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고 싶다

조회수 2017. 8. 30.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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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당연한 심정일 것이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잤더니 피부가 엉망이다. 번들거리는 뺨에 클렌징크림을 찍어 바르고 문질러댔지만 업무와 회식이 만들어낸 고단함은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양치를 하는 동안 머리를 감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간을 확인하곤 포기해버렸다.

<서유미 ‘당분간 인간’을 읽다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가 온다. 장마철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좀 질린다. 지난 주말 내내 비가 와 핑계 삼아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 콕 박혀 있었다. 마침 세 식구 모두 감기에 걸려서 컨디션도 안 좋았다. 느릿느릿 세탁기는 돌아가고 빗소리는 우렁찼다.

갑자기 비가 너무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소리 지르듯 대화를 해야 하기도 했다. 세수도 하지 않고 양치질만 대충 한 채 아점을 먹고 셋이 한 침대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잠에서 깬 아이는 심심해하면서 장난감을 갖고 내 앞으로 와 역할 놀이를 (내 의사와 상관없이) 슬쩍 시작한다.


나는 애니메이션 ‘출동! 슈퍼윙스’의 ‘미나’가 되어 주인공 ‘호기’(주인공은 아들이 맡는다)를 상대했다. 주로 하는 대화는 “호기야 밥 먹었니?” “호기야 어디 갔다 왔어?” “호기야 엄마 보고 싶었니?”처럼 상황과 시기에 적절하지 않은 성의 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그저 아이가 대답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물어보면 그만이다. 그도 그럴 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엔 마음대로 넘어가 버린다. 목소리를 낭랑하게 만들며 아이에게 질문할 때마다 아이는 진지하게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풀가동되는 내가 버겁다


어릴 적 나는 심심한 아이였다. 돌이켜 보면 늘 혼자 놀기를 좋아했고 어쩌다 친구들과 놀아도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가 전부였다.


술래잡기나 자전거 타기 같이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것엔 관심이 적었다. 그마저도 혼자가 편했다. 심심한 아이였지만 심심해서 심심하다고 울적해 하지 않았다.


사실 심심했지만 심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엔 내가 심심한 아이처럼 비칠지라도 나는 그 심심함 속에서 재미를 찾았던 것 같다.


그러니 별로 부모나 형제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였다. (아이를 키우는 처지가 되니 우리 엄마는 나 키우기 쉬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혼자 놀면 혼잣말을 많이 하게 된다.


어릴 적 나 또한 일인 다역을 했다. 엄마는 물론 아빠, 언니, 선생님 역할까지 도맡아 했다. 일하는 엄마를 둔 덕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별 제약 없이 봤는데 특히 어른들 보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혼자 소꿉놀이할 때도 사투리를 섞어 썼다. 부산에 살아본 적도 없는 내가 지금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를 유연하고 태연하게 쓸 줄 아는 것도 다 드라마 때문이다.

illust by 이영채

사실 요즘은 좀 심심해지고 싶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당연한 심정일 것이다. 심심해서 멍 때릴 시간이 좀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아이를 상대하거나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뭔가를 해결(집안일)해야 하는 내가 때로는 벅차다. 나는 그렇게 세팅되어 있지 않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풀가동’ 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다 과부하가 올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아이 앞에서 넋을 놓고 있으면 어김없이 아이가 “엄마!” 하고 나를 깨워 현실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 봤자 그 멍 때리는 시간이 2, 3분 될까 말까다. 아이는 그 잠깐도 나를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좀 심심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심심해야 창의력도 키워진다고 한다. 장난감이 많은 아이보다 놀거리가 적어서 스스로 놀거리를 찾아 나서는 게 결과적으론 아이에게 더 이롭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혼잣말을 잘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사고를 키워가고 이는 나중에 내적 언어가 되어 그만큼 사고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이들은 생각을 한 다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혼잣말을 많이 하는 만큼 아이는 발전하게 되고 혼잣말을 하지 않는 아이는 그만큼 사고력 성장이 더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숨김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은 어떤가? 어른들은 생각도 따로 하고 말도 따로 할 수 있다. 생각을 키워나가기 위해선 글을 써야 한다. 쓰면서 정리된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이 혼잣말하며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가듯, 어른들은 글을 쓰면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사고를 확장해야 한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그만한 데는 일기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심심해야 창의력이 생긴다


부모는 아이를 끊임없이 재미있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나부터도 그렇다. 아이가 조금 심심해 보인다 싶으면 곁으로 슬쩍 다가가 뭐해줄까?라고 묻는다. 근데 이걸 좀 자제하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아이는 좀 심심해야 한다. 아이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심심함에 스스로 무언가를 찾는 능력이 자라야 나중에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 있는 시간을 슬기롭게 잘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겠는가? 여럿이 있는 게 행복하려면 혼자 있는 시간도 즐거워야 한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어느 정도 어린 시절 심심하게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아이나 어른이나 좀 심심해야 한다. 그나저나 나의 심심함은 언제쯤 되찾을 수 있으려나.


원문: 이유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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