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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 찾아온 승부사: 김승수 전주시장 인터뷰

조회수 2018. 4. 21. 14: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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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수 전주시장 인터뷰

리(이승환 ㅍㅍㅅㅅ 대표): 어쩌다가 정계에 입문하셨습니까?


김승수(전주시장): 제가 정읍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꽤 부자였는데,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무너지면서 익산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아버지는 도저히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셨고, 어머니께서 저희 4남매를 다 키우셨어요. 낮에는 회사에 가서 일을 하시고, 거기가 끝나면 저녁에 공장을 또 나가셨어요. 새벽에 퇴근하셔서 공장 잔반으로 아침 차려주시고 도시락 싸주시고…


리: 시작부터 왠 신파극을…


김승수: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그렇더라고요. 이게 꼭 우리가 잘못한 건가? 이렇게 못 사는 게 단순히 우리 개인의 잘못인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정치 쪽에 꿈을 가지게 되었어요. 원래는 집이 워낙 힘들어서 대학도 안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재수도 하고 삼수도 해서 정외과에 들어갔죠.


리: 그 힘든 집에서 삼수를(…)


김승수: 제가 속이 없었죠… 학원비라고 타 놓고서 학원은 안 다니고 맨날 친구들하고 놀러 다녔어요. 전라북도 돌고 강원도도 가고, 거의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놀러다녔죠. 술도 많이 먹고… 삼수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정신 차리니까 마지막 시험을 앞둔 여름이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팍 들었어요.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너무나 커서 방황을 했는데, 이렇게 살면 나 역시 가족을 책임질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정신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리: 그렇게 정신 차리고 대학에선 공부 좀 하셨나요?


김승수: 안 했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맨날 놀고 그랬죠. 군대 다녀와서야 정신 차렸지만… 살다 보면 사람마다 내가 꿈꾸던, 뭐 이런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잖아요? 저는 그게 김완주 전 전북 도지사님 수행비서로 들어간 거에요. 지사님이 전주시장 초선도 하기 전이셨는데, 지사님 지인이었던 제 은사,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신 거죠. 똘똘한 애 있으니 좀 써먹어 보라고…

출처: 전북도민일보
지금은 순하고 모범생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김승수



취업 못하던 백수, 한옥마을 조성의 총대를 메다


리: 사실상 가방모찌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승수: 지금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고 제 정치의 출발이 거기에서 시작됐어요.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 선거캠프에 교수님 추천으로 들어가서 스케줄 관리 하고 같이 다니는 사람 정도였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허물이 없어지다 보니까 제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제가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아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아마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지 선거가 끝난 후 시청 수행비서로 들어갔죠. 젊은 사람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좀 필요하다고.

출처: 연합뉴스
그의 정치적 멘토였던 김완주 전 지사.

리: 김완주 지사님을 엄청 오래 모신 셈인데 본인에게, 어떤 존재이신가요?


김승수: 햇수로 정확히 16년을 함께 했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옥마을이에요. 한옥마을이 시작된 게 김완주 지사님 때이거든요. 무언가를 처음 시작한다는 게 아주 어려워요. 제가 이제 나이가 49살인데, 요즘에야 꿈이 무엇인지, 장르가 무엇인지, 조금 알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리: 갑자기 웬 장르가(…)


김승수: 말하자면 우리 나라는 장르가 별로 많지 않아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는데, 외국 사람들은 대한민국 벤치마킹 별로 안 하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 벤치마킹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해요. 그 나라는 우리와 다른 장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정치인이 하나의 장르를 창조한다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김완주 지사님이 그걸 해내셨어요. 한옥마을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거죠.

출처: 위키피디아
Oh 끝판왕의 등장 oh

리: 한옥마을은 어떤 배경으로 조성된 거죠?


김승수: 사실 한옥마을은 긴 플랜 속에 만들어진 건 아니에요, 2002년 월드컵을 전주에서 하게 됐는데, 이렇다 할 호텔도 없고 보여줄 게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른 도시처럼 대형 호텔 짓기보다, 우리 색깔을 담은 민박을 통해 한국적인 문화를 한번 보여주자. 그렇게 1998년애서야 한옥마을이 시작됐어요. 지금 말로 하면 대대적인 도시재생 사업이었죠. 그런 말이 나오기 훨씬 전이지만…

출처: 조선일보
전주에 조성된 월드컵 경기장.

리: 반응이 뜨거웠겠군요.


김승수: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한옥마을 자체는 상당히 오래됐었어요. 1920~30년대부터 조성되었을 거에요. 그때에는 부자들도 많이 살고 멋있었죠. 그런데 50, 60년대를 넘기고 아파트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옥이 불편하게 느껴지잖아요? 부자들이 거길 떠나고 좋은 아파트에 들어가면서 굉장히 슬럼화된 지역이 된 거죠. 고쳐야 했는데, 막상 한옥을 고치기에는 또 너무 비싸고... 이런 데를 한옥보존지구로 묶으니 난리가 난 거에요?


리: 왜죠?


김승수: 당시 시민들 입장에서는, 비가 새는 등의 하자가 발견되면 값싼 재료로 공사해서 마무리하고 싶은데 굳이 한옥 스타일을 고수해야 하는 거예요. 돈도 없는데… 그래서 이분들이 어마어마하게 저항했죠. “당장 한옥보존지구를 풀어달라, 마음대로 집 짓고 살게…” 하시면서요. 그렇게 주민들이 시장실로 쫓아오기도 했고, 저도 멱살 잡히고 맞기도 했고 그랬죠…


리: 반격은 하셨어요?


김승수: 아뇨, 그럴 수는 없었죠. 주민들 입장도 이해가 되고 또 우리는 공무원이니까 못하죠(…) 일방적으로 당하며, 사정사정도 많이 하고… 당시 김완주 시장님께서 그냥 막무가내로 바꿀 수는 없다고 판단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한옥을 신축도 하고 주민들이 개축을 하겠다고 하면 일부 리모델링을 지원해 주고… 한옥마을 지원조례를 만들어서 최고 5천만원씩 지원이 들어갔던 거죠. 공공시설도 넣고, 한옥체험관도 넣고, 전주가 공예에 굉장히 강하니까 공예품 전시관도 만들고 그랬죠.


리: 그 결과는 대박이다!


김승수: 네, 201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많은 사람들이 한옥마을을 방문하게 되었고요. 최근 2년 동안에는 매년 천만 명 이상이 방문을 했어요.

출처: 경향신문
개쩌는 한옥마을의 성장

리: 이건 대박 정도가 아닌데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성공한 걸까요?


김승수: 시대정신인 것 같아요. 아파트가 만들어지면서 쾌적하고 편해질 수는 있지만, 위대한 도시는 될 수 없다는 거죠. 새로운 건물에는 영감이 없잖아요? 한옥마을이라는 공간도 새로운 빌딩으로 구성되었다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새로운 것이 오래된 건물과 융합하면 굉장히 생경한 느낌을 줘요. 우리한테도 그런 시기가 왔던 거죠. 새로운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도시의 흔적을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키느냐…


리: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승수: 시장에 출마하기 전에 유럽의 도시들을 둘러보면서 도시에 대한 구상을 했고, 또 시장이 되어서도 해외 출장 갈 일이 많이 있잖아요? 일본, 독일, 스위스… 이런 선진국을 가면서 ‘도시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제가 봐왔던 전주라는 도시는 뻥 뚫린 도로에 빌딩과 자동차만 가득했어요. 이게 도시의 전형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선진국에 가서 오래된 도시들을 보고 도시가 갈 길을 확신하게 됐어요.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 받았던 영감이 뚜렷하게 남아있어요.


리: 도시가 무엇이라 생각하신 겁니까?


김승수: ‘사람을 담는 그릇’이죠. 커피만 해도 컵의 생김새에 따라 담기잖아요. 마찬가지로 도시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시민들의 행동과 생각이 바뀌어요. 이 근처에서 락페스티벌을 하면 락을 시민들이 많아지고, 클래식 공연을 하면 클래식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아져요. 도시를 물리적으로 어떻게 만드냐, 이에 따라 시민들의 삶이 변하고요. 그런 확신이 생기면서, 항상 나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가야겠다… 이런 꿈을 꾸며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죠.

도시브랜드부터 남다르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이끈 수장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


리: 한옥마을도 유명하지만, 전주는 축제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전주시 하나의 축제가 어지간한 도 수준이죠.


김승수: 그쵸, 전주 축제가 굉장히 많아요. 전주국제영화제는 이제 18년 정도 됐는데, 원래부터 독립영화, 인디필름을 추구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독립영화는 상업영화, 블록버스터 영화로 건너가기 전 연습하는 장르로서만 인식되었어요. 이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변했죠. 우리 사회의 통념, 권력, 자본 등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품으로…


리: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김승수: 제가 시장에 임하면서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그때 강력하게 선포했던 게 있어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 그러다 보니 영화 <노무현입니다>도 우리가 지원을 했고, 지금은 MBC사장이 된 최승호 PD가 만든 <자백>이라는 영화도 전주영화제에 공식 초청해서 최초로 상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굉장히 힘들었어요. 외압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노무현입니다>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빛을 볼 수 있었다

리: 아니, 부산국제영화제가 납작할 때 왜 굳이 개기신 거죠…


김승수: 부산과 전주는 다르니까요. 세월호 현수막을 가장 오랫동안 지켰던 데가 전주예요. 광장이나 길거리 이런 데 최근까지 걸고 있었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말쯤 방문할 때, 그쪽에서 대통령 오는 길에 현수막을 좀 빼주면 좋겠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안 내렸죠. 오히려 전주에서 촛불집회가 17번 있었는데, 빠지지 않고 매번 나갔습니다.


리: 박근혜 측 반응이 어떻던가요? 사실 중앙정부에서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


김승수: 작년 연말에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블랙리스트 단체장 목록’을 발표하더라고요. 이재명 시장, 충북에 이시종 도지사, 안산에 제종길 시장, 그리고 저까지 4명이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이해가 가더라고요. 예전에는 잘 되던 사업이 왜 막판에 엎어질까…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싶더라고요.

이 사이에 끼어 있었던 셈…

리: 그런데 사실 한 도시를 이끄는 시장으로서 정치적 자존심을 접고 예산을 따내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특히 전라북도 예산은 적은 편이기도 하고… 그러면 예산을 따내기 위해 좀 숙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김승수: 당시에도 많은 분들이 그러셨어요. ‘어떻게 시장이 촛불집회에 나가냐?’, ‘안 나가는 게 비겁한 게 아니다’, ‘시장이나 단체장 입장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저도 저에게 스스로 물어봤어요. 진짜 예산 걱정되어서 촛불집회 안 나가는 거냐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것 때문에 겁나는 게 아니고, 소위 저를 ‘털까봐’ 걱정되더라고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가 시장인데 제가 두려우면 어떻게 해요? 당장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추운 겨울에 부모님 손을 잡고 나와서 몇 시간씩 서 있는데…


리: 전주 촛불 집회는 사람이 많이 모였나요?


김승수: 많게는 만오천 명 정도 모인 적도 있죠. 전주 전체 인구가 66만 명인데요. 사람 숫자도 숫자인데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이 엄중한 역사 한복판에서 있다는 게 그럼 굉장히 감동적인 일이더라고요. 또 우리 시민들의 역사의식이 이렇게 많이 성숙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대기업이 들어와야 좋은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전주’다운 대답


리: 전주시장을 하며 뿌듯했던 순간을 이야기하자면…


김승수: 참여정부 때 혁신도시가 시작되며, 전주에도 국민연금, 농촌진흥청, 이런 기관들이 왔죠. 제가 시장이 되며 혁신도시 협의회장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원래 혁신도시 취지는 공기업의 경쟁력으로, 도시의 소비와 산업, 국제화를 일으키라는 뜻이었죠. 그런데 막상 이 분들이 몸과 건물만 내려온 상태에서 딱 멈춰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회장이 된 후에 우리 지역에 있는 인재들을 35%까지 의무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라고 지속적으로 촉구했어요.


리: 참여정부 때는 쿼터가 없었었나요?


김승수: 의무조항이 아닌 권고조항이었죠. 한 3년 정도 노력한 후, 문재인 대통령께서 후보로 오셨을 때 약속해 주셨고, 최근에는 지역인재를 의무 채용하는 내용이 드디어 법으로 만들어졌어요. 굉장히 큰 성과죠.


리: 의원도 아니신데 어떻게 그런 법을 밀어붙인 건가요?


김승수: 저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끝까지 주장하는 게 중요하죠. 시민들의 기본이 되는 주거, 안전, 먹거리 문제 등 기초생활과 관련된 것들은 당연히 시가 개입해야죠. 예를 들어, 저는 대한민국 건설사 중에서 가장 악랄한 기업이 ‘부영’이라고 생각해요. 


리: KT랑 야구단 창단 붙던 그 부영은 왜…


김승수: 부영이 임대아파트 분양을 진행하잖아요? 그런데 임대료를 어마어마하게 올려요. LH 같은 데는 2% 정도씩 올리는데 부영은 막 5%씩 올려요. 임대아파트에 사는 건 대부분 서민들이잖아요? 1년에 많게는 천만 원씩 올라가는데, 그것 때문에 월 100만원 가까이 저축해야 해요. 결국 전주시에서 개입하게 되었죠. 기초생활과 관련된 것은 이런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죠. 아예 임대료 과다 고발을 했죠.

지나가다 갑자기 한대 맞은 부영(…)

리: 부영 사유재산인데 가능한가요?


김승수: 아무리 사유재산이어도 임대료 인상 최고 상한선이 5%예요. 그 5%를 다 채워서 올리려면 주변 시세 등 근거가 필요하고요. 지난 박근혜 정부 때에는 전주시가 ‘주변 시세와 다르게 올리고 있다’고 말해도 동의를 못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 정부에서는 전주시 말이 맞다고 그러더라고요. 결국 국토부 지지로 전주시 의견이 통과됐죠.


리: 정부가 바뀌니까 시 레벨에서도 많은 게 바뀌는군요.


김승수: 다른 예로 효성 임대아파트가 있어요. 효성이라는 민간 회사에서 아파트를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어요. 아파트가 갑자기 경매에 넘어가서, 거기 살고 계시는 분들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난데없이 자연재해가 닥친 수준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LH가 매입해서 공공임대아파트로 전환시켜 달라고, LH와 국토부에 건의를 했죠. 그게 받아들여졌고, 대한민국 최초 공공임대아파트 전환 사례가 되었어요.


리: 그런데 정작 지금 이야기한 업적과 달리, 가장 많이 알려진 업적은 들어온 돈 덩어리를 걷어차는 정책들입니다. 빨리 가야 할 길을 시속 40km로 제한해서 힘들게 한다거나, 롯데쇼핑몰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거나…


김승수: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제 목표는 재선이 아니에요. 삼선도 아니고, 도지사 국회의원 하는 것도 목표가 아니죠.


리: 현재 재선하려고 용쓰고 있지 않습니까(…)


김승수: 그게 목표는 아니라는 거죠. 재선, 삼선한 시장이 자랑스러운 시장인가요? 대한민국에 재선, 삼선한 시장, 국회의원 엄청 많아요. 그러나 그게 목표를 달성한 것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어떤 도시를 만들기 위해 시장을 하냐는 거죠. 시민들과 함께 꿈꾸는 도시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저의 목표이고, 그 도시를 만드는데 시간이 필요해서 재선을 하는 거죠.


리: 롯데 계열 쇼핑몰은 왜 반대했나요?


김승수: 우리 전주가 어떤 도시가 될 것이냐는 측면을 생각해봐야 해요. 예를 들어 도시를 그냥 다 밀어버리고 새로운 신도시로 바꾸자는 시각이 있다 쳐요. 그러면 편한 도시, 쾌적한 도시가 될 수 있겠죠. 대신 절대 위대한 도시는 되지 못할 거예요. 천년의 역사가 그대로 사라지는 일이거든요. 그렇다면 위대함이란 무엇이냐? 저는 영감, 감동이 있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도시는 감동이나 영감을 주기 어렵고, 준다 하더라도 굉장히 획일적이에요. 그래서 짧게는 도시의 기억, 길게는 도시의 역사가 굉장히 중요해요.

갈길 가던 롯데도 끌려나옴 (…)

리: 저는 롯데 쇼핑몰에 대한 질문을 드렸는데, 왜 여기까지-_-;;


김승수: 롯데쇼핑몰이 들어서려 한 전주종합경기장은 1963년도에 전국체전을 치른 공간이에요. 지금은 사람들이 전국체전에 관심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전국체전은 도시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었어요. 전국체전 한 번을 치르면 그 도시에 소위 ‘까만색 도로’가 처음으로 생겼거든요. 실내체육관이 지어지는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그때 실감하는 거예요.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라고.


리: 그땐 그때도 다 지난 일 아닙니까(…)


김승수: 그때 전주에 사시던 많은 어머님, 아버님들이 환갑잔치도 안 하시고, 쌈짓돈 가져다 경기장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이번에는 전주의 운명을 바꿔 달라면서요. 그런 마음이 모여서 만들어진 경기장이 바로 그 경기장이에요. 이런 것 말고도 이 도시에는 얼마나 감동적인 집단의 기억이 많이 있겠어요. 그런 걸 잘 살려야 하는데, 그걸 깡그리 잃어버리고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것을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때의 힘과 꾸망을 담은 듯 알록달록한 전주종합경기장

리: 비슷한 예로 서울에도 DDP가 있죠. 동대문야구장을 헐고 지은 그곳을 보면 나름 새로운 랜드마크로 서면서, 또다른 전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던데요.


김승수: 그 건물을 만든 사람이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잖아요? 물론 좋은 건물이죠. 하지만 그런 건물은 동대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죠. 마찬가지예요. 굳이 롯데 쇼핑몰이 우리 도시의 모든 기억을 지우면서 우리 도시 한복판으로 와야 할까? 저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어요.


리: 그러면 그 자리에는 어떤 건물이 지어져야 할까요?


김승수: 도시의 개인화된 시민들을 묶어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어요. 유럽으로 따지면 광장이에요. 유럽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려면 반드시 광장을 거치도록 설계돼 있어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광장은 가장 위대한 건축이죠. 축제도 하고, 시장도 열리고, 민주주의 성지도 되는 등, 수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광장이 없었다면 유럽 사회는 해체되었을 거라고 봐요. 전주시에도 이런 역사적 기억을 살리면서 가져갈 광장이 배꼽 같은 공간이 됐으면 해요.


리: 음… 하지만 소비, 돈지랄만큼 재미있는 게 어딨습니까?


김승수: 소비를 통한 즐거움도 시민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런 삶의 재미까지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그 다음 문제, 소상공인이 상당히 침체되는 문제 때문에 반대하는 거죠. 그런 게 아니라면 시기를 봐서 쇼핑몰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지금 이 위치, 전주종합경기장은 아닌 거죠. 이 위치 주변에 들어올 거라고 기대한 시민들은 굉장히 실망도 했지만…

서민에게 이것보다 더 큰 재미가 어디 있으리…

리: 그런데 전북도민들, 전주시민들은 계속 내려가는 경제에 대해 박탈감이 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경제를 살리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김승수: 쇼핑몰이 들어온다고 지역 경제가 나아지느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부(富)가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죠.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건 뭔가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소비하는 것에 가까워요. 쇼핑몰 덕분에 일자리가 늘어난다고도 하는데, 쇼핑몰은 유통업이 아닌 부동산 중개업이에요. 임대 매장을 내주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소비된 것들은 지역경제의 활로가 되는 게 아니라, 서울 본점으로 올라가요. 그래서 지역경제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주, 단순한 관광을 넘어 ‘품격’을 지향하다


리: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런 게 아니면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있기는 한가 의문이 많이 듭니다. 결국에는 다 서울로 흡수되는 형태가 되는 것 같거든요.


김승수: 저는 그 도시 자체가 경쟁력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례로 영국에 브리스톨이라는 시가 있어요. 여기는 남들이 산업 키울 때 거의 포기하고, 생태환경으로 승부를 보려 했어요. 그런데 환경이 너무 좋아지니까 사람들이 막 몰려드는 거예요. 저 도시에서 아이들을 키워보자, 이렇게 마음먹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죠. 독일의 동베를린도 무척 낙후된 편이었지만, 물가가 쌌고 예술이 발달해 있었어요. 전세계에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도시를 부흥으로 이끌었죠.


리: 전주에서도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나요?


김승수: 전주에 팔복동이라는 데가 있어요. 50년 전부터 공단이 있던 아주 낙후된 곳이죠. 3주 전 그 공원 한복판에 미술관(예술공장)이 개관을 했어요. 50년 된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공장을 모던하게 바꾸고 옛 기억을 살려서 만들었죠. 가장 낙후된 공간이지만 예술의 힘을 빌리면 가치 있게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거죠. 이제 공장 근처라고 부끄러워하던 아이들 표정이 바뀔 거예요. 냄새 나는 공단에도 예술의 힘이 들어가면 주민의 삶이 변하고,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공동체가 살아나고, 아이들이 자부심을 갖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출처: 전북일보
팔복예술공장. 빈 카세트테이프로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리: 사실 뭐 전주는 음식만 있어도 절대 안 망할 것 같긴 합니다만-_-;;


김승수: 저희는 애초에 그저 관광도시가 아닌 문화도시로 가려 해요. 문화도시로 발전하면 관광은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만약 우리가 본격적으로 관광도시로 가려고 마음먹었다면 뭐 디즈니랜드니 유니버셜 스튜디오니 하는 것들을 했겠지만 전주라는 도시는 그렇게 가고자 하지 않거든요. 우리 시민들도 행복하고 오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오게 되면 당연히 도시는 활기를 띠게 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경제를 살아난다고 봐요.


리: 허나 한옥마을도 굉장히 많은 노력으로 활력을 얻지 않았습니까? ‘기억’도 좋지만, 종합운동장을 이렇게 놔둔다고 능사인가 싶습니다.


김승수: 절대 그냥 놔두는 게 아니에요. 경기장은 다른 곳으로 옮겨서 짓고, 이 공간은 예전의 기억을 살려서 외형의 일부는 남기되 아주 현대적이고 영감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겁니다. 한옥마을 관광객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국립미술관을 유치하거나 대형광장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저는 이것을 전주형 컬쳐노믹스라고 생각하는데, 문화와 역사자원을 기반에 둔 경제부흥이죠. 전주에는 그러한 엔진이 있습니다. 한옥마을에 엔진이 하나 있고, 종합경기장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엔진이 만들어지는 거죠.


리: 그렇게 엔진을 하나하나 늘려 나가실 계획인거죠?


김승수: 네, 그래야 전주라는 도시가 성장을 하죠. 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여러가지라 생각해요.


리: 문화 외에 강조하고픈 게 있으시다면…


김승수: 환경을 넘어 생물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천의 물을 맑게 하고 산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야, 깨끗하고 보기 좋으네 멋지네” 하고 끝나면 이건 그냥 조경이에요. 궁극적 목적은 그게 아니라, 숲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살려 내는 거에요.


개인적으로는 동물원에 대한 애정이 많습니다. 사실 다른 생명을 가둬놓고 즐긴다는 측면에서 동물원은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이왕 있는 거라면 그 안의 동물들도 행복하고 시민들도 행복할 수 있는 공존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 방향이 생태동물원인데 지금 많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3자녀의 아버지가 생각하는 전주의 ‘교육’


리: 모든 후보들에게 하는 공통질문, 교육이 나왔습니다. 애들은 어떻게 키우시나요?


김승수: 고2, 중2, 제일 아래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있어요. 특별할 건 없고, 굳이 이야기하자면 첫째가 고등학교를 자퇴한 정도가 있겠네요.


리: 첫째는 왜 자퇴한 거죠?


김승수: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얘가 고등학교 1학년 들어가고 한 달 정도 지나서인가, 갑자기 말을 꺼내더라고요. “아빠, 나 아침 일곱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공부해서 대학교에 간다는 게 너무나 무의미해 보여. 나는 농사를 짓고 싶어”라고요. 걔가 유치원 때부터 농사를 되게 좋아했어요. 그래서 자퇴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럼 해라, 라고 했죠.


리: 쏘쿨한 아빠인데요(…)


김승수: 그렇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 싶은 거죠.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말리셨죠. 수학여행 다녀오면 교우관계가 형성되면서 그럴 생각이 없어지니까 기다려 보시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다녀오고 나서 2~3개월 있다 자퇴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진안군이라고 마이산 있는 곳에 가서 농사 짓고 있어요. 검정고시도 준비하며, 겨울에는 제주도에 가서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리: 너무 어린 나이인데 불안하지는 않아요?


김승수: 저는 전혀 안 불안해요. 저희 집사람도 적극 동의하고요. 물론 마음의 불안감은 있지요. 저도 부모잖아요?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넓어요… 아내하고 같이 고민 많이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우리 그렇게 하지 말고, 아이들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일 하도록 도와주자… 이렇게 다짐한 거예요. 물론 매번 흔들렸죠. 애도 어느 날은 불안하다 그래요. 그럴 때마다 그래요. “니가 나중에 실패해도 또 다른 길 가면 된다, 그때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는다, 그러니 불안해 하지 말고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라고요.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자퇴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

리: 각 지역마다 골 때리는 문제가 교육 문제잖아요. 수도권에 비해서 좋은 학원도 없고요. 교육은 원래 교육감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쪽인가요 아니면…?


김승수: 저도 아이 셋을 키우니 고민이 많죠. 특히… 글쎄, 벌써 초등학교 가기도 전의 아이들이 매일매일 공부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애는 벌써 영어 시작했어”, “얘가 한자도 알아”… 이렇게 키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숲에서 자라게 하자, 숲에 가면 맑은 공기도 있고 흙도 집어 먹고 벌레도 관찰할 수 있잖아요?


리: 부모들이 좋아할까요…


김승수: 아이들에게는 안전한 놀이터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건강한 위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크게 다치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위험이 있는 데가 아이들의 모험심을 훨씬 키워주고 강하게 만들어준다 생각해요. 다른 친구들과의 협동심도 길러주고, 자연도 배울 수 있고요. 그렇게 생태놀이터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어요. 지금 4개 정도 만들었는데, 재선하게 되면 지속적으로 늘리려고 그래요.

출처: 전주일보
그 생태놀이터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김승수 시장.

리: 그러면 중학생 이상의 학생 대상으로는…


김승수: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라는 제도를 고민하고 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고민하는 인생학교 비슷한 거에요. 지금은 그 전 단계로 주말마다 ‘야호학교’라는 것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3개월 하다가 6개월로 늘리고, 잘 훈련시켜서 1년짜리 인생 학교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이미 야호학교는 아이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짜고 있어요.


리: 입시와 무관한(…) 전반적으로 학부모가 싫어할 만한 정책을 다 실현하는 것 같군요(…)


김승수: 지금은 과도기이지만, 저는 분명히 지역사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시기를 도와주는 것이죠. 그런 제도가 없으면 방황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도 하잖아요. 우리 아이처럼 자퇴를 하면 갈 데가 없어요. 사회적 시선이란 게 있잖아요. 마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처럼 낙인을 찍는 거죠. 하지만 전주시에서 공식적으로 일 년짜리 인생학교를 운영한다, 이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예요.


리: 음… 부모들이 좋아할만한 정책은 좀 없나요(…)


김승수: 새로운 도서관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대한민국 도서관은 완전히 고시공부하는 독서실 같죠. 그래서 우리가 일본의 츠타야 서점 혹은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 같은 걸 만들어보자, 라고 계획하고 있어요. 이미 도서관 직원들과 함께 츠타야 서점도 다녀왔어요. 이미 전주는 인구 대비 도서관이 가장 많은 도시이지만, 츠타야서점 같은 명소 도서관이 생기면 더욱 많은 사람이 찾을 테니까요. 기존 도서관은 점점 지역 주민, 선생님, 학생들, 학부모 등이 직접 바꿀 수 있는 결정권을 줬어요. 재선하면 저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일본의 명물 츠타야 서점.



“건물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문화는 그럴 수 없습니다”


리: 마지막으로… 젊었을 때 여행도 많이 하시고 여러 도시도 가보셨을 텐데, 어떤 도시가 제일 아름답고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김승수: 스위스 취리히, 일본 교토, 이탈리아 피렌체 등이 있죠. 특히 교토는 전통도 가지고 있지만 산업적으로도 훌륭해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영국의 브리스톨도 하나의 생태도시로서 꼭 본받고 싶은 도시죠.


리: 그러면 한국에서 제일 근접한 도시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승수: 당연히 전주라고 생각합니다. 전주는 사명감이 있어요. 전주에는 눈에 띄는 한옥마을도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것들도 많아요. 예를 들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 중 하나가 인간문화재라는 거예요. 사람을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게, 사실 전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거든요.


대한민국 도시 평균적으로 그런 인간문화재를 1.7명 정도 보유하고 있는데, 전주는 무려 46명이에요. 20배 수준이죠. 그런 분들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건물은 돈 있으면 지을 수 있지만, 그분들의 몇십 년 인생은 돈 있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주의 저력은 그런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도시이기도 하고요.

무척 아름답고 한국적인 전주의 야경.

리: 미래의 전주는 어떻게 될까요?


김승수: 프랑스문화원에서 6월에 대한민국 대표 도시로서 전주를 조명하기로 했듯, 이미 전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론리 플래닛>이 2016년에 ‘아시아의 도시 중 꼭 가야 될 10개 도시’를 선정했는데, 일본의 홋카이도, 중국의 상해에 이어 전주가 3위를 차지했고요. 또 최근에는 영국의 가디언에서 전주의 음식을 ‘아시아의 최고 음식’으로 소개하기도 했어요. 음식으로도 유명해진 거죠.


리: 전주가 음식이 쩔긴 하죠.


김승수: 왜 외국은 전주를 주목할까요? 대한민국 도시들은 다 복제되고 있잖아요. 도시 중간에 쇼핑몰, 그 옆에 스타벅스, 그 옆에 맥도날드… 이게 한국 도시의 전형이에요. 근데 이 도시들이 합쳐져서 국가를 만들잖아요. 그러면 결국 대한민국 속의 다양성이 사라지게 돼요. 그럴 때 전주처럼 자기 색깔을 지켜가는 도시가 하나하나 늘어가면, 대한민국은 독특한 도시의 집합체가 돼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다양성이 살아있는 국가로 변하는 거죠. 전주가 그 모델이 되고 싶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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