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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사실을 마주해도 당신이 절대로 잘못된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건 결국 사실,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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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요커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엘리자베스 콜버트(Elizabeth Kolbert)가 지난 2월 뉴요커에 소개한 글 「Why Facts Don’t Change Our Minds」입니다. 콜버트는 확증 편향을 비롯해 인간의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추론에 관해 그 뿌리를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본 인지과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합니다.


1975년, 스탠퍼드 연구진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합니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썼다는 유서 50장을 보여줬습니다. 한 번에 두 장씩, 총 25차례 유서를 보여주면서 학생들에게 두 메모 가운데 실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쓴 유서가 어떤 것인지 알아맞혀 보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받아든 유서 두 장 가운데 한 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쓴 실제 유서였고, 나머지 한 장은 평범한 사람이 상상력을 동원해 쓴 가짜 유서였습니다.


25번 가운데 무려 24번이나 진짜 유서를 가려낸 학생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학생은 고작 10개밖에 맞히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보여준 유서 가운데 절반은 실제로 LA 카운티 검사관실에서 받은 진짜 유서였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받아든 성적표는 실험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즉, 실제로 몇 개를 맞혔는지와 관계없이 무작위로 학생 절반에게는 24개나 맞혔다고 얘기해주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10개밖에 못 맞혔다고 통보한 겁니다.


이어지는 실험에서 연구진은 학생들에게 앞서 알려준 점수는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 실험을 하는 진짜 목적은 그들이 맞았는지 틀렸는지에 관한 생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측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말도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진짜 유서를 몇 개나 가려냈다고 생각하는지와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의 평균 점수는 몇 점이나 될 것으로 생각하는지가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앞서 24개를 맞혔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학생들은 자신이 진짜 유서를 평균보다 훨씬 많이 가려냈을 것 같다고 답합니다. 반대로 10개밖에 못 맞혔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학생들은 자신의 점수가 여전히 평균에 크게 못 미칠 거라고 예상합니다. 앞서 점수는 실제 몇 개를 맞혔는지와 전혀 무관하게 무작위로 정했던 거라고 분명히 말해줬는데도 여전히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겁니다. 연구진은 냉정하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한 번 뇌리에 박힌 인상은 놀라울 만큼 오래 간다.

안 들려

몇 년 뒤 새로운 스탠퍼드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프랭크(Frank K.)와 조지(George H.)라는 두 소방관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줍니다. 프랭크에게는 갓난아이인 딸이 한 명 있고 취미는 스쿠버다이빙이며, 조지에게는 어린 아들이 한 명 있고 취미는 골프라는 식으로 시시콜콜한 정보도 있습니다. 연구진은 또 불확실한 상황 앞에서 위험을 무릅쓰려 하는지 안전한 선택을 하려는지 그 성향을 측정하는 실험(Risky-Conservative Choice Test)에 두 소방관이 어떻게 답했는지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는 프랭크가 유능한 소방관이며 위험 회피 측정 실험에서 항상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택했다고 알려주었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프랭크가 마찬가지로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택했지만, 그는 일을 너무 못하고 여러 차례 사고를 친 탓에 상사에게 경위서를 쓰거나 경고를 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전형적인 심리학 실험답게 ‘앞서 알려준 정보는 엉터리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주지 말아야 했는데 잘못 알려준 것’이라며 완전히 무시해도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학생들에게 두 소방관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지 물었습니다. 프랭크가 유능한 소방관이라고 들었던 학생들은 그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예측했습니다. 반대로 프랭크가 사고뭉치라고 들었던 학생들은 그가 위험한 행동을 무릅쓰리라고 내다봤습니다. 앞서 실험과 마찬가지로 프랭크에 관한 정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분명히 이야기해줬지만, 학생들은 바로 그 거짓 정보에 속아 넘어간 셈입니다. 연구진은 이번에도 비슷한 결론을 내립니다.

기존에 믿던 것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사실을 확인하더라도 사람들은 믿던 바를 좀처럼 고치지 못한다.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측하는 데 고작 두 가지 정보만으로는 제대로 유추하기 어려운데도, 그렇게 확신에 찬 예측을 한다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연구진의 연구는 무척 유명해졌습니다. 1970년대에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됐을 때 이 주장은 학계 전반에 꽤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백, 수천 번의 후속 연구가 그 주장을 입증하고 더 자세히 살을 붙였습니다.


이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얼마든지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에 관한 사례만 해도 수없이 많으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사람은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생각할까요? 혹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왜 사람이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생각해도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걸까요?


올해 초 출판된 『추론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Reason)』라는 책에서 인지과학자 우고 메르시에(Hugo Mercier)와 댄 스퍼버(Dan Sperber)는 위의 질문에 답을 내고자 시도합니다.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추론을 두 발로 걷는 직립보행이나 삼원색을 바탕으로 한 시력과 같이 진화의 산물로 봅니다. 추론이라는 기제가 인간의 삶에 처음 등장한 건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의 선조 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추론 기제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인지과학에 관한 요소를 최대한 뺀 메르시에와 스퍼버의 설명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다른 종보다 특히 뛰어난 것은 바로 협동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공동의 목표로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과정은 만들기도 어려울뿐더러 반복해서 협동을 지속하기는 더 힘들다. 개인에게는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결과와 혜택만 나누어 갖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다 보니, 누구나 무임승차할 유인이 있는 셈이다.

추론이라는 사고 과정은 추상적인 논리 문제를 풀고자 개발한 것도 아니고, 낯선 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의미 있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대신에 추론은 서로 힘을 합쳐 집단생활을 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인간이 개발해낸 사고 기제다.

메르시에와 스퍼버는 사회성이 뛰어난 인간이 자신의 번영을 위해 적응을 거치며 추론 능력을 진화시켰다고 설명합니다. 때로 “지능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마음은 이상하거나 어리석은, 심지어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도록 설계된 것 같지만, 반대로 “사회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마음은 협동에 최적화돼 있다는 겁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잘 알려진 기제를 생각해 봅시다. 확증 편향이란 사람들이 자신이 기존에 믿는 바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 하고,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정보는 거부하는 편향을 말합니다. 인간의 수많은 비합리적인 사고 가운데 확증 편향만큼 잘 알려지고 잘 정리된 오류도 없을 겁니다. 확증 편향에 관한 실험만으로도 교과서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실험을 진행한 기관도 오늘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스탠퍼드대학교입니다. 연구진은 사형에 관한 의견이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에 참여한 학생의 절반은 사형이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사형에 찬성하는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사형의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며 사형에 반대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두 가지 연구 결과를 보여주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첫 번째 연구 결과는 사형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는 반대로 사형의 범죄 예방 효과가 거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연구의 상반되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사용한 데이터는 모두 흠결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마 짐작하셨겠지만, 데이터 자체를 미리 정해놓은 결론에 맞춰 실험을 위해 조작한 연구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두 가지 연구 모두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만큼 그럴듯하게 꾸민 연구였는데, 학생들의 평가는 평소 생각하던 바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사형 찬성론자들은 사형이 범죄 예방 효과가 높다는 연구가 훨씬 믿을 만하며 현실을 짚어낸 연구라고 평가한 반면, 범죄 예방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연구에 대해서는 형편없는 연구라고 혹평했습니다. 사형 반대론자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내놓았고요. 실험 마지막에 한 번 더 이 연구들에 관한 의견을 물었을 때는 견해 차이가 더 크게 갈렸습니다.


확증 편향 같은 심각한 오류를 안고 하는 추론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메르시에와 스퍼버는 만약에 쥐가 사람처럼 확증 편향에 빠져 생각한다면 어떨지 가정해보라고 말합니다. 혹시라도 ‘이 주변에 고양이가 있을 리가 없다.’라는 생각을 굳힌 쥐가 있다면, 그 쥐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끝내 부정한 대가로 이내 고양이의 한 끼 식사가 돼버리고 말 겁니다.


고양이를 신경 쓰지 않은 쥐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할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확증 편향에 빠진 사람들은 자연선택을 거쳤다면 그 수가 줄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대단히 심각한 확증 편향에 빠져있으면서도 개체를 보존하고 번성했습니다. 메르시어와 스퍼버는 확증 편향이 일종의 적응 기제로 작용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높은 사교성(hypersociability)과 관련해서 이런 확증 편향이 오히려 필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추론의 수수께끼』를 쓴 저자 두 명은 확증 편향이란 말보다 “우리 편 편향(myside bias)”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아무 때나 확신에 차 거짓에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남의 주장이나 다른 의견에는 아주 꼼꼼하게 약점을 잡아내고 비판할 줄 아는 사람도 자기주장에는 한없이 관대해지고 자기의 허점 혹은 결점을 찾을 때만 등잔 밑이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메르시에는 최근 유럽의 동료 학자들과 실험을 통해 이러한 이중잣대를 적나라하게 증명했습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먼저 몇 가지 간단한 추론 문제를 줍니다. 이어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답을 적어냈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했거나 잘못 생각한 부분을 발견하면 그들은 답을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가자 대부분은 처음 써낸 답을 그대로 고수했습니다. 답을 수정한 사람은 참가자의 15%도 안 됐습니다. 


다음 단계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같은 문제를 주고 그들이 써냈던 답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써낸 답도 같이 보여줬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답이 있을 수 있음을 직접 보여주고, 다시 한번 답을 수정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연구진이 쳐놓은 함정이 있었는데, 자신이 써낸 답이라고 주어진 답이 실은 다른 사람이 쓴 답이고, 다른 사람들의 답이라고 보여준 답변 가운데 자신이 쓴 답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답안지의 주인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참가자의 절반가량은 알아챘습니다. 그런데 연구진이 답안지를 일부러 슬쩍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머지 참가자는 다른 사람이 써낸 답(사실은 자기가 쓴 답)을 가혹하게 비판했습니다. 결국, 전체 참가자의 60%가량이 자기도 모른 채 태도를 180도 바꾼 셈이 됐습니다. 누워서 침 뱉기였죠.

메르시에와 스퍼버는 추론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진화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한쪽으로 의견이 치우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추론의 본래 목적은 우리 집단 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휩쓸리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는 겁니다.


수렵과 채집에 기대어 부족생활을 하던 우리 선조들은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에 신경을 썼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지위란 자기가 목숨 걸고 위험한 사냥에 나서는 사이 누군가는 동굴에서 편하게 유유자적하며 사냥감을 챙겨가기만 하는 상황을 막아주는 데 필요한 일종의 권력이자 하나의 견제 장치였습니다. 생존이 달린 문제에서 정확한 추론으로 논리를 앞세우는 건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논쟁에서 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사형의 범죄 예방 효과나 소방관의 자질을 정확히 추론하는 일은 당연히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유사 과학이나 가짜뉴스, 트위터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죠.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의 선조들이 개발한 추론이라는 기제가 오늘날 우리를 오도하는 건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메르시에와 스퍼버는 이렇게 썼습니다.

환경이 너무 빨리 변해서 자연선택 기제가 아직 작동하지 못한 사례가 아주 많은데 추론도 그 가운데 하나다.

브라운대학교의 스티븐 슬로만 교수와 콜로라도대학교의 필립 펀바흐 교수도 사회성 혹은 사교성이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핵심 열쇠라고 생각하는 인지과학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작동한다는 건 오류에 가까운 각종 편향을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그들은 함께 쓴 책 『지식의 환상: 왜 우리는 홀로 생각하지 않는가(The Knowledge Illusion: Why We Never Think Alone)』에서 화장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선진국 사람들은 수세식 화장실을 익히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물이 차 있는 자기 재질의 변기에 용변을 보고 나서 손잡이를 돌리거나 버튼을 누르면 용변과 함께 물이 내려가고, 그 물은 오물처리용 하수도를 통해 오물 처리시설로 가죠. 이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뻔한 것 같은데, 좀 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하나하나 원리를 따져가며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일대학교 연구진이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화장실이나 지퍼, 원통형 자물쇠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정확히 얼마나 알고 있는지 조사해 봤습니다. 이어 학생들은 각각의 장치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하나하나 단계별로 세세히 설명해야 했는데, 적잖은 학생들이 막상 그 과정을 설명하려고 해보니 자기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실제로 화장실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작동 원리는 훨씬 복잡합니다).


슬로만과 펀바흐 교수는 이 효과를 “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한 착각(illusion of explanatory depth)”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믿고 있죠. 그리고 우리가 그런 착각에 빠진 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 덕분입니다. 화장실의 예로 돌아가 볼까요? 내가 그 세세한 작동 원리까지는 몰라도 화장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군가가 수고를 들여 그렇게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전거? 어 뭐 대충 이런 느낌…?

사실 이렇게 다른 이의 전문성에 기대는 건 인간이라는 종이 아주 잘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함께 사냥하기 시작한 이래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에 기대 왔습니다. 이는 인류의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누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런 능력과 전문성을 모아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협동을 고도로 발전시킨 결과, 우리는 어디까지가 내가 온전히 이해하는 부분이고, 어디서부터는 우리 집단의 지식이자 다른 사람의 전공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개인의 생각이나 지식과 같은 집단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가르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경계가 없다는 것을 혼동이라고 쓸 수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이런 혼동이 진보를 이룩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줄 새로운 도구나 기술을 누군가 발명해내는 순간 그만큼 인류 전체에게는 무지의 영역이 생기는 셈입니다. 그런데 청동기가 되어 칼이라는 도구가 나타났는데, 모든 사람이 금속 주형의 원리를 알기 전까지는 칼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면 청동기 시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기술은 그 기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는 만큼만 활용하고 쓰는 사람들에 기대어 발전하기 마련합니다.


슬로만과 펀바흐 교수는 하지만 정치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화장실에서 변기에 물을 내리는 건 그 작동 원리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민자나 외국인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어서는 곤란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강제 병합했을 때 미국의 대응을 묻는 말에 우크라이나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군사 개입을 지지한다는 연구도 있었습니다.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가 어디 붙은 나라인지 몰라도 너무 몰랐는데 실제 우크라이나에서 사람들이 답한 위치까지 차이의 중간값이 무려 2,880km나 됐습니다(역주: 한국이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사이판을 찍은 셈입니다). 다른 분야에 관한 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의 얕은 지식과 근거 없는 강한 확신은 거의 비슷하게 항상 드러났습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대체로 어떤 현상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나 의견은 그 사안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기존 의견을 고수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오바마케어에 대한 당신의 의견이 근거 없는 선동에 기댄 것인데, 만약 제가 건강보험 문제만큼은 당신을 전문가라고 생각해 당신의 의견을 덮어놓고 따른다면 저 또한 근거 없는 선동에 휘둘리는 꼴이 됩니다. 그런 제가 자신 있게 친구인 톰에게 오바마 케어는 이런 것이라고 잘못된 지식을 전파해 심지어 그를 설득하면 이제는 톰도 선동에 휘말렸습니다.


그런데 선동에 휘말렸다는 건 까마득하게 모르거나 알고 싶지도 않은 상황에서 의견이 같은 사람이 적어도 주변에 나를 포함해 셋이나 있으니 이 주장은 틀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집니다. 나와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모조리 배척하고 무시해버리면 그렇게 결국 그 집단은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처럼 되고 마는 겁니다. 슬로만과 펀바흐 교수는 경고합니다.

지식 공동체에는 항상 독선과 아집의 공동체로 변모할 위험이 도사린다.

2012년, 앞서 언급한 화장실 실험에서 화장실을 공공 정책으로 바꾸어 비슷한 실험을 했는데, 실험에 참여한 이들에게 보편적 건강보험이나 교사 성과급 지급에 관한 찬반 의견을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체로 찬성이든 반대든 훨씬 극단적이고 적극적인 답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찬반 이전에 그 제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달라고 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자기가 사실 이 제도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뒤에 다시 한번 각 제도에 대한 찬반을 묻자 극단적인 답변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잘 모르니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저자들은 CNN 등 뉴스 채널에 24시간 나와서 온갖 사안에 관해 거들먹거리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안에 관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논쟁을 벌일 시간에 실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갖고 알아보면 극단적으로 부딪히는 듯한 견해 차이를 훨씬 줄일 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서 깨어나 사람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건 결국 사실, 진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과학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나 편향을 바로잡아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통제된 실험실에서는 우리편 편향이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한 실험 결과가 인정받으려면, 내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다른 실험실에서 같은 조건으로 실험을 재현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와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재현 가능성이 과학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연히 과학의 어느 분야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논쟁을 종결짓는 건 객관적인 방법론을 토대로 한 실험 결과입니다. 방법론이 뛰어나야 논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이 편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순간에도 과학은 진보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잭 고어만이 공중보건 전문가인 딸 사라 고어만과 쓴 책 『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도 있던 사실을 끝끝내 외면했는가(Denying to the Grave: Why We Ignore the Facts That Will Save us)』에서 저자는 과학이 내놓은 결론과 우리의 실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살펴봅니다. 이들은 백신이 위험하다고 굳게 믿으며 어떤 말로 설득하려 해도 귀를 닫고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처럼 그저 사실관계가 틀렸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논제를 믿는 이들을 분석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위험한 병균이나 물질로 백신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백신은 오히려 그런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자 접종하게 된 것이죠. 저자들은 “면역 체계를 밝혀내고 분석해낸 것은 현대 의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백신이 안전하다는 과학적인 연구가 아무리 많이 쏟아져도, 예방접종과 자폐증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아무리 되풀이해서 얘기해도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안아키 회원들의 심리도 이런 것이었다.

아예 귀를 닫고 있기 때문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하기는커녕 얘기를 꺼낼 수조차 없습니다(트럼프 대통령 부부는 아들 배런에게 예방접종을 했지만 소아과 의사가 권고한 일정대로 접종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백신을 거부하는 이들은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도 “대통령도 소아과 의사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해 이해하고 나머지 정보는 다 폐기합니다). 


고어만 부녀는 또 마치 스스로 바보라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경우도 앞서 그 생각이 굳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반드시 어느 시점에는 일종의 적응 기제가 작동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저자들은 확증 편향을 생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석했는데,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처리할 때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샘솟아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연구를 인용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사실이라고 믿더라도,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든든함과 편안함이 있다.

고어만 부녀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틀린 정보를 거르지 못하고, 어떻게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는지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고치려 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에게도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려면 백신 접종을 꼭 해야 하고, 총기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면 너도나도 총기를 소지하는 것보다 총기 소유를 규제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설득할 방법이 분명히 어딘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건네줘봤자, 사람들은 이미 마음과 귀를 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이 좀 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이는 과학적 사실을 널리 퍼뜨려 과학을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근본적인 목표에 어긋납니다. 책의 후반부에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유사과학, 잘못된 과학이 만들어낸 잘못된 정보를 믿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 수 있을지는 여전한 과제로 남는다.

원문: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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