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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불확실한 시간과 폐쇄된 공간의 공포 영화

‘불확실성의 시대’를 품어낸 하나의 상징
ㅍㅍㅅㅅ 작성일자2017.07.31. | 7,630  view

※ 이 글에는 영화 〈덩케르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시간의 공포


〈덩케르크〉는 시간의 공포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땅과 바다, 하늘 총 세 가지의 시간이 차례로 전개된다. 땅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병렬적으로 이어진다.


세 종류의 시간은 ‘과학적으로는’ 확실히 다른 시간이다. 일주일은 하루의 일곱 배고, 하루는 한 시간의 스물네 배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영화의 시간 안에서 세 종류의 시간은 등가를 이룬다. 이 시간들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은 세 종류의 시간을 사는 주체의 ‘공포’다.

먼저 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어린 군인 토미의 공포가 있다. 첫 장면에서 그는 동료들이 모두 총에 맞아 죽어 나간 가운데 담장을 넘어 혼자 살아남는다. 담장 너머에서 한 번 살았다는 안도감에 볼일을 본다. 그 뒤에 추격을 피해 해안에 당도하자 또다시 안도감을 느끼며 볼일을 본다. 해안은 철수를 기다리는 군인으로 가득하다. 군인들은 길게 일렬로 줄을 서서 아무 말 없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독일군의 폭격기가 한 번씩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일부가 죽어 나간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생명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맞이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독일군의 폭격에 죽을 수도 있고 앞서 배를 탔다가 격침당해 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두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생사는 전적으로 우연한 것이고, 무작위적인 것이며, 막연한 것이다. 생사의 문제에서 그들의 ‘주체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들의 생사가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서둘러’ 배를 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시간이 끝나는 것뿐이다.


토미는 서둘러 탈출하기 위에 갖은 애를 쓴다. 들것과 함께 배에 타기도 하고, 쫓겨났다가 다시 잔교 아래에서 기회를 노리기도 한다. 버려진 어선에 몸을 실기도 하지만,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어쩌면 다른 군인들도 그런 시도쯤이야 다 이미 해봤을지 모른다.


마지막에 토미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다른 군인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기 때문에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가 해낸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끝나면서 부수적으로 살아남았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시간뿐이었다.

바다에서 도슨은 아들 피터, 조지와 함께 군인들을 구출하러 떠난다. 그들은 ‘덩케르크’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그 만 하루 간의 여정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다. 곳곳에는 침몰된 배들이 보인다.


그들은 본인의 의지로 떠났지만 바다에 오르고 육지에 당도할 때까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육지에 당도하는 그 시점에 이르러야만, 즉 항해의 시간이 끝나야만 공포도 벗겨낼 수 있다.


특히 어린 청년들이 더 큰 공포에 사로잡힌다. 청년의 시간이란 중장년의 시간과 다르다. 그들에게는 아직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고, 미래는 훨씬 더 불확정적이다.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청춘에는 시간의 힘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죽느냐 사느냐’의 동전 던지기 게임에서 조지는 실패했고 피터는 성공했다.

사정은 하늘에서도 다르지 않다. 영국 공군의 세 전투기가 덩케르크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떠오른다. 그들은 그럭저럭 작전에 성공하며 독일군 전투기를 격추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둘 동료를 잃고 마지막에는 파리어만 덩케르크를 향해간다. 문제는 연료 계기판이 고장 났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연료가 다 떨어질 시점을 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도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인간의 주체성은 박탈당한다. 만약 그의 눈앞에 정확한 시침과 초침, 연료계의 수치가 들어왔더라면 그는 조금 다른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최후까지도 막연하다. 그렇기에 그는 시간에 따른 착륙 판단보다는 비행을 멈추지 않고 적기를 하나라도 더 격추시키는 판단을 한다.


‘이것 하나만 더 격추하고……’ 하는 생각이 없었을 리 없다. 계속해서 시간을 체크하며 연료의 상태를 예측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착륙하는 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다.

〈덩케르크〉의 인물들은 시간의 절대적인 힘과 불확실성에 순응한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도저하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인간의 발버둥은 큰 의미가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시간이 끝난 뒤에 판명 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품어낸 하나의 상징과 같다. 우연이 되고 있는 삶,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삶, 도래하는 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대적 삶의 단편이 이 영화 속에 깃들어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수십 년 전의 실화를 재현한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차라리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지금 이 세계의 이야기다.



폐쇄된 공간의 공포


〈덩케르크〉는 공간의 공포에 관한 영화다. 영화 안에서 근본적으로 안전한 공간이란 없다. 모든 공간은 폐쇄되어 있으면서, 고립되어 있고,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덩케르크 해안의 고요는 안전을 보장받은 평온이 아니라, 종말 직전의 침묵, 폭풍 전야의 잔잔함에 가깝다.


적군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적막 가운데 희망은 오직 안개 낀 수평선에 밖에 없다. 하지만 그조차도 분명한 희망은 아니다. 오히려 바다로 나서는 것보다는 해안에 남아 있는 편이 며칠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구축함의 상당수는 격침당해 수장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공포는 인간을 좀먹는다. 눈앞의 위험은 인간을 긴장하게 하고,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을 치게 만든다. 위험의 순간에는 공포보다 눈앞의 적에 대한 분노가 더 강하게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 폐쇄된 공간에서는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간의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 행동의 가능성을 잃은 인간은 영혼을 박탈당한다. 인간 삶의 실천, 행동, 주체성은 인간이 발 뻗을 수 있는 공간의 자유에 기반 두기 때문이다.


해안에서 적기가 나타났을 때도 군인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적기를 향해 총을 쏘는 군인은 단 1명에 불과한데, 사실 그 1명의 군인만이 최소한의 합리성과 능동성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수천 명의 군인이 동시에 하늘을 향해 총을 쏜다면 적기의 연료통에 한발쯤은 명중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간적 자유의 박탈은 그들을 무기력으로 병들게 했다.


바다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도슨 일행은 군인 한 명을 구조하지만 구조된 군인은 이미 극도의 공포에 젖어 있다. 폐쇄된 공간이 두려워 배 안쪽 선실에 들어가려 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갑판이라는 열린 공간에서만 겨우 자신의 공포를 견뎌낼 수 있을 뿐이다.


문을 걸어 잠그는 폐쇄된 공간은 본디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쉼터이다. 우리는 갇혀 있지 않은 집, 문이 열려 있는 집에서 편히 쉴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형벌도 감옥 따위에 인간을 ‘가두는 것’이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두는 데서 가장 큰 평안을 느끼지만, 동시에 강요에 의해 가두어지는 것에서는 가장 큰 공포와 고통을 느낀다.


폐쇄된 공간의 절정은 하늘에서의 여정을 끝마친 파리어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적지에 착륙한다. 공군에 대한 중요한 정보 등을 가지고 있을 테니 아마 곧바로 살해되기보다는 포로로 잡힐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이른 ‘절대적인 폐쇄 공간’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전작에서 꾸준히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행성에 갇히며 끝나는 〈인터스텔라〉, 림보에 갇히며 끝나는 〈인셉션〉, 기억에 갇히며 끝나는 〈메멘토〉 등은 모두 폐쇄성의 짙은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린 세계를 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 있다. 굳이 몸을 이동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은 모든 이들에게 거의 평등하고 무한한 자유를 허락한다. 끝없이 열린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거의 쉼 없이 이동하고 연결되며 살아가고 있다. 가장 안락하고 폐쇄적인 방 안에서도 가장 열려 있고 연결되어 있기를 갈망한다.


그렇기에 〈덩케르크〉에서 시종일관 제시되는 ‘폐쇄적 공간’은 우리 현대인의 가장 근본적인 공포와 접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전쟁 당시 ‘그들의’ 공포를 다룬 이야기지만 실상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매일같이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일주일만 휴대폰과 인터넷을 끊어버린다면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자신이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늘 홀로 남겨지는 놀란의 작품 속 인물들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놀란의 공포 영화 아닌 ‘공포 영화’가 정말로 공포스러운 이유가 있다면,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이 이미 우리 자신의 모습이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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