면 좀 괜히 부딪히고 빠지고 하는 선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많으니까 엉뚱한 곳으로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경찰들도 당황하고, 학생운동 했던 사람들도 당황했어요. 이미 시위대의 대부분은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했고요. 사람들이 막 그러더라고요. ‘아무나 지휘 좀 해봐’, ‘구호라도 외쳐봐’ 하면서…


리: 그러니까 총학생회가 지휘한 게 아니라, 총학도 얼떨결에 휩쓸린 거군요-_-?


이: 네, 얼떨결에 한 거예요. 일단 버스 위로 올려보내거나 차 위로 올려서 선동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저는 한 번도 시위 주도를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학생운동을 도와주려고 부총학생회장이 된 거였으니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작했는데 “여러분!” 하고 외치기만 해도 잘하네~ 박수 치고, 구호 몇 번 외치면 “오, 잘 하는구만~” 해주시니까 힘이 들어가서, 그때부터 가두투쟁을 하게 됐죠. 1987년도에는 온통 시위만 했던 것 같아요.


리: 1987년이 끝나고 졸업시즌이 다가왔을 것 같은데.


이: 저희는 다음 해까지 총학생회를 했어요.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게 되고, 졸업하면서는 자연스럽게 민청련, 지역에 있는 민주청년연합에 투신을 하게 됐죠. 임기가 끝날 때쯤 되니까 거의 지도자급이 되어 버렸죠. 얼떨결에 보니까 제가 NL 쪽의 거두가 돼 있더라고요. 그 당시엔 그게 그렇게 큰일인지 몰랐어요. 그게 제 운명을 또 다시 한번 좌우할 줄은 몰랐죠. 취직도 하지 않고 상근 활동을 시작했으니까요.


리: 그렇게 하다가 시민운동으로 옮겨가셨죠?


이: 네. 그러다 한청협, 전국의 청년단체협의회도 만들어지면서 94년을 기점으로 재야운동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죠. 2000년대를 앞두고 우리 내부에서도 방향을 좀 전환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논의가 나왔어요. 나라가 민주화되어 가잖아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빨리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한청협은 해산해요. 그리고 일부 해산하지 않은 분들이 경기 남부였나, 동부였나… 그분들이 쭉 갔고, 저희는 해산했죠. 정치권으로 갈 사람은 그때 다 갔어요.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강기정 이런 사람들이죠.


리: 그 사람들이 386 엘리트죠. 그런데 왜 같이 안 가셨어요? 제의가 안 들어왔습니까?


이: 지방에 있으니 그런 제의도 안 들어왔죠.



눈물의 선거 패배: 그러나 노무현 당선의 기틀을 닦고


리: 그래서 시의원 출마하셨어요? 어디서?


이: 네, 2002년도에 청주에서. 나이 마흔에.


리: 어땠습니까, 첫 선거는?


이: 떨어졌죠.


리: 무소속으로 출마하신 건가요, 그럼?


이: 그 당시에는 정당 공천이라는 거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후보로 출마를 했죠. 하필이면 그때가 월드컵 때였어요. 낙선하면 정말 외롭습니다. 아무도 안 오고, 집사람이랑 둘이서 현수막 떼고 책상정리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8강이다 4강이다 난리가 났는데… 눈물로 지켜봤죠. 저에게 2002년 월드컵의 4강이란…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납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도 그의 눈에는 안 들어왔으니…

리: ㅠㅠ 


이: 뭐, 정치권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에는 또 노무현이 있었습니다. 2002년도 6월에 낙선하고, 제가 충북의 개혁당을 집행위원장이었어요. 창당멤버였죠.


리: 누구랑 친하세요? 멤버 중에.


이: 개혁당은 유시민 선배가 요구해서 유기홍 선배 등등이 참여했어요. 저는 초기 모임 7명 중 한 명이었어요. 간사로 시작해서 전국 대표까지 올라간 사람은 단체에 잘 없었어요. 제가 지방에서 청년단체 간사로 시작해서 전국 대표로 올라갔고, 나중에는 민화협 청년위원장까지 했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라고, 남북교류 하는 민간단체였어요. 북쪽에도 민화협이 따로 있었죠. 이런 단체의 청년위원장을 했으니까, 전국적으로는 제가 좀 유명한 편이었어요. 그랬던 제가 기초의원에 나와서 떨어진 거죠…


리: 왜 떨어졌을까요?


이: 그때 붙었던 사람 중 한 명은 세 번 출마했던 사람이고, 한 명은 두 번 출마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까지 셋이 붙었거든요. 힘들더라고요.


리: 역시 정치는 일단 버텨야 한다, 이런 건가요.


이: 버티기도 있고, 당시에는 돈도 많이 얽혀 있지 않았습니까? 지역표에서는 중요한 요소였죠. 유지가 녹록지 않았어요. 또 제가 2002년도에 간과했던 게, 여기서 초중고를 나오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리: 그건 당연히 큰 요소죠.


이: 네, 지금도 큽니다. 학연이나 지연이 아예 없는 거니까. 하지만 전 여기서 35년 이상을 살았어요. 대학도 다녔고, 애들도 다 여기서 컸고요. 그런데 35년을 살아도 선거만 나오면 서울 사람 취급을 받는 거예요.


리: 억울해도 어쩔 수 없죠, 뭐.


이: 네, 뭐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데… 억울합니다. 왜 그러냐면, 다른 분들은 고등학교까지만 여기에서 나와서 서울로 대학을 갔어요. 취업도 다 서울에서 하고, 중앙에서 일하다가 내려온 겁니다. 그것도 퇴임해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고서 이제 고향을 위해 봉사하겠다 하시는데, 전 좀 아닌 것 같아요. 봉사는 다른 방식으로도 하실 수 있고, 이 동네를 30년 지켜 오면서 풀뿌리 운동을 했던 제게 기회를 달라고 말씀드리는데 이게 대중적으로 먹히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울분이 쌓인 후보의 얼굴은 흡사 이 짤과도 비슷했다 하더라(…)

리: 지금까지 했던 말 중에 가장 응어리가 가득한 말씀이신데; 그래서 그 개혁당 할 때는 어땠나요. 


이: 당시에는 노사모가 따로 있었고, 노사모만으로는 안 되니까 개혁당을 꾸린 거예요. 개혁당은 당시에 해산했던 재야 운동가들을 다시 모으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노사모는 사람들 개개인이 모여 만든 조직이기 때문에 소위 ‘선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앞으로 큰 선거는 다가오고, 노무현은 당내에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당을 만들어서 기반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또 여차하면 노무현을 보호하기 위해 개혁당으로 올 수도 있다는 전제도 있었어요.


리: 근데 개혁당에도 반노 쪽이 없지는 않았잖아요? 사실.


이: 초창기 개혁당은 대선을 준비하는 조직이었어요. 철저하게 노무현을 당선시키는 게 중심 목표였던 당이죠. 그래서 실제로 지역에서는 당시의 민주당보다도 선거운동을 제대로 진행했죠.


리: 노무현은 어차피 PK 쪽에만 있지 않았나요?


이: 네, 그랬죠. 그래서 노무현 선거운동을 하러 저희가 당에 나가면, 중앙에서 내려보낸 선거차 이런 게 저기 먼 골목에 가서 서 있고 그랬어요. 운전 기사님은 연락이 안 되고… 그러면 우리가 차 키라도 달라고, 우리가 선거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죠.


리: 중앙당보다 개혁당이 훨씬 더 열악했을 것 같긴 해요. 자금도 없고 사람도 얼마 없었을 텐데. 그래도 민주당은 전국정당이라서 선거 경험 등이 풍부하지 않았나요?


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중앙에서 당시 공천자금 등을 중앙당에 내려보내면 위원장이 그거 가지고 없어지기도 하던 시절이에요. 2010년 들어온 후에도 대선 때 하는 거 보면 밖에서 말이 막 나와요. 아오, 저 모양으로 되겠냐. 위원장이 자기 국회의원 되는 것에만 관심 있고 대통령은 떨어져도 된다는 거냐 이런 식으로 답답해해요. 근데 옛날 생각 해보면, 그런 얘기 나오는 것 자체가 많이 바뀐 거예요. 그 전에는 진짜 열악했어요. 저는 1987년도 대통령 선거할 때부터 지역 내의 선거란 선거는 거의 다 참여해봐서 알아요. 거의 30년 됐죠.


리: 기사에는 하나도 안 나오는데,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하셨네요?


이: 1987년 대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선거를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어요. 충북에서요. 그래서 저 스스로도 선거는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죠.



제일 유명한 도의원이자 (자칭) 선거의 제왕


리: 아까부터 계속 풀뿌리를 강조하시는데, 사실 힘든 일이지 않습니까. 자기 지역의 시장이 누구인지는 다 알지만, 시장이 어떤 정책을 펼치지는지는 인식하기 어려운 편이 아닙니까?


이: 네, 그렇죠. 그럼에도 지금까지 저와 대화하시면서 느끼셨겠습니다만, 제 스스로 자평하기에 저는 역대 도의원 중 가장 유명한 도의원이에요. 도의원이 되기 전 마을공동체 사업을 했는데, 두꺼비 살리기 운동이라고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네요.


리: 뭐가 그렇게 유명한가요?


이: 저희 동네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어요. 두꺼비는 원래 물에서 사는 놈이 아니에요. 산에서 살다가 산란하러 물로 내려온 뒤 알을 낳고 얼른 떠나죠. 그러면 물에서 올챙이 시절을 보내고 다리가 나오면 다시 산으로 올라가요. 근데 하필이면 배수로 때문에 한꺼번에 수만 마리가 올라가는 게 목격된 거예요.


리: 한꺼번에 수만 마리가요?


이: 네. 큰 호수에 배수로가 있는데, 거기로 올라가려다 보니까 수만 마리가 엉켜서 올라가는 게 발견된 거죠. 그러다 보니 전국 방송에서 두꺼비 올라가는 모습을 찍으러 내려와요. 어쩌다 보니 족보 있는 두꺼비 동네가 된 거죠. 그게 시초가 된 거예요. 제가 2002년도에 낙선하고 마을 신문을 만들었는데, 그게 기반이 되어 우리 동네에서는 지금까지도 발행되면서 전국에서 최장기로 발행되는 마을 신문이 되었어요. 공동체 운동 기반을 닦는 수단으로 활용했죠.


리: 대체 어떤 활동을 하셨기에…


이: 두꺼비 살리기 운동을 진행했어요. 전국적인 환경운동과 관련되어서 당시 천성산 지율스님은 도룡뇽 지키기 운동과 같이 진행되었어요. 그렇게 대표적인 운동으로 우리 동네의 두꺼비 살리기 운동을 들 수 있고, 마포 성미산 운동을 들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사실 마포 성미산은 워낙 근처에 활동가가 많다 보니 활동가 중심 운동이라 할 수 있죠.

《두꺼비마을신문》과 두꺼비 살리기 운동은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리: 네, 거기는 지식과 운동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보니까 예외적인 사례로 봐야 하겠죠. 


이: 네, 그래서 유명한 운동으로 두 개가 오버랩이 돼요. 그 대중 운동은 지금도 마을 공동체의 동력이 되고 있죠.


리: 재개발 들어가면 어쨌든 구성원들이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잖아요. 그걸 포기하고 여기 환경을 지키는 데 마음이 쏠리신 건가요?


이: 우리 동네는 어쨌든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다 새로 만들어져요. 같은 시기에 공동입주를 하게 되겠죠. 전체적인 입주자들이 젊다 보니까, 그 전에 환경운동을 통해서 두꺼비를 살린 마을이라는 자각, 자부심,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이 기반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두꺼비 안내자 모임이라든가 작은도서관 모임 등이 전국에서 가장 잘 되는 마을이에요. 마을 신문도 제일 오래됐고 작은도서관도 아파트마다 전부 만들어서 작은도서관 협의회가 전국에서 제일 모범적으로 운용되고 있지요. 오죽하면 상가연합회도 달랑 상가연합회, 이렇게 쓰여 있지 않고 수식어가 붙어요.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상가번영회’, 이렇게.


리: 자, 그래서…


이: 2004년에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시작했죠. 송파의 이근식 국회의원이에요.

훗날 행자부 장관도 역임하셨다.

리: 2004년… 탄핵 때문에 송파도 먹었던 시절이군요. 


이: 이분이 행정자치부 장관을 하다 국회의원이 되신 분이잖아요? 이분의 정책보좌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서울로 올라가 한 5년 정도 여의도에서 정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죠. 그래서 5년간 정치건달 노릇을 한 것 같아요.


리: 그 경험이 어떻게 도움 됐나요?


이: 2010년도에 도의원이 되었을 때 도움이 되더군요. 이미 서울에서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을 하고 열린우리당 김근태 당 의장 시절에 서민경제회복위원회 전문위원도 하고 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런 정책을 만들어내는 일을 5년간 했죠. 4급이라 권한도 꽤 있었어요.


리: 어떤 일을 추진하셨어요? 행안부 그쪽에서 일하셨나요?


이: 아니요, 금융감독원의 금융감독위원회가 포함되어있는 국회 정무위원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경제금융 분야 공부를 하게 됐죠. 영역의 확장이라고 할까요? 또 지방자치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전국의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05년도쯤에 2006년 지방선거를 대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전국투어를 시작했어요. 지방선거를 나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될 소양,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 등에 대한 교육을 제가 하게 됐죠. 그게 시작이 되어서, 당시 강금실과 이계안이 붙었었는데 이계안 측이 저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주었죠. 그래서 제가 한 선거 하지 않나…


리: 경선은 강금실이 이기지 않았나요-_-?


이: 99대 1이었어요. 강금실이 당연히 이기는 거였죠. 그런데 6대 4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주가가 높아졌죠. 어떻게 그 싸움에서 여기까지 치고 올라왔는가, 다들 놀라워했어요.

출처: 중앙일보
그러나 승자는 오세훈이었다더라 (…)

리: 다음에는 어떤 사람들이 주로 찾던가요? 


이: 대선에 참여하게 되었죠.


리: 2007년이요?


이: 네… 제가 그때 정동영 되는 걸 보면서 절망을 했습니다.


리: 왜 절망했습니까. 친구가 아니라서?


이: 일단 너무 후졌어요, 후보가. 당시 제가 다른 후보 준비를 하다가 안 된 거라서… 누구라고 말씀드리기는 뭐한데, 어쨌든 우리 민주당 진영의 후보 중에서는 최악의 후보였습니다. 저도 별로 찍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요.

정말 딱히 뽑고 싶지 않은 카피의 향연(…)

리: 오호… 


이: 뭐, 그렇게 5년간 여의도 정치건달 생활했던 게 저의 삶을 바꾸고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전에 읽었던 텍스트 글자 수가, 보좌관 하는 동안 읽은 것보다 더 적은 것 같아요. 그렇게 서울에서의 5년이 큰 모티브가 되었죠.


리: 5년 동안 풀로 보좌관 생활을 하신 건 아니죠?


이: 아니죠. 지방자치 아카데미도 하고, 당 대표실에서 전문위원도 하고,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님 시절에 김근태식 뉴딜정책을 하겠다고 하셔서 서민경제회복위원회라는 걸 당 직속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사회적 경제 분야 등에서 전문위원을 맡았죠. 큰 국가프로젝트 중에서 국가개조 분야의 문서를 만들고 보고하기도 하는 역할을 한 번씩 해보니 경험이 생겼어요. 그런 상태에서 대선도 안 되고, 총선도 제가 도와준 사람이 잘 안 되면서 지역으로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리: 선거 전문가라면서요-_-?


이: 그땐 다 떨어졌으니까요. 김근태까지 떨어졌었던 2008 총선인데…. 우리 지역에서도 운동했던 사람들 다 떨어지고 탕평책으로 받아들였던 관료 출신들은 살아남는 민주당의 시절을 겪었죠.

당시 한나라당 153석, 민주당 81석의 쓰라린 패배를 겪었던 18대 총선ㅠㅠ

리: 그래도 관료 출신이 마냥 안 좋은 건 아니잖아요? 이번 선거에서는 비록 관료 출신과의 대립 구도가 짜였지만. 


이: 청주는 20년 동안 관료 출신만 단체장을 맡았어요. 이번에 출마하면서 관료 대 비관료, 관료 대 풀뿌리정치인의 구도로 가는 것도 비슷한 겁니다.


리: 관료 출신과 비관료 출신의 차이가 큰가요? 클 것 같긴 하지만(…)


이: 일단 그 자리까지 올라갔던 대한민국 관료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산업화시대를 이끄는데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걸 그다음 세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지를 못하고, 자리에 앉으면 자기가 어렸을 때 해왔던 방식 그대로 유지하려고 해요.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중화학공업 이런 것은 인권이나 민주주의나 노동에 대한 가치 등등을 득득 긁어모아 투자해서 성장한 분야 아닙니까. 그다음 단계에는 중앙집중적이고 수직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수평적인 리더십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분들은 당신들이 해 왔던 방식의 성공을 고집해요. 그게 익숙하니까. 당연히 정체되죠. 그러다 보니 지방자치의 근본적 변화와 혁신, 역동성은 떨어지고 옛날 해오던 방식을 답습하는 데 머무는 거죠.


리: 제가 듣기에는 약간 추상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관료 출신으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일단 고도로 전문화된 경험을 했다는 거고, 두 번째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높은 곳과 인맥이 형성되어 예산을 따기 좋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박원순이 행정 경험이 많은 건 아니잖아요? 이재명이나 김승수 등 성공한 지자체의 공통적 특징은 관료 출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얘기는 곧 이래요. 관료 출신이 청주 시장이 된다고 쳐요. 청주에는 이미 관료가 3,500명이나 있어요. 거기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고 해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치적 성향이나 색깔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 지향과 목표를 제시하면, 나머지 행정적인 부분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는 공무원에 의해 충분히 커버된다는 걸 지난 8년 동안 대거 민주당이 진출한 이래 보여주게 되었어요. 관료가 옛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뭘 한다는 건 그냥 3,500명이 원래 하던 거에 한 개 더 플러스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죠.


말씀하신 두 번째, 중앙과의 인맥 문제. 노무현 대통령 당시에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소프트웨어적인 지원을 엄청 했습니다. 그런데 충북은 거의 지원을 못 받은 지역 중 하나예요. 다른 도시는 그때 성장했어요. 함평나비축제나 순천만국가정원 등이 그 예시죠. 하지만 충북은 하드웨어적인 생각만 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를 제시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예산을 적게 갖고 옵니다. 중앙에 인맥 아무리 많아 봐야 그런 식으로는 예산을 주지 않아요.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 들어서서 단체장들에게 어떤 사업을 하고 싶은지 쭉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충북에서는 8~90%가 캔슬을 당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다 하드웨어적인 것만 제시했기 때문이에요. 어디 도로 확장, 뭐 지어달라 이런 것만 계속 올렸거든요. 그런데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도시재생 프로그램 관련해서 돈을 줄 테니 구체적인 사업계획서를 갖고 와라, 복지 관련해서도 하드웨어적 복지 시스템 말고 다른 복지영역을 만들어서 제시해라, 하는 식이에요.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방식인 거예요. 그래서 중앙인맥을 안다는 게 전혀 의미가 없는 거죠.


그리고 세 번째로 중앙인맥과 관련해서, 저는 정치권에서 일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치권 인맥이나 현직 장관, 차관분들을 제가 많이 압니다. 그런데 옛날같이 인맥 장사해서 예산 따 오는 게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지향하는 것에 대한 방향 설정, 그 방향으로 향하는 도식 설정, 그리고 그 설정에 맞는 예산이 다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이제 사실 그런 경험 문제도 중요하지 않고, 중앙인맥도 별 의미가 없는 거죠. 그리고 중앙인맥은 제가 더 많습니다.

정말로 15분 가까이 열변을 토했다(…)

청주의 가장 큰 문제는 ‘환경’이다


리: 그러면 후보자님이 여태까지 충청도, 특히 청주의 발전이 정체되었다고 이야기하셨잖아요? 구체적으로 말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 발전이 정체된 건 아니에요. 사실 지표로 보면 실업자 수 등의 지표가 타 시에 비해서 적은 편이죠. 인근에 세종시가 생겨서 인구도 늘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의 노력에 의해서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국가적 플랜에 맞춰서 성장한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공장들이 많이 입주하는 파람에 미세먼지 수치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가 되어버렸어요.


리: 왜 그렇게 됐을까요? 산동반도와 가깝나요? 공장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 것 같은데.


이: 공장이 그렇게 많습니다. 청주 땅 면적이 전국의 0.9%예요. 그러면 소각장도 0.9% 정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10% 가까이 청주에 있습니다. 공장을 유치한다는 이유로 소각장을 유치해서 그래요. 외부의 쓰레기를 가져와서 여기서 태워버리는 거니까, 당연히 미세먼지 문제가 불거지지요. 근 몇년을 호흡기 질환 1위, 폐렴 발생률 1위, 사망률 1위를 달성했어요. 청주의 청은 말 그대로 맑을 청(靑) 자입니다. 그런데 맑지 않은 청주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 책임은 2010년부터 도의원을 했던 저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막지 못했으니까.


리: 그걸 막기 위한 활동은 좀 하셨어요?


이: 저는 환경 운동을 주로 했던 사람이에요. 한 20년 가까이 미세먼지 관련 문제제기를 해왔죠.


리: 20년 전에는 전혀 문제 제기가 안 됐던 것이군요.


이: 네, 그때 이미 얘기하긴 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여기에 굉장히 낯선 시설이 들어왔거든요. 지역난방공사라는 시설이었는데, 거기에서 벙커C유를 땐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벙커C유에서 배출되는 각종 미세먼지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처음으로 1인 시위를 한 사람이 되었어요. 하다 보니 산림학과 대학원까지 갔어요. 산림이 미세먼지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공부하려고 갔죠. 이제 제가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친 상태입니다.


리: 그리고 논문을 안 썼군요(…)


이: 그렇습니다. 선거를 하느라고 논문을 못 썼네요… 뭐 어쨌건, 그쪽 분야에는 나름 전문가가 됐죠.


리: 지역 주민들도 많이들 문제로 인식하고 있나요?


이: 청주의 제일 큰 문제가 뭐냐,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미세먼지라 그러죠.


리: 정말 심각한데요.


이: 네. 2020년까지 도시공원 일몰제라고 해서, 그때 다 그린벨트가 해제되는 거로 법원이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도시공원이 한꺼번에 풀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그 사이 청주에 무슨 일이 생겼냐면 오송·오창 이런 데를 막 개발하면서 녹지의 비율이 50%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이것도 높아 보일 수 있는데, 전국의 녹지율은 64%입니다. 청주를 제외한 나머지 충북은 산야가 70% 가까이 됩니다. 지금의 청주도 전국 도시에서 녹지율이 제일 적은 도시예요. 서울과 수원도 녹지 비율이 63~64% 정도 되고, 대도시 대부분이 60% 정도만 넘겨요. 그런데 청주만 유일하게 50%가 안 되는 상황이죠. 공기 좋은 서울로 가겠다고 청주를 떠나는 사람도 봤어요.

후보의 주요 공약이 되기도 했다.

리: 세상에, 서울 공기가 좋다는 사람들도 있다니;; 


이: 그만큼 청주의 미세먼지 수준은 그냥 극심한 정도가 아니에요. 전 지금이라도 과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리: 산업시설에만 규제를 가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이: 현재 대한민국의 미세먼지 농도 기준은 취약하고 관대한 편이에요. 그럼에도 그 관대함보다도 더 관대하게 진행해 왔던 측면을, 법과 원칙에 맞춰 철저하게 규제하는 게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법이 정하는 한도 내에서 정확하게 지켜나가는 거죠.


리: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건, 청주가 다른 데보다 기준이 낮았다고 하길래.


이: 청주가 기준이 낮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청주가 그런 회사들을 유치하고 관리하는 데 굉장히 관대했죠. 그래서 강력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까 말씀드린 소각장 같은 것도, 일부는 아예 폐쇄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요인도 있는데, 당진에서부터 불어오는 오염원이 굉장히 심합니다. 그런데 당진 화력발전소의 전기를 우리가 지금 쓰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뭐라고 얘기하기도 뭐해요. 그러면, 우리는 서울에서 원전 하나 없애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화력발전소 하나 없애기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 번째는 대중교통 문제입니다. 청주는 대중교통이 제일 불편한 도시예요.


리: 얼마나 불편하길래 그렇습니까?


이: 대중교통은 잘 이용하지 않고, 다 자가용만 끌고 다니는 거예요. 출퇴근 때에만 차를 사용하는 인구가 34%쯤 됩니다. 걸어봤자 1시간 권 안에 있는 거리를요. 버스 노선이 거의 없어서 그래요. 대중교통을 활성화해야 해요. 1982년도에 청주에 정착한 구세대적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예요.


리: 서울처럼 여러 종류의 버스를 놓는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지금 버스회사들이 그 노선을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청주도 신도시가 많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구도심의 상당공원을 중심으로 95% 이상 집중된 버스 노선을 밖으로 펼쳐야 하는데, 버스회사들은 절대로 그걸 안 하는 거죠.


리: 근데 버스는 준공영 시스템이니까 시에서 지원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 여기는 준공영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요. 그래서 지금 제 생각에는, 청주시 노선의 95%가 몰린 T자형 노선을 청주시 생긴 이래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바꾸면 대기 질이 상당히 좋아질 거로 생각해요. 그리고 그다음에 도시공원 일몰제에 대한 대처가 있어요. 제 공약 중 가장 큰 공약이 ‘100만 평 공원’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리: 공원 하나에 100만 평이라는 것인가요? 얼마나 큰 걸 만드시려고…


이: 순천만의 국가정원보다 조금 더 큰 규모입니다. 그러면 중부권에서 가장 큰 도시공원이 되지 않을까요?

출처: YTN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순천 국가정원을 이길 수 있을까-_-?

리: 글쎄요, 순천 같은 경우에는 사실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 규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 아뇨, 거기는 논을 사서 했습니다. 또 우리도 미호강이라고 해서 전국 4대 강 다음으로 5번째 강이 흐르고 있어요. 그동안은 그것을 하수도처럼 써 왔습니다. 덕분에 각종 오염물질이 더해져서 일부 지역은 굉장히 수질이 안 좋아요. 산업시설 넣느라 그런 부분을 포기한 거죠. 그런데 저는 태화강처럼 거기를 살리려고 합니다.


리: 태화강은 돈 때려 박고 시간 때려 박은 거 아닌가요? 제 생각에는 그거 살리다가 4년 다 가실 것 같은데…


이: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살리지 않으면 청주가 살 방안이 별로 없어요. 서울이 부러웠던 게, 여의도나 영등포에서 보면 30분 이내에 10만 평 이상의 공원들이 몇 개씩 있습니다. 여의도 공원을 가거나, 보라매 공원을 가거나, 옛날 OB맥주 공장 있던 그 숲을 가거나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죠. 그렇게 서울시 내에서는 30분 이내에 10만 평 이상의 숲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없습니다.


리: 전반적으로 환경, 관광, 문화 관련 공약은 많은 데 비해 신도시, 개발 관련 특별한 공약은 없는 건가요?


이: 저는 사실 아파트를 안 지으려고 합니다. 비어 있는 아파트가 이미 많은데도 2만 개 정도가 새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공실률이 너무 높은데, 그 높은 공실률에 대한 부담을 청주시민들이 지고 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성장 위주, 외형적 확장 위주였던 도시 정책을 현재 인구 80만이 잘 사는, 삶의 질을 높인 도시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공약들을 책으로 모았을 때 맨 위에 캐치프레이즈로 ‘삶의 질, 80만이 잘 사는 도시’ 이렇게 쓸 거라는 거죠.


리: 여기도 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겠다 이런 건가요.


이: 네, 그렇습니다.


리: 왠지 전주가 생각나네요.


이: 여기가 전주와 비슷합니다. 규모, 예산, 사람 숫자 다 그렇죠. 그런데 한 10년 전만 하더라도 청주가 더 살기 좋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주와 비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전주의 도시 아이덴티티가 아주 높아졌어요. 불과 10년 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2010년도에 도의원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 거예요. 제가 도의원을 하던 8년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건가, 싶죠.



박원순보다도 더 잘할 자신 있는 ‘마을 공동체’


리: 아까 교육 얘기도 나왔는데요, 사실 교육도시라고 하기에는 학교가 많다, 인문계 진학률이 높다 이 정도라고 말씀 주셨잖아요? 이들의 교육 여건을 개선할 방안은 어떤 걸 생각하고 계세요?


이: 현대의 교육은 다른 방식을 꾸준히 모색해 왔어요. 어렸을 때부터 입시 위주로 교육해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혁신학교가 성공했죠. 지난 2007년부터 8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냐 하면, 마을이 학교를 감싸고, 마을이 학생을 키우는 방식으로 교육이 하나의 혁신지구사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지금은 분명 실험적인 측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이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교육적인 부분은 이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한 40개 정도의 마을마다 혁신지구를 만드는 거죠.


리: 동 하나하나마다 마을공동체를 만드시겠다는 생각이세요?


이: 네, 아까 말씀드린 ‘두꺼비 마을’처럼 청주시 전체를 그런 공동체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 근데 인구가 많고 어느 정도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를 들어 서울의 관악구나 마포구는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거기에서조차도 그다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박원순 시장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게 시 단위에서 가능할까요?


이: 저는 두꺼비 마을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어요. 마을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박원순 시장보다 제가 경험이 더 많을 것 같네요.


리: 무엇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보세요? 어떤 활동이 공동체 활동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 아까 말씀드린 작은도서관을 예로 들어보죠. 아파트마다 작은도서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 도서관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최소 10명에서 100명까지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 자원봉사자들은 아파트 축제를 열기도 하고, 책을 빌려주는 작은 문화 활동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만의 공부 모임을 만들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100개 이상의 공부 모임이 있습니다. 각종 문화 프로그램도 되게 많고, 마을 단위의 합창단이나 밴드까지 구성되어 있어요. 마을 신문에는 어린이 기자단, 청소년 기자단이 참여하는데 이것도 매년 100명 정도 참가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동네에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은 거예요. 학교를 제외하고서라도요. 아주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죠.

출처: 두꺼비마을신문
워낙 도서관이 많다 보니 ‘작은도서관 지도’를 만드는 일도 잦다.

리: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도시 아이덴티티나 도시 브랜드를 중요시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중간중간에 이야기 나왔던 전주나 순천 같은 곳은 일종의 관광자원도 있지만 특정 기간 내지는 1년 내내 이어지는 축제들의 힘도 강하잖아요?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이: 청주는 놀 곳, 볼 곳, 즐길 곳 없는 이미지가 강해요. 그런데 이건 장소만 부족한 게 아니라 문화 프로그램도 부족하다는 걸 의미해요. 왜 부족하냐, 예술인들의 삶이 굉장히 팍팍하기 때문이에요. 예술인들을 성장시키고 여기서 살면서 예술 활동을 하게 한다는 시스템이 잘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전주는 그런 걸 잘 한 도시죠. 전주는 원래 문화적인 기반이나 토대가 좋아요. 일반인들도 예술가에 대해 예우를 잘 해 줘요. 그래서 저는 예술인들이 자신의 예술 활동을 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리: 흐음…


이: 그리고 아까 그 프로그램 문제 말인데, 일본의 유후인을 예로 들어볼게요. 보통 400만에서 많으면 700만 명의 관광객들이 거기 온대요. 근데 거기도 사실은 노쇠해서 쇠퇴해 가는 마을이었거든요. 그런데 특징이 하나 있었어요. 벳푸 등의 관광지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기를 통과해 가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유후인에서는 거기에서만 즐길 수 있는 로컬 푸드를 판매하기로 했어요. 자식들 떠나보내고 노인분들만 남아 있던 빈방이 많았는데, 그 빈방을 활용해서 자신들이 손수 재배한 음식을 대접했죠. 이런 걸 기반으로 유후인 마을이 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시골 마을다운 풍광이 돋보이는 일본의 유후인 마을 전경

청주의 청남대도 100만 명 정도가 오는 관광지예요. 그 옆의 문의면이라는 곳도 조건이 똑같아요. 청남대를 가려면 여기를 꼭 지나쳐 가야 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대충 식사만 하거나 스쳐 지나가기만 해요. 하지만 여기는 충분히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에요. 그래서 문의를 유후인 마을처럼 만들겠다는 공약을 했죠. 사실 청주는 가지고 있는 문화자원이 많습니다. 초정약수 아시죠? 세계 3대 광천수 초정약수. 한때는 대한민국 생수 시장의 70~80%가 다 청주 거였어요. 


리: 정말 깨끗한 곳이었나 보군요.


이: 지금도 국내에 유통되는 생수의 상당 부분은 여기 물입니다. 그 정도로 청주가 가지고 있는 천연자원이 많은 편이었죠. 그런데 초정탄산수나 진로샘물 등이 공장을 때려 지어 가지고 물을 다 빨아들여서 다 말라버리게 하는 등 산업화 방식으로 피폐하게 만든 측면이 있어요. 그걸 다시 복원해내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는 거죠. 계속 외부 자원을 유치하고 개발하는 외연적 확장 방식으로만 진행되다 보면 도시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져요. 미세먼지, 공원녹지, 문화가 없는 것, 정체성이 없는 것이 현재 당면한 문제인 거죠. 그걸 저라면 할 수 있겠다 싶고요.

마이너리티의 길을 간다,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리: 이번 대선 캠프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셨죠?


이: 저는 박원순을 지지하다가,


리: 갈아탔군요!


이: 안희정을 지지하다가,


리: 망했군요.


이: 경선 끝난 뒤에는 문재인을 지지하게 됐죠. 문재인 대통령의 유세본부장을 맡아서 충북 전체를 누볐어요. 지역 당원분들이나 주민분들이 느끼시기에, 저는 굉장히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자타에서 인정받았죠.

출처: 충북일보
실제로 매주 일요일 직접 숲을 설명하는 해설가로 나서는 등 수많은 활동을 벌였다.

리: 처음에 개혁당 들어간 게 노 대통령을 지지해서였죠? 


이: 네, 노 대통령과는 사업을 같이한 게 좀 있었죠. 청년물결사업 같은 거요.


리: 몇 년도 얘기죠?


이: 네, 그분을 처음 만난 게 그분이 국회의원 되셨을 즈음이니까 2001년 전후죠. 그때 몇 번 만나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그랬습니다. 그때도 매력적인 분이셨어요. 당시 학생운동 하던 사람 중 노무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익환 목사님 돌아가셨던 날도 엄청 추웠어요. 근데 제 옆에 노무현이 있었어요. 저와 같이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었죠. 그런 추억들을 같이 겪으면서 노무현의 정신 등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우리 동네는 대부분 이인제를 지지했는데, 그때도 혼자 독립운동 하듯이 노무현을 지지했죠.


리: 노무현 정신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 가치 중심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 참여와 활동을 하는 것. 저도 지역에서는 학연·지연·혈연 없고 줄 없는 마이너리티 같으면서도, 가치 중심적으로는 가장 활동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제가 생각하던 노무현의 모습이죠.


리: 마이너리티라는 게 사실 승리하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지금 후보님도 지지율이 굉장히 떨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이: 처음에는 아예 바닥이었어요. 그런데 두 자릿수로 올라온 걸 보면 엄청나게 올라온 거예요. 또 권리당원에서는 제가 압도적으로 많이 모았어요. 조직력이 다른 거죠. 말씀하셨던 대로 마이너리티는 이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변방에서 중앙을 탈환했던 역사 또한 무수하죠. 문제는 그게 누가 되느냐입니다. 수많은 마이너리티중 하나가 그렇게 될 텐데, 제가 그렇게 되고 싶죠.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리: 전 청주시장이 제일 강력하시죠? 지지율 1위를 그분께서 하고 계시고.


이: 여론조사에서는 그렇습니다. 당내에서는 굉장히 안 좋으시죠. 이번이 5번째거든요. 4번이나 기회를 줬는데 이겨야 할 선거에서 계속 지셨기 때문에… 하지만 정치라는 게, 선배가 길 비켜주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후배 되는 입장에서 결국은 선배를 넘어가야 하죠. 마찬가지로 제 앞에는 지금 전 시장을 하셨던 그분이 거대한 산맥처럼 놓여계십니다. 제가 산을 넘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죠. 저에게 그만한 실력과 배포가 있을까요? 그 싸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리: 지금까지 한 선택 중에 가장 잘했다, 하는 순간이 있었나요.


이: 도의원을 했던 것이죠.


리: 어떤 이유 때문이죠?


이: 제가 꿈꿔오던 시민운동에 대한 생각을 현실에 투영하고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거죠. 저는 정치가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좌관도 하고 그랬던 것입니다만, 이제는 제가 그 일을 직접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앞서 긴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말했던 저의 꿈은 곧 청주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궤를 같이해요. 그걸 제 방식대로 돌파해 보겠다는 거죠. 시민운동만 가지고는 안 됐고, 도의원이나 의회 가지고도 안 됐고, 단체장으로는 해볼 만한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리: 만약 당선이 된다, 그래서 4년 뒤에 이광희와 이광희의 청주시를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까?


이: 청주시가 바뀌었단 말을 듣고 싶습니다. 청주는 60년 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쪽으로든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 자부심 있는 도시, 정의로운 도시, 여기 사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운 도시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리: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온 이상 추천하는 청주 맛집.


이: 저는 삼겹살 거리 갔으면 좋겠어요. 전국에서 유명한 삼겹살 거리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함지락’이라는 집이 맛있게 잘 만듭니다. 뭐, 거기가 아니라 아무 데나 들어가셔도 맛있을 거예요.

출처: 한국관광공사
이 거리에서 제공하는 간장소스가 그렇게 일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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