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정희 신화'가 가지는 의미

조회수 2017. 11. 1.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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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이 신화가 무엇이냐가 우리의 현재 경험을 결정짓는다
출처: 영화 <반지의 제왕> 중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한때 <안좋은 추억> 시리즈가 유행한 적이 있다. 개그맨 정준하는 왜 떡국을 기억 못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떡국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고, 왜 개구리를 싫어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개구리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리도 모두 좋건 안 좋건 자기만의 추억을 한두 개씩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 데이빗 엘킨드는 이런 자기만의 추억을 ‘개인적 우화’라고 불렀다. 


내가 어떻게 연애에 성공하거나 실패했는지, 내가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거나 낙방했는지, 내가 어떻게 직업을 찾고 어떻게 그 직업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같은 것들이 모두 이 개인적 우화다. 술자리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나 가끔 흘릴 뿐, 남들에겐 잘 하지 않는 나만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우화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로또 당첨자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주에 상서롭지 않은 꿈을 꿨거나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누구는 불나는 꿈을 꿨다고 하고, 누구는 똑같은 번호의 버스가 연달아 오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이나 경험이 로또 당첨을 설명해 주는 개인적 우화가 된다.


그런데 사실은 이상한 꿈 때문에 로또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되니까 지난밤 꿈이 이상해 보이는 게 더 맞다. 생각해 보라. 꿈치고 이상하지 않은 꿈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진짜 이상한 꿈을 꿨다 싶어서 복권 샀는데 꽝인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최소한 일주일에 수백만 명이 그렇게 이상한 꿈을 꿨다는 이유로 복권을 살 것이다. 모든 꿈은 다들 어딘가 이상하지만 우리는 그런 꿈을 꾸면서도 별일 없으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나중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지난번 꿈도 덩달아 특별해진다.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실제 사건의 세부사항 중에 어떤 것은 생략되고 어떤 것은 덧붙여지면서 결국 실제 사건의 본질은 왜곡되어 버린다. 사건이 개인적 우화로 바뀌는 과정이다.


그런데 어떤 개인적 우화는 한 개인만이 간직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러다 보면 개인적 우화가 아니라 전설과 신화가 된다.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 신화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가면 갈수록 더 대단한 대통령이 되어간다. 사람들은 그가 없었으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불가능했었고, 그가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오래전에 공산당 국가가 되었을 거고, 심지어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핵보유국이 되었을 거라고들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던가? 박정희 때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고 고속도로를 깔기 시작한 것은 맞지만, 그 계획은 박정희가 말아먹은 장면 정부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박정희 때는 늘 무역적자에 시달렸으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열심히 차관을 빌려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치금융과 관치경영의 기초를 닦았고, 지역감정을 뿌려놓았으며, 군사문화를 뿌리박아 놓아서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아, 박정희…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결코 박정희 신화를 무너트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신화가 된 이유는 경제의 기적을 일으켜서도, 조국 근대화를 이루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의 일생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는 현재를 가장 극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별 둘짜리 장교가 나라를 집어삼키고, 수십 년간 권력을 유지했으며, 그 집권 기간 동안 우리나라 현대사의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점이 바로 그를 전설로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성세대들이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그 어떤 사소한 경험도 그걸 박정희와 연결짓는 순간 더 이상 사소한 개인사가 아니라 거대한 전설의 한 줄기로 의미가 격상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 그 자체는 일어나자마자 흩어져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즉 우리 마음대로 그 사건을 해석하고 덧붙인 개인적 우화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 단위에서 정리된 과거들만으로는 사회가 구성되고 작동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공동체는 구성원들의 과거 기억을 통합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건 결국 개개인의 우화가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에 전승되는 전설의 형태로 통합되고, 그 전설은 다시 그 집단들이 뭉친 국가의 신화가 되는 과정이다. 이게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는 말의 뜻이다.


이 이야기, 이 신화가 무엇이냐가 우리의 현재 경험을 결정짓는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국가적 단위의 신화보다는 부족단위의 전설들만 있는 거 같다. 최소한 두 개 부족의 전설이 이 나라를 지배한다.


한쪽 전설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 우리나라가 빨갱이들에게 함락되기 직전이라고 여기고, 또 다른 전설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가 이전에 비해서 그래도 좀 더 합리적인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여긴다.


나 역시 이 이 두 부족민중 한명인데, 한쪽 부족민의 입장에서 나는 도무지 상대 부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세대갈등이니 386이니 코드니 하는 얘기가 오간다.


결국 문제는 전설의 통합이다. 박정희 전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는 일. 그게 이 골 때리는 현시국에서 미친 짓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 거다.


원문 : 싸이코짱가의 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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