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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의 시대

조회수 2018. 2. 7. 18: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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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장애'라는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가?

큐레이션의 시대


핀란드에서는 ‘교육’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핀란드 교육부는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subject)-과학, 수학, 역사 등-들은 20세기에 고안됐는데, 21세기에 학생들이 이 과목들을 배울 이유가 없다며 ‘teaching by topic’ 방식으로 이행할 거라고 한다.


예를 들어, ‘카페 서비스’라는 토픽에서는 말하고 쓰는 커뮤니케이션, 외국인과 커뮤니케이션하기, 수학 등을 자연히 배우게 되고, ‘UN’이라는 토픽에서는 경제, 역사, 지리, 언어 등을 아우르며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핀란드는 기존 교육의 분류 체계를 해체하고, 다시 재구성하는 중이다.


큐레이션이 국내에서 폭발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마쓰다 무네야키의 『지적자본론』과 마쓰다 무네야키의 CCC가 기획한 ‘츠타야서점’이 소개된 것이 기폭제가 되지 않았을까.


무네야키는 기존의 서점이, 서점 입장에서나 관리가 편리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을 문제로 봤다. 책을 사는 사람 입장이 고려 안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 입장에서 경험하는 서점을 구성하기 위해 기존의 서점을 해체하고 새롭게 분류했다. 『큐레이션』을 쓴 마이클 바스카는 방 정리조차도 큐레이션의 범위에 들어오는 행위라고 보고 있다. 서점쯤이야 당연히 큐레이션 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국내에도 큐레이션 책방 바람이 불어 최인아 책방이나 인덱스 서점 등이 그와 유사한 시도를 하고 있다. 최인아 책방에는 베스트셀러나 신간이 많이 비치되어 있지는 않다. 대신 책방의 1,600여 권의 책은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서 채웠다.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인 그대에게’

‘우리 사회가 나아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서른 넘어 사춘기를 겪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큐레이션’개념은 서점과 책방을 레버리지로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북 큐레이터/북 큐레이션’도 꽤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 간다.


광범위한 선택 범위는 우리를 압도해 버린다. 올바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쉽사리 짐으로 느껴지곤 한다. 선택의 순간에 갈등하고 망설이는 것은 물론이다. 선택의 종류가 너무 많으면 결국 하나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p.141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큐레이션이 필요해진 이유


‘선택장애’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이것도 저것도 쉽게 고르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주시해볼 것은 과거에 비해 너무 많아진 선택지 자체가 아닐까.


5개의 항목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엔 매우 친숙하지만, 선택지가 무한정 늘어나다 보면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가 오기 마련이다. ‘선택장애’가 아니라, 그저 우리 앞에 놓인 옵션이 너무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보의 범람은 언제 우리가 잠식당하는지도 모를 정도의 속도로 이뤄진다. 정보의 둑은 서서히 무너지며 그 틈새로 정보가 흘러 새어 나오는 게 아니다. 둑 너머로 정보의 쓰나미가 덮쳐 거기에 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정신적인 멀미가 올 지경으로 온다.


문화 소식, 뉴스나 책 추천 등에서도 큐레이션을 내세운 서비스들이 다시 범람한다. 결국 큐레이션을 해주는 큐레이션 서비스의 각축장이 열리고, 그 서비스 가운데 또 선택을 해야 하는 피로감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다.


18세기 조선에도 비슷하게 정보의 범람이 이뤄졌던 시기가 있다. 청나라 대에 발간된 <사고전서>와 같은 총서류가 중국 대륙과 일본에서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 탓에, 한양대 정민 교수는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특징을 ‘정리벽’과 ‘수집벽’으로 정리한다. 전에 없는 정보의 홍수에서 비슷한 정보를 찾아내고, 묶고, 수집하고, 배열하고, 특징짓는 조선 지식인들을 보면, 당대나 지금이나 홍수를 대하는 자세는 비슷하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렇게 쏟아지는 정보 속에 <속백호통(續白虎通)>이나 <연경(烟經)>같은 책을 썼다. <속백호통>은 호랑이 이야기만을 모아 엮은 책이고, <연경>은 담배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낸 책이다.


정보가 쏟아지면, 이렇게 단순 호사나 취미의 흐름으로 빠지기 쉬운 데 반해 모든 정보를 배곯는 조선 백성들을 위해 편집한 큐레이터들이 있다.

큐레이션은 곧 선별작업이다. 또한 배치, 정제, 단순화, 맥락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p.121 『큐레이션』 마이클바스카



동양 최대의 지식 큐레이터


유배지에 가니 ‘이제 드디어 책 좀 읽을 수 있겠다’며 18년 유배지 생활 동안 500여 권의 저작을 세상에 내놓은 다산 정약용이 바로 그 지식 큐레이터다. 1년에 28권 정도를 쓴 셈이다.


다산 정약용을 그저 위인이나 천재로 퉁 쳐버리면 속 시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를 지식생산자, 지식편집자, 지적자본의 총괄기획자, 지식 큐레이터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쉽게 퉁쳐버릴 일은 아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백성들의 삶과는 연관성이 낮은 ‘앵무새 키우기 가이드’ 격의 <녹앵무경綠鸚鵡經>같은 책을 내는 세월 좋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실학과 위국애민 정신을 바탕으로 쏟아지는 정보와 자료를 엮기 시작한다.


다산의 다작은 그의 빼어남과 탁월함을 먼저 주목하게 한다. 다산이 왜 그 작업들을 했는지를 들여다보면 다산이 어떤 가치를 주목했는지가 아주 선명해진다. 큐레이터의 자질은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엮었느냐에서도 판단되어야겠지만, 다산이 남긴 메세지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큐레이션 할 것인지’였다.


다산의 머릿속엔 오로지 백성이었다. 18명의 제자와 함께 팀을 짜서 자료를 발췌하고 카드 작업을 하고, 엮어서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방향으로 작업을 한정했다.


범람하는 정보에서 관점과 가치가 누락되면 누구나 쉽게 세월 좋은 앵무새 얘기, 호랑이 얘기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워낙에 눈길을 끄는 재밌는 얘기과 컨텐츠가 많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을 잡아라. 먼저 모으고, 그 다음에 나눠라. 그런 뒤에 그룹별로 엮어 다시 하나로 묶어라. 공부는 복잡한 것을 갈래지어 단순하게 만드는 일이다. 갈팡질팡하지 말고 갈피를 잡아야 한다. 교통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서랍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정민


프랑스 최대의 문학 큐레이터


프랑스는 시민혁명 이후 문맹률이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는데, 읽기 교육이 폭넓게 시행되면서 대중들이 비로소 작가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프랑스 파리를 거점으로 날고 기는 작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파리를 허브로 많은 작품과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조선 때의 정보 범람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정보 과잉에 노출된다. 결국 이런 상황이 큐레이션이라는 개념을 호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러 문예지들 사이에서 ‘프랑스신비평’이라는 문학평론지의 창간 작가들은 이런 독자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방대한 정보 범람 속에서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작품을 발굴해낼 적임자를 찾는다. 그렇게 발탁된 가스통 갈리마르는 세계적 출판사 갈리마르에서 역작들을 수도 없이 발굴한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 부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알베르 카뮈의 처녀작 『이방인』도 갈리마르에서 출판했다.


이외에도 가스통 갈리마르가 발굴해 낸 작가들에는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말로, 알베르 카뮈,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프란츠 카프카, 존 스타인벡 등이 있다. 이름 하나의 무게가 결코 적지 않은, 그야말로 역대급 작가들을 세상에 많이도 소개했다.


‘갈리마르’라는 이름은 마이다스로 통했고, 당시 독자들은 갈리마르의 큐레이션에 대만족했다. 물론, 대만족했던 건 당시 프랑스 파리의 독자들 뿐만은 아니다.

요즘의 큐레이터


그래서일까.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정보가 유통되고 범람하는 이 시대에 ‘정보 편집력’이 무척 중요하다고 말하는 두 명의 작가가 있다. 일본에서는 400만 부 이상의 책을 팔아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후지하라 가즈히로가 있다. 일본 사회 기준에서는 이 사람의 이력 자체가 워낙 특이해서 더욱 화제가 되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 한국과 일본 사회는 급격한 커리어 전환이 잘 허용되지 않는 사회다. 회계사에서 여행작가가 되거나, 교육계의 원로가 경영컨설턴트가 되거나 하는 식의 급 전환은 마치 자연계의 돌연변이처럼 발생확률이 낮다.


후지하라 가즈히로는 일본의 영리 기업 리크루트에서 10년 이상 일을 했고, 도쿄 영업 총괄부장으로도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이치고 중학교의 교장이 되어 일본에선 최초로 교육계 출신이 아닌 인사로서 교장이 되는 이력을 만들며 교육 개혁자로 자임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에서 후지하라 가즈히로는 20세기를 성장 사회로 규정하고, 21세기를 성숙 사회로 부른다. 성장 사회에서는 ‘정보 처리력’이 경쟁력이었고, 성숙 사회에서는 ‘정보 편집력’이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 강조한다.


풀어 말하면, 앞선 시대에선 ‘정답을 맞히는 힘’이 관건이었다면, 지금은 ‘모두가 수긍하는 답을 만들어내는 힘’이 곧 정보 편집력이란 것이다.


일본에 또 다른 괴짜가 살고 있다. 괴짜 교장선생님만큼 괴짜로 정평이 나 있는 이 사람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미술 대학을 다니고 있는 김정운 작가다. 


한 때 강연 프로그램을 틀기만 하면 머리가 뽀글뽀글한 모습으로 김정운 작가를 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돌연 교수를 그만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에서 만화를 그리고, 일본의 청년들과 미술 수업을 듣는 모습이 모 다큐에도 소개가 되었다.


그는 아예 ‘편집’의 중요성을 말하려고 『에디톨로지editology』책을 통해 새로운 용어를 제안하면서, “모든 창조는 편집”이라고 주장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선별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유의미한 지식을 생산해내는 ‘편집력’이 미래형 인재가 따라가야 할 지점이라고 역설한다.


 

맺으며


큐레이션과 정보편집력. 대등한 키워드는 아니겠지만 엇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다. 갈리마르에서 다산 정약용, 김정운과 후지하라 가즈히로, 마쓰다 무네야키와 핀란드 교육 시스템이 말하는 것들에 관통하는 메세지는 분명하다.

범람하는 정보에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편집해내고 선별해내는 것.


원문: 서민규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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