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의사, 투표로 의대에 들어가다

조회수 2017. 10. 3. 19: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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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여성 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그녀가 의과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입학을 결정하기 위해서 의과 학생들이 투표를 하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차별과 기회의 평등에 대한 역사로서, 또한 페미니즘적 관점으로서 이해하면 좋은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여성 의사와 의대 투표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849년 미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사람입니다. 블랙웰이 최초의 공식 전문의가 된 것은 여권신장 뿐 아니라,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차별에서 기회의 평등을 만들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큽니다. 그 이전까지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유리천장이 매우 높아서 여자가 의사처럼 막중한 책임감이 필요한 직업을 갖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도전한 사람이 엘리자베스 블랙웰과 그 동생 에밀리 블랙웰입니다. 이 에밀리도 세 번째 여성 의사가 되었습니다.

출처: Joseph Stanley Kozlowski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초상화. 양성 불평등의 유리천장을 이겨내고 첫 번째 여성 의사가 되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학생들의 찬반 투표를 받은 일화가 유명하다.

블랙웰은 어릴 적 ‘해리엇 빗처 스토우’를 만나 여자도 꿈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스토우는 유명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여성 소설가입니다. 이 소설은 노예 문제를 제기하여 미국이 흑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노예해방의 문을 여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 동생 에밀리도 그런 언니를 보면서 양성평등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엘리자베스 블랙웰에게 큰 도움을 주면서 병원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의사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해 온 그녀에게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는 길을 쉽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이 입학하려던 대학들은 여자가 의대에 들어온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847년 뉴욕의 ‘제네바 의과대학’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재학생들도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서 입학을 결정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어차피 투표에서 부결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공평한 모양새를 만들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출처: findagrave.com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동생 에밀리 블랙웰. 여자가 의대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시대에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세 번째 여성 의사가 되었다. 언니와 함께 병원사업 등을 하였다.

그러나 재학생들은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일부는 장난삼아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쨌든 투표는 민주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의외의 찬성 속에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의대 생활은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습니다. 몇몇 보수적인 사람들은 해부학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지만,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그녀를 누나처럼 따르며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뉴욕 제네바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탄생하던 순간입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


블랙웰의 국적은 영국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 등에서 활동하다가 영국에 가서 사망했습니다. 어릴 때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가정에는 무려 9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매우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 딸 차이를 두지 않고 가정교사를 고용해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한 종류인 ‘퀘이커교’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교는 영국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출처: Thomas Rowlandson
퀘이커교의 예배 모습.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 종교는 명상을 하고 사회를 위해 선을 행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10대 초반에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블랙웰 가족은 이곳저곳을 이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언니인 안나, 매리언과 함께 작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사가 될 꿈을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의학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정식으로 의대에 진학할 계획이었지만, 당시의 대학들은 성차별이 심해서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녀가 제네바 의대에 입학하는 것도 주민들은 놀라워하며 쳐다봤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원들은 그녀를 의사로 취업시켜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프랑스 등으로 산부인과 연수를 돌았습니다.


하지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신생아를 돌보던 중 임질성 안염에 감염되어 안구 제거 수술을 받은 것이지요. 다시 뉴욕에 돌아왔지만 역시 취업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어린이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미상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노년의 모습. 빈민가의 아이를 양녀로 들여서 여생을 마칠 때까지 함께 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그녀가 기르던 강아지들과 촬영했다. 일종의 가족사진인 셈이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여러 사회활동을 하였습니다. 빈민 진료소를 열었고 동생 에밀리와 함께 여성의과대학도 설립했습니다.


영국에서 친분을 쌓은 ‘나이팅게일’과 함께 ‘국립보건협회’를 창설한 뒤, 여성 의과학교도 설립했습니다. 특히 남북전쟁 중의 활약은 매우 뛰어나서, 구호협회를 창립하여 미국보건위생위원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의사로서 여성 인권의 향상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는 많은 일을 하여, 후대의 의대생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퀘이커 교도의 이야기


미국은 인권선진국처럼 보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치 투표에 있어서 흑인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870년입니다. 그런데 여성참정권은 그 보다고 훨씬 후인 1920년에야 가능했습니다. 그만큼 보수적인 국가란 뜻입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부모는 퀘이커교도였습니다. 기독교의 청도교 중에서도 좌파인 퀘이커교는 다른 교파와 달리, 인간 내면에는 선한 면이 있으므로 이를 잘 길러내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출처: 국립의학도서관
뉴욕 제네바 의과대학의 공고. 아래쪽을 보면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이름이 보인다.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기 위해 찬반 투표를 통해 입학하는 역사가 담긴 공문이다.

그래서 퀘이커교는 선한 일을 위해서 노예해방, 여성권익 등에 적극적이었고, 종교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도 퀘이커교를 믿었기 때문에 노예해방과 여성 인권 등을 지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 봉사적 가정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기에, 그녀는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어 남북전쟁 때 부상병을 보호하는 봉사를 하고, 빈민 진료를 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원문: 키스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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