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왜 읽어야 하나?

조회수 2017. 8. 31. 2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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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를 위해서는 결국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사람들 정말 책 안 읽는다. 페북을 보면 책 소개가 넘쳐나고, 신문 서평기사가 늘 링크되고, 페친들이 저마다 지금 읽는 책 사진을 올리며 인용을 하곤 하니 꽤나 열심히들 읽는다는 착시에 빠진다. 그러나 이 가상현실(?)이 아닌 오프에서는 정말 책들 안 읽는다.


나만 해도 그렇다. 모르는 분들은 책깨나 읽는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늘상 읽는 것은 그냥 텍스트들이지 매일 책 자체를 읽어대는 것은 아니다. 원고 읽고 편집참고용 책 읽고 그밖에 잡다한 텍스트들을 끼고 살아도 정작 제대로 읽는 책은 한 달에 한두 권쯤 되려나. 그것도 늘 쥐파먹듯이 읽다가 집어치우고 다른 책을 집어드니 머릿속에 정리되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오늘 오랜만에 서점에 가보니 그래도 사람들이 꽤 있어서 므흣하긴 했다만, 그 서점 옆에 있는 쇼핑몰에는 무색할 정도로 사람이 더 많더라. 모두가 물건을 산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설령 냉방이 필요해서라고 해도 사람들에게는 서점 냉방보다 백화점 냉방이 더 좋은가?



1.


책읽기에 대해서는 나도 몇 가지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책은 여느 소비상품과 다르다. 더 멋지고 가치있고 죽여주고…, 그런 얘기가 아니다. 책은 소비 자체가 일종의 생산적 활동을 요하는 상품이다. (아쭈,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제법 멋진걸?) 여느 소비상품처럼 돈 내고 구입하는 것으로 소비가 성립되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상품은 1천 피스짜리 조각맞추기 퍼즐 같다. 지불하는 책값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소비행위가 완성되는 상품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점을 안다. 읽는 것이 힘드니까 아예 안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책만 살 수도 없다.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니까. 한 번 읽고 휙 치워버리는 책에 대해서는 또 본전 생각이 난다.


그러므로 책은 자꾸만 골수취미 상품이 된다. 갈수록 그것을 잘 쓸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열광하는 덕질의 대상이 되어간다. 확실히 책의 깊고 복잡한 의미연관을 너무 머리 쓰지 않고 쉽게 파악하려면 기초체력이 필요하다. 심지어 기초체력을 얼마간 가지고 있다 해도, 생소한 분야, 새로운 주장을 담은 책들은 꽤나 신경을 집중하여 논지를 따라가야 한다. 책은 훈련된 오덕들이나 즐기는 기호품인 것이다.



2.


글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책 읽기에도 뮤즈가 찾아올 때가 있다. 뮤즈들은 우리의 문화생활, 정신생활에 꼭 필요한 존재다. 뮤즈가 언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찾아오고, 혼잡한 지하철 안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어쨌건 뮤즈가 왕림하시면, 머리는 생기가 돌고 생각이 나래를 펼치며, 책을 보면 행간의 의미와 전개의 틀이 한 눈에 보이고, 모든 문장이 화살처럼 날아와 머리에 마구 박힌다. 졸라 흥미진진하게 몰입을 하다보면 시간이 무릉도원에 간 어부의 그것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개입’이 일어난다. 나는 책에 개입된다.


이런 시간을 자주 갖는 게 중요하다. 아니, 이런 시간을 일부러라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불과 10~20분으로는 뮤즈가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차없이 떠나버린다. 뮤즈가 등을 떠밀어 번득이는 욕구가 일어날 때, 그때는 책을 잡고 어딘가 앉아서 고개를 처박아야 할 때다. 그러나 이 바쁜 나날에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그러니 정말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당연하지. 이번 주에 들어 나는 조금 힘겨웠던 원고를 다 읽어치우고 생각을 정리하여 저자와 새책 계약을 맺었다. 게다가 신간이 한 권 출간되어 조금 번다한 후속업무까지 일단락지었다. 그러고나니 한결 마음이 한적하고 평화로워진 나머지, 우리 편집장과 함께 또 새 기획 아이디어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이렇게 마음이 한가로우니 자연스레 책도 잡게 된다. 오늘 새 책을 잡기 시작해서 금방 절반을 읽어치웠다. 사놓고 안 읽은 책을 서가에서 주루룩 일별하면서 무엇을 잡을지 또 궁리한다. 더구나 내일은 주말 아닌가. 덩어리 시간이 앞에 놓여 있다.



3.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들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틈만 나면 게임이요, 또래친구들과 어울려 으슥한 아파트놀이터에서 낄낄대며 시간을 죽이는 것은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거다. 학교에 지치고 학원에 지치고 과제에 부모 잔소리에… 아이들은 바쁘다. 바쁜 일과에 겨우 자투리 시간이 났는데,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할까? 여자애들은 분식집에 몰려다니고 남자애들은 게임이나 하며 푼다. 무슨 책 따위를!


이놈의 교육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아니, 이런 교육시스템이 강화될수록 골이 텅텅 빈 아이들이 늘어날 것이고, 무슨무슨 명문대를 간다 해도 단톡방에서 여학우 따먹기 농담이나 늘어놓으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젊은 한남충들만 또 늘어날 것이다. 반지성이 무슨 훈장이나 되는 듯이 유치하고 조잡한 논리를 내세워 목청과 힘으로 싸우려 드는 반달리즘이 횡행할 것이다.



4.


그러잖아도 책과 교양을 위협하는 경쟁자들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게임, 영화, 드라마, 인터넷… 86세대들이여, “우리 땐 말이야”라며 자랑하지 말라. 사실 우리 때는 아이들에게 시간이 많았다. 실컷 놀아도 시간이 남아서 할 수 없이 책을 읽었다. 책은 흔하지 않았지만 어른들 읽는 것까지 가져다가 몇 번씩 거듭해 읽었다. 뭐 다른 일을 할 게 있어야지…


나는 어느 여름방학 때 친구집에 있는 열 몇 권짜리 전집류(초등학생에게 무슨 헤르만 헤세의 책이나 세계명작류를 다이제스트로 꾸며놓은 것도 있었다)를 우리집에 있는 한국문학 무슨 전집과 한권씩 바꿔 읽으며 한 여름을 보낸 적도 있다. 그게 뭐 별 것도 아니었다. 여름방학 내내 시원한 집에서 배깔고 누워 뒤적이면 최고였다.

그러던 86들도 먹고산다는 핑계로 30대 무렵부터는 책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피곤하다, 힘들다 핑계 대며 왼종일 소파에서 드라마, 야구중계나 보면서 차츰 머리가 굳고 눈이 어두워지고 만다. 초중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녀석들을 보면, 여전히 책 읽는 놈은 손가락으로 꼽기가 어렵다. 학자가 된 친구들이나 여전히 공부하고 책을 읽을 뿐이다.


아참, 학자? 따져보면 이 치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전공분야나 읽지 조금 다른 분야와 요즘 세상에 화제 되는 주제의 책들을 이야기해보면 깜깜 무소식이다. 논문을 써대느라 그밖에는 아는 게 없다. 책 안 읽는 건 결국 똑같다. 밖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불리지만.



5.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을 굳이 읽어야 할 이유는 또 뭐람? 하는 생각도 든다. 지성이 존경받는 시대도 아니고, 지적 허영이나 충족시킬 목적이 아니라면 세상에 쓸데 없는 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TV와 신문에 등장하여 누가 들어도 헛소리에 분명한 얘기들을 부끄러움 하나 없이 늘어놓는 그 ‘전문가’ 하며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을 보면 말이지.


이번 주초였나? 매경의 1면을 장식한 주간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쓴, “김영란법으로 언론이 모욕감을 느낀다”는 기사를 보면, 이들 가짜 지식분자들의 수법이 고스란히 눈에 잡힌다.

출처: MK NEWS

이자들은 자기들만이 아는 무슨 현란한 이치 같은 것을 들이민다. 반드시 외국사람 이름이 붙은 무슨 ~이론 또는 ~법칙을 들어야 한다. 아무도 모르고 저만 아는 얘기니까, 사람들은 뭔가 있나부다 착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또 어디 먼나라에서 있었던, 그 나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사건을 들이민다. 반드시 유럽 선진국의 일이어야 한다. 그런 훌륭한 나라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같은 결론을 맺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권위의 오류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면서 이용한다. 너까짓것들이 이런 얘기를 알 턱이 없지. 그러니 내맘대로 갖다붙여도 믿을 거야! 정말로 그런 사건의 진짜 맥락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고, 필자가 끌어다 붙이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는 논리다. 이들은 매우 그럴싸한 궤변을 꾸며댄다. 예의 매경 1면에서는 ‘공직’과 ‘공공성’은 다르다는 논지를 만들더라. 공직은 세금으로 보수를 받는 자리이니까 청렴해야 하고 감시가 필요하지만, 공공성을 (빛나는 의무감에 의해) 떠맡은 이들은 그들의 양심에 맡겨야 하고, 그 공공성을 위해서는 사회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던가… 하여간 개수작이다. “나는 엘리트요 계몽의 필봉을 수호하는 존재인데, 씨파, 왜 우리를 쓰레기 관료, 정치인들과 똑같이 취급해!” 요약하면 이런 말이랄까.


그러나 현란한 논리와 사례와 무슨 외래어 붙은 법칙을 버무려 놓으면, 원재료의 맛은 알 수가 없고 양념 범벅으로 뭐가 뭔지 모를 맛만 남는 법이다. 읽는 사람들은 지금 먹는 것이 쓰레기인지 무엇인지 분간이 안 된다. 이들 식자의 지성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범인들도 다 안다. 이런 걸 읽다보면 느낌적 느낌으로 ‘개소리’인 줄 직감하는 것이다. 그들의 지성은 또 한 번 역겨움을 불러 일으키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지성’이란 것 자체가 통째로 의심을 받는다.

씨팔, 배웠다는 색휘들이 저 모양인데 무슨 지성과 교양 나부랭이야!



6.


그러나 역사적으로 지성은 이런 식으로 사용된 적이 훨씬 많았지 제대로 사용된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수많은 법률가, 종교인, 학자… 유럽의 중세와 근대, 한국의 봉건질서 안에서 그 훌륭한 지식분자들이 이룬 게 뭐람. 예나 지금이나 무지랭이 평민들은 책깨나 읽은 놈들에게 늘 치이고 속아 살아오기만 했으니, 이제는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더 심해졌다.


이런 가짜 지식인들을 보면 책과 지성은 무기가 아니라 흉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즉 반성적 의식과 비판적 의식을 키우지 않는 책읽기는 위험천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한쪽에는 검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화된 도구적 지성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대항적 지식, 저항적 지성이 있다고 해야겠다. 나는 그저 책읽기의 올바른 효용은 “분별심”을 키우는 데 있는 게 아닌가 본다. 뭐가 뭔지 분간해내는 능력. 표면의 현상을 걷어내고 한꺼풀 아래 감춰진 사실을 길어올리는 능력. 이것은 대항적 지식이 된다.


이런 분별심과 올바른 지성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책, 하나는 생각과 경험… 책은 좀 쉽다. 좋은 책을 열심히 읽으면 생각이 깊어지고 사물에 감춰진 내막이 보인다. 반면 생각과 경험은 모두가 하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똑같은 교육을 받고 유사한 환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며 자라고 나이가 들었는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극과 극인가.

밀양을 보며, 그리고 이즈음은 성주의 주민들을 보면서, 삶에 닥친 경험의 의미를 길어올릴 줄 아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히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책은 읽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경험에서조차 배우지 못하는 사람, 생각과 고민에 빠져 고독한 시간을 보낼 줄 모르는 사람, 자기만의 내적 공간을 확보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백약이 소용없다. 이런 사람들이 어렵고 복잡한 논리와 지식의 기교를 배우면 이제 위험천만한 존재들이 탄생한다. 개돼지론의 주창자들, 공감불능의 괴물들이 되는 것이다.


말과 글의 능력이 반드시 칭찬받아야 할 능력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과 글조차 깊은 공감력 없이 책에 쓰인 상투어만을 통해 배운 이들은, 저 푸른기와집에 앉은 괴물처럼 된다. ‘조실부모’와 ‘사드’가 하나로 연결되어도 전혀 문제를 못 느끼는 세계관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7.


책을 읽든지, 생각을 하든지, 경험에서 배우든지, 뭐든 하고보자. 몰지성이 자랑은 아니요, 저만 아는 책읽기도 자랑이 아니다. 하여튼 아리송하다. 사람은 왜 다르게 자라는가? 학벌이나 경험과 능력이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왜 시골 할매의 지혜보다 못할 수 있나?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잠이 안 와서 몇 문장을 쓰다보니 주절이주절이 말이 길어졌다. 뮤즈가 잠시 찾아온 시간이었나보다.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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