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우원재의 우울함이 필요한 이유

조회수 2017. 9. 18. 10: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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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늘을 이야기한다.

국문과 학부생 시절, 과제를 위해 김이설의 『나쁜 피』를 읽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을 느끼면서 책을 덮었다. 너무 힘든 독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읽고 나니 감기를 앓다 나은 것 같은 개운함이 느껴졌다. 등장인물의 가난과 모녀 갈등처럼 나도 가난에 시달렸고 엄마와 갈등을 겪었다. 괜히 내 삶이 이해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 왜 ‘우울한 예술’이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프리다칼로의 자전적 그림, <상처 입은 사슴>

생각보해면 도전, 의지, 열정이란 단어로 강요됐던 청년 3종 세트는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와서 “너 여기서 뭐 해? 너 아프구나. 청춘 때는 원래 그래. 그렇지만 빨리 나가야지”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20대 중반 때, 우울함을 견디다 방문한 병원의 의사도 그랬다. “민지 씨 나이 환자들이 많이 와요. 근데 민지 씨 나이 때는 친구들이랑 클럽 가고 치맥 몇 번 먹으면 해결될 수 있는데” 그러면서 의사는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말로 나의 고민을 가볍게 취급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힘없이 앉아 있는 이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가면서 엉덩이를 발로 차 버리면서 혹시라도 행동이 굼뜨면 “정신이 나약하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나 우울증 걸리는 거야”라고 소리만 지르는 것이 내가 경험했고, 사회가 허락한 긍정이었다.

20대 초반의 홍대 대학생.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부분 젊고 활기차고 밝은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주말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연애도 하고, 방학이면 엠티도 가고, 인스타그램엔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만 올라와 있을 것 같은, 그런 합의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여기, 사회적으로 합의된 20대의 모습이 아니라 우울함에 대해 정면으로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말이다. 한여름에 털비니를 눈 바로 위까지 뒤집어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메라와 관객을 노려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죽고 싶다, 나 약 먹는다, 이게 내 삶을 설명한다. 이토록 솔직한 가사가 있을까? 그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어둡다. 우울하다. 기분 나쁘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말이다. 우울한 적 있으면서, 왜 우울한 음악을 하면 면 부정적인 말을 돌려받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런 취급은 모든 정서적인 호소에 해당된다. 조금이라도 ‘앓는 소리’를 하면 우리에게 어떤 말이 돌아왔던가. 널 사랑하는 부모님을 생각해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더라. 죽을 용기로 살아라. 그늘에서 힘없이 주저앉은 우리를 억지로 끌어내는 말들뿐이다.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인생을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게 버거울 때가 많았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바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만 했는데 스무 살이 넘고 나니 나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게 버거웠다. 우원재의 가사처럼 내가 주인공인 내 삶이 비극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페이스북에 비 오고 어두운 날이 좋다고 쓰니 교수님이 댓글을 달았다. “민지는 뛰어다니기 좋은 봄 날씨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라고 말이다. 어른들이 원하고 바라는 젊은이의 모습은 대체로 이럴 것이다. 그러나 우원재는, 많은 20대는 그렇지 않다.


어른들이 상상하는 젊은이의 모습과 다른 우원재는 많은 20대가 지나가고 앉아 있는 그늘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 우울한 예술은 그늘 밑 사람의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의 마음을 안다고. 세상 정말 좆같지 않냐고. 우리는 어쩌면, 시덥잖은 말 몇 마디보다 그늘 밑에 같이 앉아 주는, 내 마음을 알 것 같은 이가 있어 주길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꺼려지는 사회에서 우울함을 이야기하는 젊은 예술가의 등장이 기쁘다. 더군다나, 나는 돈 많고, 여자들은 그런 나를 좋아한다는 가사가 쏟아지는 힙합 씬에서 나타났다는 점이 더욱 반갑다.


좀 더 우울한 예술이 넘치기를 바란다. 그 예술들은 우울함을 벗어나자고 굳이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 예술들을 통해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나’를 내가 견뎌낼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


원문: TWENTIES TIMELINE / 필자: 하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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