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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아쉬웠던 시즌, 92년도의 빙그레 이글스

조회수 2017. 11. 10. 20: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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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스의 팀 역사상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여줬던 적은 1992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전 및 충청지역을 연고로 하여 1986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한 빙그레 이글스 (현, 한화 이글스). 당시로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주황색상에 줄무늬 유니폼을 채택하여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쉽사리 특성이 살아나지 않았던 쌍방울 레이더스에 비하면 이글스의 유니폼은 개성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1986시즌에 프로에 데뷔한 지 불과 세 번째 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해태-삼성의 양강구도를 뒤흔들어 놓은 팀. 과연 이 팀의 The most impressive season을 어느 시즌으로 선정할지에 대해 참으로 고민이 많았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이미지가 절정에 달하였던 1992시즌과 사상 처음으로 MVP와 신인왕을 휩쓴 류현진이라는 괴물 투수가 등장하고,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던 노장들을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시키며 골리앗 삼성을 상대로 다윗의 강한 저력을 보여줬던 2006시즌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물론 창단 이후 처음으로 패권을 거머쥐었던 1999시즌이 있었지만, 그 당시의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요소로는 데이비스, 로마이어라는 두 명의 용병선수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이 있다. 극심한 타고투저 현상으로 인해 10승대 투수들마저 4점대 방어율에 다다른 점, 그리고 우승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21만여 의 시즌 관중을 동원하여 관중동원에서 6위에 머무른 점은 도무지 인상적인 시즌에 넣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결국 1992시즌과 2006시즌을 놓고 고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관중동원 팩터에서 1992시즌의 입장 관중 380,391명은 2006년의 관중 수 244,664명을 압도하는 수치였다. 10,000명 남짓을 수용할 수 있는 초미니구장인 대전구장에 1992시즌 평균 6,038명의 관중이 입장했으니 연일 관중들로 대전구장이 들썩거렸음을 알 수 있다. (1992시즌에 남긴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은 2010시즌이 되서야 갱신되었으며, 새롭게 내야 관중석을 2층으로 리모델링하며 13,000석으로 증축한 2012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홈 관중 50만 명을 돌파하였다. (519,794명)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던 2015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홈 관중 60만 명을 넘어선다. 지난 시즌에도 대전구장은 홈 관중 60만 명을 넘어서며 야구 흥행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한다. 그러나 올 시즌 도중 흥행몰이의 중심이었던 김성근 감독이 중도 퇴진하면서 앞으로 대전구장이 지속적으로 관중들로 들어차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글스의 팀 역사상 페넌트레이스에 걸쳐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여줬던 적은 1992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상위권에 머물며 강한 전력을 과시했던 팀이지만 1992시즌은 투, 타에서 타 팀의 기를 뺏고도 남을만한 포스가 존재하였다.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고비 때마다 이글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타이거즈에게 내리 4게임을 내주며 다시 한번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 이글스는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3차전 퍼펙트게임을 눈앞에 두고 아쉽게 물러나야 했던 송진우, 4차전 선동렬을 상대로 터뜨린 강석천의 극적인 역전 2점 홈런… 결코 무기력하게 물러나지 않았던 이글스였기에 92시즌에는 무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결국 92시즌 페넌트레이스에서 그들은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우선 이글스의 가공할만한 92시즌 공격력부터 짚어본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시초를 열다

공격력은 왜 이글스가 지금도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불리는가를 몸소 입증한 시즌이었다. '다이너마이트 타선' 의 핵심은 대한민국 프로야구사에 '연습생 신화'를 최초로 창조한 장종훈이었다.


91시즌 35개의 홈런으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작성하며 생애 처음으로 리그 MVP를 거머쥐었던 장종훈. 그의 타격감은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상태였다. 92시즌에는 무려 41개의 공을 담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타점에서도 119타점을 쓸어 담아 자신이 91시즌에 세웠던 114타점을 넘어선다. 마치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장종훈은 자신에 의해 쓰여진 타격에 관한 기록들을 1년만에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한다. 장종훈의 119타점 기록은 96시즌 괴물처럼 등장한 박재홍도 97시즌 홈런 행진을 펼친 이승엽도 넘어서지 못한 채 7년 동안 유지되다가 타고투저가 절정에 달했던 99시즌에야 이승엽에 의해 경신되었다.


비록 선동열이라는 리그 최고의 거물 투수가 시즌 아웃된 상태였지만, 염종석이라는 걸출한 신인이 리그를 휩쓸었고 기존의 이강철, 조계현, 윤학길 등 쟁쟁한 투수들이 활약했기에 장종훈이 세운 기록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글스의 타선에는 장종훈만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그 최고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이정훈은 0.360의 타율로 2위 롯데의 박정태(0.335)를 멀찌감치 따돌리며 2년 연속 타격왕에 등극한다. 홈런, 타점에서 장종훈, 타율에선 이정훈이 90년대 초반 리그를 지배하며 가공할 만한 이글스 타선을 이끌어간다. 이정훈은 홈런도 25개나 기록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다.


이외에도 이강돈(타율 0.320, 홈런 13개), 강정길 (홈런 14개), 강석천 (홈런 12개) 등이 든든하게 뒷받침하며 '다이너마이트 타선' 전성시대를 이끌어간다.

공격력에서뿐만 아니라 투수력에서도 이글스의 막강한 지배력이 발휘되었다. 91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퍼펙트게임 달성 일보 직전까지 갔던 송진우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92시즌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인다. 정교한 제구력과 위력적인 강속구를 앞세워 선발,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는데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다승과 구원왕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한다. (19승 8패 17세이브 - 당시 구원왕은 세이브와 구원승을 합산한 포인트로 결정하였다) 기록으로만 보면 골든글러브 감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당시 이글스 감독이었던 김영덕은 당시 18승으로 이강철과 공동 다승왕을 예약해 놓았던 송진우를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되는 게임에 5회부터 구원등판하게 하여 승리를 챙기게 하는 추태(?)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92시즌 투수 골든글러브는 방어율 1위를 차지한 신인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감독으로서 팀의 전력을 극대화시키는 부분에서 김영덕 감독의 능력은 인정받을 만하지만, 삼성 감독 시절 한국시리즈 파트너 고르기를 위한 져주기 게임, 자기 팀 소속의 선수들의 기록을 노골적으로 챙겨주는 뻔뻔함 등은 결국 팬들에게 김영덕 감독의 이미지를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는 결국 동 시대에 같이 활약했던 김응용, 김성근, 김인식 감독 등은 명장으로 대접을 받는 반면 정작 본인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이룬 업적에 비해 푸대접(?)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송진우와 더불어 이글스 마운드를 이끌었던 주인공은 92시즌 새로 입단한 고졸루키 정민철이었다. 92시즌 자이언츠의 염종석, 돌핀스의 안병원과 더불어 고졸 신인 돌풍의 주역이었던 그는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95.2 이닝을 소화하며 1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8의 호성적으로 다승 6위, 평균자책점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입단 동기생 염종석의 활약이 너무나도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그의 활약이 빛에 가려졌지만, 이후 염종석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재활을 겪게 되지만 정민철은 2000년 요미우리에 진출하기 전까지 매 시즌(8시즌 연속) 두 자릿 수 승수를 기록하는 꾸준함을 과시한다. 이강철, 윤학길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화려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묵묵하게 자기 몫을 다한 장정순(14승), 이닝이터 한용덕(9승), 백전노장 이상군(현 한화 감독대행, 10승) 등이 활약하며 이글스 마운드를 견고하게 다져 놓았다.


투, 타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이글스는 페넌트레이스에서 사상 처음으로 80승을 돌파(81승)하며 리그 최강자로서의 위력을 떨친다. 당연히 대전구장은 연일 관중들로 넘쳐났다. 팀 창단 처음으로 3시즌 연속 총 관중 30만 명을 돌파하는 경사를 맞이한다.



막바지에서 허무하게 패권을 내주다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이글스는 항상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았던 타이거즈마저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우승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플레이오프에서 자이언츠가 타이거즈를 접전 끝에 3승 2패로 무너뜨리면서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되자 우승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자이언츠는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상황이라 체력소모가 큰 상황이었다. 그리고 페넌트레이스에서도 13승 5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상황이라 이글스의 자신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유독 포스트 시즌만 되면 없는 힘까지 발휘하는 자이언츠의 저력은 이글스가 페넌트레이스에서 보여줬던 압도적인 포스를 넘어설 정도였다. 염종석이라는 괴물 신인의 활약과 더불어 페넌트 레이스에서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박동희가 괴력의 강속구를 앞세워 이글스 타선을 압도한 것이다.


또한 1번 전준호 2번 이종운 3번 박정태 4번 김민호 5번 김응국으로 이어지는 자이언츠의 공격력은 이글스의 파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정교함에서 리그 최강의 위력을 보여줬는데 포스트 시즌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1번~5번의 막강타선에 노장 조성옥의 예상치 못한 맹활약까지 더해진 롯데의 공격력은 리그 최강의 이글스 마운드도 어찌 해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허무하게 롯데에게 92시즌 패권 자리를 내준 이글스. 그 허무함의 강도는 타이거즈라는 장벽 앞에 가로막혔을 때보다 더했던 것일까. 이후 93시즌 이글스의 투, 타의 중심축들은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종신감독설' 이라는 논란에 휩싸이던 김영덕 감독은 결국 93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리그 최강의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고도 정작 한국시리즈에서 멈춰 서고 말았던 이글스의 92시즌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아쉬웠던 시즌 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장종훈이라는 리그 최고의 파워히터가 남긴 족적은 지금까지도 이글스의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즌(The most impressive season)으로 기억될 것이다.

원문: 나루세의 不老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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