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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차를 커피로 착각한 여자

조회수 2018. 3. 1. 17: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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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은 누나가 임신한 후, 그리고 출산한 후까지 쭉 누나를 속여왔던 것이다

인형 가득한 방에 조카와 앉는다. 동화를 읽어주지도, 쪽쪽이를 물리지도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실 신상 음료수다. 조카의 옹알이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신상털이. 마시즘이다.

 


누나가 엄마가 되었다는 것

철없이 치고받았던 누나가 아이 둘의 엄마가 되다니. 누나를 보며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감히 짐작한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누나는 동요를 흥얼거리며 머그컵에 검은 음료를 담아왔다.

“커피 좀 마실래?”

그렇다. 첫째와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동안 누나는 긴긴 음료 공백기를 가졌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나가 항상 마시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맥주와 커피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커피와 재회를 하는 날이다. 매형이 아침 일찍 디카페인 커피를 내려주고 갔다고 슬쩍 자랑하는 누나. 그녀를 따라 커피를 홀짝여 본다.


응? 이거 커피가 아닌데?


 

이것은 부부간 음료 사기 사건이다


커피의 풍미가 느껴진다. 하지만 커피는 아니고 보리차에 가깝다. 커피가 간절한 사람에게 보리차를 내어주다니. 이것은 음료 사기 사건이 아닌가! 오랜만에 들어온 사건에 나의 미뢰가 신이 잔뜩 났다. 비록 의뢰인이 내 친누나고, 범인이 매형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그래도 누나는 이것이 연한 디카페인 커피라고 믿고 있다. 옹알이하던 조카는 쪽쪽이만 물고 있다. 진실을 밝힐 사람은 나뿐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로 위장한 음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증거는 바로 방 안에 있어…!

범인… 아니 매형은 평소 정신없는 출근길에도 분리수거를 잊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남편이지만, 범죄적으로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증거물까지도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잘 넣어놓았기 때문이다. 누나가 커피라고 착각하고 마신 음료의 이름이 밝혀졌다. ‘블랙보리’. 이름만 들어도 범죄의 냄새가 난다.


나는 이 수상한 음료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이 보리차를 만든 곳이 하이트진로다. 맥주 마실 때의 하이트, 두꺼비 소주의 진로가 맞다. 하이트진로는 주류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런 비주류(?) 시장에 진출하다니.


이는 블랙보리를 만든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하이트진로음료에 둥지를 옮긴 조운호 대표! 배후는 바로 당신…은 아니고 장본인이다.


한국의 음료덕후라면 이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침햇살, 초록매실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음료수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보리차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디 하늘보리 높은 줄 모르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미 보리차 라인에는 20년 가까이 왕좌를 놓친 적 없는 ‘하늘보리’가 있다. 문제는 하늘보리도 조운호 대표의 작품이었다는 것. 그야말로 자식과 자식의 싸움이 아닐 수 없다. 마시는 사람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구경이 없겠지.


물론 두 보리차는 다르다. 하늘보리는 보리차 본연의 맛을 잘 구현했다면, 블랙보리는 재료부터 색깔, 맛 그리고 향까지 기존 보리차와 차별을 두었다. 보리의 구수함보다는 탄맛의 시크함을 살렸다고 할까. 블랙보리는 오히려 보리차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어필할 요소가 많다.


 

블랙보리는 왜 커피로 둔갑했나?

물론 그래 봤자 보리차다. 나는 다시 범행 현장에 돌아왔다. “아까 그 커피 한 잔만” 나는 블랙보리를 다시 음미해보기로 했다. 짙은 갈색의 음료에서는 커피의 향이 난다. 검은보리를 커피처럼 볶은 것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는 볶은 보리로 음료를 만들어 커피 대신 마신다. 오르조(Orzo)라고 불리는 이 녀석은 카페인이 들어있지 않아 ‘밤에 마시는 커피’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사건의 퍼즐은 모두 맞춰졌다. 누나가 커피를 마시기로 한 날, 매형은 디카페인 커피를 선물로 준다는 약속을 깜빡했다. 하지만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가장 커피와 비슷한 음료 블랙보리를 골랐다. 그리고 그는 블랙보리를 텀블러에 부어 일을 무마하려 한 것이다. 나름 철두철미한 범죄였다. 처남이 음료 신상털이가 아니었다면.


 

범인은 다시 현장을 찾는다


띵동! 매형이 돌아왔다. 그는 한 손에 누나의 것과 똑같이 생긴 텀블러를 들고 있었다. 분명 그 안에는 뒤늦게 담아온 디카페인 커피가 들어있겠지! 하지만 바꿔치기하기엔 너무 늦었어. 내가 조사를 하느라 텀블러에 든 블랙보리를 몽땅 마셨거든.

누나는 자신이 마셨던 것이 보리차였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매형도 범행사실을 인정했다. 아내와 달리 커피를 너무 자주 마셨던 그는 요즘 블랙보리에 빠져있었다고. 또한 블랙보리에는 카페인이나 당이 없어서 건강에도 더 좋지 않냐는 변명을 덧붙였다. 누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럴 거면 진작 주던가!”

부부는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다. 나는 조카 앞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삼촌 대단하지?” 조카의 옹알이는 또박또박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야, 이 가정파괴범아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


원문: 마실 수 있는 모든 것 ‘마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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