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양, 인간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

조회수 2018. 3. 29. 16: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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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정상적인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부서진 존재들의 모양에 대해 말한다

※ 본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삶은 실패한 계획의 잔해에 불과하다.”

부서진 존재들의 삶이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성’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존재들. 그리하여 어딘가가 결핍되었거나 모자란 존재들이라 여겨지는 이들의 삶이다. ‘정상적인 기준’에서라면 인간은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성’인 ‘인간’을 사랑해야 하며, 안정적인 직장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속 존재들은 하나같이 그런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 말을 못 하거나, 동성의 인간 혹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며, 청소부나 시대에 뒤처진 화가로 살아간다.


백인이자 남성이며 이성애자이고 4인 가족을 꾸린 중산층이 실제 주인공인 사회지만, 영화 속에서는 흑인이나 장애인, 동성애자나 괴생명체 같은 소수자들이 주인공의 자리에 있다.


엘라이자는 말을 못 하는 언어 장애인이자,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청소부다. 그녀는 동성애자인 화가 자일스와 함께 살고 있는데, 삶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 욕조에 들어가 자위를 한다. 그녀의 삶에 미세한 균열이자 변동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 ‘괴생명체’가 오면서부터다.

남미의 어느 강에서 잡혀 온 괴생명체는 각종 학대를 당하며 감금당해 있다. 엘라이자는 그 생명체에게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끼고 다가간다. 실험실을 둘러싼 엄중한 감시를 피해, 그녀는 그 낯선 생명체가 갇혀 있는 어항을 몇 번 손가락으로 두들긴다.


생명체는 소리에 반응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와 시선을 교환한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 언어 장애인 청소부. 그 공간의 유령이나 다름없는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녀가 한 낯선 존재에 의해 각인되면서, 그녀는 자신을 알게 된다.


이후, 그녀의 삶은 변해간다. 그 존재를 위해 매일 삶은 달걀을 준비하고, 음악을 틀어주고, 언어를 가르친다.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었던, 늘 세상을 겉돌기만 하던 그녀에게 그 생명체는 유일하고도 좁은 창문과 같았다. 자신이 살던 강에서 끌려 나와 ‘인간들’의 세계에 갇히게 된 괴생명체에게도 그녀가 그랬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 거대한 세상에서, 정상의 담벼락을 쌓아올리고, 정상의 갑옷을 둘러 입고, 정상을 위한 땅만을 만들어가던 이 괴물 같은 세계에서 유일한 숨구멍과 같았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어렵지 않게 ‘사랑의 관계’라고, 그것도 가장 절실한 사랑의 한 종류라 부른다.

그 생명체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엘라이자는 함께 살던 화가인 자일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거절하는 자일스에게 알라이자는 수화로 절박하게 호소한다. 그 생명체는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준다”고.


또, 그 존재가 ‘인간’도 아니라는 자일스의 말에, “나도 그 사람처럼 입만 뻥긋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서, 그런 자신도 “괴물”이냐고 묻는다. 결국 자일스는 그녀의 마지막 말(수화)에 마음을 바꾼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영화는 ‘인간’의 정의에 관해 총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인간 ‘종’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을 살해하지 말라 하면서, 왜 이념을 위해 인간을 죽이거나 학살하는 건 그토록 쉬운가? (영화는 인간을 손쉽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던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 같은 인간 종이라고 한다지만, 왜 특정한 ‘종류’의 인간만이 진정한 인간으로 취급받고 있는가?


이에 대해, 영화는 대답한다. 인간은 ‘인간 종’도, 시대나 사회가 정하는 ‘기준’에 따라 규정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괴생명체를 잡아 온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완벽한 중산층의 기준을 달성한, 그래서 그 사회의 가장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며,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완벽하게 유지해왔던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상적인 금발의 부인과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키우며, 고급 캐딜락을 구입하여 몰고, 언제나 최상의 청결함을 유지하며 직장에서 성취를 거두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다. 그는 신 역시 흑인 청소부보다는 당연히 자신을 더 닮지 않았겠냐고 소리 높여 말한다.

하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 ‘인간성’은 영화가 진행되며 처절하게 무너진다. 괴생명체에 의해 잘린 손가락이 썩어가면서, 그가 지켜왔던 ‘품격 있는 삶’도 무너진다. 캐딜락은 박살이 나고, 승승장구해 왔던 직장에서의 위치도 괴생명체의 탈출로 위태로워진다.


그는 부서져 가는 자기의 삶을 다시 복원시키고자 괴생명체와 엘라이자를 쫓아간다. 하지만 결국 그가 원했던 ‘인간으로서의 완성’은 실패한다. 오히려 부서진 존재들, 기존의 기준에서 결핍되고 모자란 존재들이었던 괴생명체와 엘라이자가 새로운 삶을 얻는다. 엘라이자의 몸에는 아가미가 생기면서, 그녀 역시 하나의 괴생명체가 된다.


삶이란 실패한 계획이자 부서진 잔해이고, 비합리적이면서도 불완전한 여정이다. 인간은 그 여정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못해 완벽한 인간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복무하며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규정들 속에서 우리는 가장 인간다운 어떤 지점들,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잃는다.

물(water)이 그러하듯, 삶도 원래 정해진, 그래야만 하는 모양(shape)이 없다. 인간이라는 모양이 그 자체로 그 바깥을 배제하는 하나의 폭력이라면, 물과 같은 사랑은 끝이 없는 수용이자, 있는 그대로의 이해이며, 규정당함을 넘어 창조해가는 삶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반쯤 부서진 채로, 영원히 완성될 일 없이 수없이 변주하며 인간을 이루어간다. 그 가운데 당신의 ‘모양’은 없다.


그저 당신이 있고, 내가 있을 뿐이다.


원문: 고대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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