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병원 탐방기(記): 대학병원 응급실 편

조회수 2017. 11. 4. 19: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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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과연 도시 최고의 병원이 맞는 걸까?"

열과 간지러움, 붓기로 충만한 밤을 꾸역꾸역 산더미 같이 쌓인 약을 먹으며 버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도가 없었다. 병원을 다녀온 다음 날 오후가 될 때쯤에는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내가 아무 기척이 없어 걱정이 된 통역 친구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통역 친구는 내 상태를 보더니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야 할 거 같다고 이리저리 연락을 취했다.


‘응급실’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국에서도 안 가본 응급실을 외국에서, 그것도 중국에서 가게 될 줄이야.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말도 안 통하는 땅에 와서 응급실에 갈 정도로 아파야 하는가? 나 자신이 애처롭고 불쌍했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약해진다.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고 주섬주섬 준비를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통역 친구와 함께 한 사람이 더 서 있다. 지난번처럼 한국 노동자들의 생활 전반을 담당해주는 중국 직원이었다. 한국 본사와의 계약이 있어서 아무 병원에나 데려갈 순 없고 이 도시에서 제일 크다는 대학 병원에 데려간다고 했다.


그 계약, 그렇게 열심히 지켜 줄 거면 애초에 약속한 대로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에 보내주고, 먼지와 곰팡이 없는 깔끔한 호텔에 묵게 하고 일도 적당히 시켰으면 응급실 갈 일이 안 생기잖아!!!!라고 속으로 소리 없이 아우성을 쳤다. 왜냐하면 나는 힘없는 외노자 신세니까.


10여 분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외관은 한국의 대학병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륙답게 뭐든 스케일이 어마무시하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니 나의 눈을 의심케 하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열악한 시설, 위생적이지 않은 환경, 비합리적인 시스템 등등 단적인 예로 환자들이 의자에 앉아 링거를 맞고 있다. 통역 친구에게 물어보니 병상이 여유가 없어서 링거를 맞는 건 이렇게 앉아서 맞는 게 일상적이라고 했다.


이곳이 진정 이 도시 최고의 병원이 맞는 걸까? 응급실도 예치금을 넣은 진료 카드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통역 친구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후 난 응급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지난번 군인병원이 70년대 풍경이었다면 이 대학병원은 90년대 진료실의 풍경이다. 20년이나 타임워프를 했는데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21세기인데...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


담당의사를 마주하는 순간 의료진을 향한 신뢰도가 바닥을 찍었다. 중국인들의 위생관념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걸 8개월의 근무 기간 동안 충분히 몸소 체험했다. 그래서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그 어떤 사람들보다 위생에 철저해야 할 의료진들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며칠을 못 씻었는지 머리는 떡이 져 있고 손톱은 여자인 내 손톱보다 길었다. 저 의사한테 진료를 받았다가는 없는 병도 더 생길 거 같았다.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외노자로 죽지 않고 살려면 이런 의사라도 진료는 받아야 했다.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지쳤는지 영혼 없이 환자들을 보던 시니컬한 의사. 그는 나와 통역이 한국어로 대화하는 걸 보곤 신기함에 한마디를 던진다. "안녕하세요~”라며 어색한 한국말로 인사를 하곤 환하게 웃는다. 이게 다 한류 덕이다. 북경, 상해처럼 외국인이 흔한 도시가 아니어서인지 이 도시에서 한국인은 늘 환영을 받는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작은 친절 덕분에 한껏 날 선 마음이 누그러졌다.


내 상태를 보더니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또 이리저리 검사실로 불려 다녔다.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피검사도 하고, 복부 초음파도 하고 각종 검사실을 팽이처럼 돌고 돌았다. 두 시간쯤 검사를 받고 기다리기를 한참… 다시 그 의사 앞에 앉았다. 그때쯤엔 정말 쓰러질 기운도 없는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탈출하려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의사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병명은 '알레르기 약으로 인한 쇼크'. 아 이건 뭐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 삼간다 태우게 된 거다. 우선 당장 뭘 하는 것보다 처방해준 약을 먹고 무조건 쉬라고 한다. 약만 먹어도 배부를 만큼 엄청난 양의 약을 처방해준 군인병원 여의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또 한 뭉텅이 약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약 때문에 쇼크가 왔는데 또 약을 한 뭉치 처방해준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중국 병원이 원래 약을 과다 처방한다는 얘긴 들었지만 많아도 많아도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중국 측 직원은 호텔을 옮길 수 없다고 했다. 돈 때문이라면 내가 내 돈 내고 호텔을 옮기고 싶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자신들은 한국분들의 중국 생활에 모든 책임이 있는데 자신들이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의 호텔로 가면 무슨 일이 생겨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병의 원인도 알고 해결 방법도 알지만 그놈의 계약과 절차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망할!


이 상황이 짜증 나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열이 나는데 소위 빵까지 더해져 열이 펄펄 끓었다. 중국 병원들에서 준 약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꼴도 보기 싫어 약을 한구석에 밀어 두고 아무것도 안 했다. 침대에 몸을 박제하고 태업 아닌 태업에 들어갔다. 몸이 정상이 되기 전까지 무리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살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해열제만 시간 맞춰 먹었다. 한 3일을 앓고 나니 서서히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3주 후쯤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사무실로 복귀하니 내 책상 위엔 팀원 중 한 분이 선사한 '쾌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알레르기 사건(?)으로 인해 나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중국 병원을 드나들면서 나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위생적이고 친절한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아프면 서럽다. 특히 외국에서 아프면 그 서러움과 답답함이 수천 수백 배에 달한다는 사실. 그 누구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건 아니겠지만 해외에서는 절대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사건 이후 해외에 갈 때면 나의 비상약 주머니는 좀 더 묵직해졌다. 낯선 땅에서 병원에 간다는 일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힘이 든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국땅에서 겪는 다양한 서러움 중에 제일은 역시 홀로 아픈 서러움이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선글라스 쓴 그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아프지 말자. 우리 모두. 특히 해외에서는.


특히 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에서 외노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아프지 않길 빈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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