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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굼’의 심리학

군기 문화, 갈굼은 어떻게 개인을 망쳐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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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설 연휴가 끝나갈 무렵, 언론에서는 어느 한 간호사의 안타까운 자살 소식이 보도되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소속 간호사가 아파트 고층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끊은 사건으로, 보도에 따르면 간호사의 남자친구는 평소 여자친구를 향한 선배 간호사들의 괴롭힘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후속 보도나 관련 업계인들의 반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자면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으로, 간호사 사회에서의 소위 ‘태움’이라고 하는 군기 문화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 벌어지는 비인권적 군기 문화 및 괴롭힘에 대한 이슈들은 이따금 수면 위로 부상, 우리들을 씁쓸하게 만든다.


분노하면서도 그것이 착잡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문제라는 것도, 바꿔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음에도 딱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막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소위 ‘갈굼 문제’에 대한 관심만큼은 뜨겁다. 한국 사회 어딜 가나 크고 작은 갈굼들이 만연하기에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가해자였거나 피해자, 혹은 방관자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소위 ‘내가 겪어봤는데~’ 하면서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들 수 있을 만한 주제라 할 것이다.


가혹한 군기 문화가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보상심리다. 그리고 대개 가해자들이 아까워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이 조직에 속하기까지 내가 투자했던 시간과 돈과 노력. 그리고 이 조직에 속한 후, 적응하고 현재의 위치까지 오기 위해 투자했었던 시간과 돈과 노력, 그리고 눈물.


정식 간호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부해야 할 것은 많고 실습/수련을 위해 직접 현장에 나가야 할 일도 많다. 졸업 후 대형 병원 등 수입이 보장되는 곳으로 진출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이 험난한 과정을 뚫고, 드디어 내가 간호사가 되었는데 과연 내가 이 자리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냐는 거다. 그리고 내가 힘들었던 것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싶다.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차마 개인으로서는 문화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그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은 상태가 최선일지도 모른다.


쏟아부은 내 삶이 있어 과격한 시도를 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심정적으로는 부조리함에 거부감을 갖는 상태. 딱 거기까지였다면 그래도 약간이나마 동정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왜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바꾸려 들지 않는가?’, ‘직접적으로 갈굼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단지 방관하였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있다’라 하기에는, 사실 한 개인이 시스템에 맞서고, 조직에 맞서고, 다수에 맞선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갈굼을 서서히 정당화하기 시작할 때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문제다. 이 점을 알기에 소위 갈굼을 변호하려는 이들조차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필요악’이라는 단어를 꺼내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늘어놓을 뿐이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갈구니까 하급자가 실수도 덜하고, 업무 숙련 속도도 빨라진다며.


시스템이 없고, 돈이 없고, 높으신 분들의 의지가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임은 알지만 당장 이 개개인들을 갈아 넣어야만 업계가 굴러가는 상황을 유지하자면 이것만큼 효율적인 수단도 없다고 말이다.


더군다나 간호사는 사람의 생명에 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직업이고 따라서 업무상 실수가 더더욱 치명적일 수 있기에 어느 정도의 갈굼 문화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위와 같은 주장이 어느 정도 먹히는 것은, 그래도 ‘갈굼’라는 것이 방법은 나빠도 효과가 있긴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사실 따져보면 그렇다. 군대, 학교, 직장 등 조직 생활에서 부조리한 군기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핵심적 이유. 그것은 바로 ‘군기를 잡는 것이 쓸만한 사람 만들고 부리는 것에 도움은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막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등한시하면서까지 우리가 잘못된 군기 문화를 통해 얻어야 하는 이익이 정녕 존재하는가? 어쩌면 당장의 이득보다는 장기적인 손해가 더더욱 막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부당한 갈굼을 많이 당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무엇이 자리 잡게 될까? 대표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부적응적 완벽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평가염려 완벽주의라고 하는 심리 상태다.


심리학자들은 맥락과 방향성 등에 따라 완벽주의를 여러 갈래로 규정하고 있는데, 소위 적응적/부적응적 완벽주의를 판가름하는 핵심 기준은 ‘완벽을 정의하는 기준’을 어디에서 가지고 왔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완벽의 기준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무언가를 잘 하려 노력한다면 이는 적응적인 완벽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완벽의 기준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부적응적인 완벽주의를 갖게 하는 토대가 된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최악은 바로 완벽의 기준이 내 것도 아닌 데다가,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노력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부적응적 완벽주의 가운데에서도 특히 타인의 강압, 강요, 괴롭힘 등으로 인해 ‘억지로’ 그들의 기준에 맞춰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평가염려 완벽주의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을 잘 해야 하는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더 혼나지 않기 위해, 더 괴롭힘당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스톡홀름 증후군에라도 홀린 듯 그(가해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 일을 잘하고 싶어 한다. 당연히 일이 잘못됐을 때는 괴롭다.


만약 완벽의 기준이 오롯이 내 것이었다면, 그냥 털고 일어나 다시 도전하면 된다. 하지만 남의 기준이었다면, 그리고 힘의 무게추가 내가 아닌 그에게 가 있는 것이라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겸허히’ 그의 가혹한 심판만을 기다리며 벌벌 떨 수밖에 없다. 그렇다. 사람을 부당하게 갈궈대면 피해자는 딱 이런 상태가 된다.


심리학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평가염려 완벽주의는 스트레스, 우울, 업무 회피, 불안, 자기효능감 하락, 낮은 삶의 만족도, 수치심, 자기 비난, 자살 생각 등 한 개인이 차마 감당키 어려운 심리적 부작용들을 쏟아낸다. 그러므로 막대한 부작용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개개인이 일을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은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설사 당장 ‘군기가 들어’ 일을 빠릿빠릿하게 잘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가용한 신체/정신적 자원들을 있는 대로 다 긁어다 쓰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이른바 회광반조(回光返照)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갈굼을 이겨내고 결국 일을 잘하게 된다 한들, 그것은 그 사람이 심리적 고통이라는 막대한 페널티 속에서도 죽어라 노력했기 때문이지, ‘갈굼’으로 인해 얻게 된 혜택이라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부당한 갈굼의 반복이 촉발하는 이 평가염려 완벽주의 상태가 얼마나 개인들에게 해로운지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된다. 스트레스 좀 받는 정도라 생각하거나, 의지/노력으로 참으면 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 ‘정 힘들면 그만두고 다른 일 하면 되지 않나? 일 못 그만두게 막은 것도 아닌데.’ 그러나 그 상황을 벗어났다 해도, 그것이 남긴 상흔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슬픈 것은, 선배들의 갈굼을 감당하지 못하고 몇 개월도 채 안 되어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당장 그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관계로 이 부조리의 악순환을 끊을 동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명’이 다하면 ‘버리고’ 새 사람 쓰면 될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어떻게든 그럭저럭 잘 굴러온 듯하니.


그러나 부조리한 문화가 장기화된다면, 그리고 그 길에 꿈을 품고 이제껏 죽기 살기로 노력해 온 ‘열혈팬’들이 서서히 ‘안티’로 돌변한다면 과연 그 끝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앞으로도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그 일을 하려 자발적으로 찾아올 것이라 보장할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 사람 갈아 넣어가며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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