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1992년 롯데 자이언츠, 2번째 패권을 거머쥐다

조회수 2017. 7. 30. 19:23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그때 그 대단했던 염종석, 만화같던 승리의 롯데 자이언츠

1984년 슈퍼맨 같은 활약을 보여줬던 최동원과 마지막 7차전에서 극적인 뒤집기 3점 홈런을 터뜨린 류두열의 활약에 힘입어 아무도 예상 못 한 한국야구의 패권을 거머쥔 롯데 자이언츠. 그러나 그 후 80년대 중, 후반에 걸쳐 중, 하위권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자이언츠는 91시즌 84시즌 우승 당시 사령탑이었던 강병철 감독을 다시 영입하고, 그해 전준호,박정태,김태형 등과 같은 걸출한 신인들이 좋은 활약을 보이며 7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모처럼 자이언츠의 성적이 상승하자 부산의 야구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홈 관중 100만 돌파(100만 1,920명)라는 기염을 토한다.


91 준플레이오프에서 사상 초유의 4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라이온즈에 밀려난 자이언츠는 92시즌을 희망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강팀엔 약하고 약팀에게는 철저히 강했던 페넌트 레이스


92시즌 롯데의 성적은 71승 55패 승률 0.563을 거두며 2위 해태에 반경기차 뒤진 3위였다. 승과 패수의 차이가 무려 16게임에 달하는 호성적이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당시 압도적 포스를 과시했던 1위 빙그레에게 5승 13패로 압도당했으며, 2위 해태와 4위 삼성에게도 각각 7승 11패로 열세를 보였다. 상위 4팀을 상대로는 19승 35패의 4할에도 못 미치는 승률을 기록했던 롯데는 대신 OB(12승 6패), 태평양(14승 4패), LG(14승 4패), 쌍방울(12승 6패) 등의 하위 4팀을 상대로 확실하게 승수를 챙기며 상위권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다. 시즌 3위를 기록한 롯데는 91시즌에 이어 다시 라이온즈와 준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하게 된다.



승리 방정식에 가장 잘 들어맞은 자이언츠의 어메이징 포스트 시즌


페넌트레이스와는 달리 포스트 시즌에서는 선발 투수의 비중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걸출한 1,2,3선발과 확실한 마무리를 보유하고 있는 팀일수록 우승에 근접하는 것이다. 또한 공격력에선 밥상 잘 차리는 테이블 세터진과 차려준 밥을 잘 챙겨 먹을 수 있는 중심타선의 왕성한 식욕이 성패를 좌우한다. 그리고 두말해도 잔소리이지만 큰 경기에서의 사소한 실책은 커다란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 반면에 기막힌 호수비는 팀의 분위기에 큰 기폭제가 되는 동시에 상대의 전의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92 포스트 시즌의 롯데는 공,수에서 포스트 시즌 승리 방정식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사실 선수들의 잠재력이 이 정도로 폭발할 줄은 누구도 예상 못한 것이었다.



‘고졸 신인 돌풍의 핵’ 염종석과 만화 같은 괴력을 보여준 ‘슈퍼베이비’ 박동희

92 포스트 시즌 롯데의 투수진은 마치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괴력을 보여주었다. 그 괴력의 중심에는 92시즌 내내 불어 닥친 고졸 신인 돌풍의 핵 염종석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고졸 신인이 입단 첫해 돌풍을 일으키는 것은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 고졸 신인이 입단 첫해 10승대를 기록한 것은 91시즌 같은 팀의 김태형이 처음이었을 정도로 고졸 신인에게 프로의 벽은 너무나도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92시즌을 앞두고 당시 한국 야구 창건 이래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어급 고졸 스타들이 쏟아져 나왔다.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 공주고 박찬호, 대전고 정민철, 부산고 염종석, 원주고 안병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어급 투수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다. 각 구단들은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으나 이 중에 정민철,염종석,안병원 등이 곧바로 프로행을 택하고 나머지는 모두 대학으로 진학한다.


이 3명의 73년생 고졸 새내기들은 입단 첫해부터 프로야구 마운드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염종석은 타고투저의 열풍 속에서도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방어율 1위 (2.34), 다승 3위(17승)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한다. 페넌트레이스에서 염종석과 더불어 롯데의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은 변함없는 꾸준함을 보이며 염종석과 더불어 팀 내 최다인 17승을 거둔다.

92년 최고의 투구를 보여주었던 투수 임종석.

그러나 염종석, 윤학길을 제외한 자이언츠 투수진은 다소 빈약해 보이기만 했다. 91시즌에 14승을 거두며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였던 박동희가 부상으로 인해 7승밖에 거두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동희는 마치 포스트 시즌을 위해 힘을 비축한 것 마냥 포스트시즌에서 기대 이상의 맹활약을 펼친다.



미친 것 이상으로 미친 92 포스트 시즌의 롯데


페넌트레이스에서 상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였던 3팀을 상대로 험난한 레이스가 예상되었던 자이언츠. 그러나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라이온즈와의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2경기에서 염종석, 박동희 단 2명만의 투수로 상대 막강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는다.


사상 유례가 없는 2경기 연속 완봉승. 팀 창단 이후 유례가 없는 굴욕적인 완패를 당한 라이온즈는 결국 김성근 감독의 퇴진 및 선수단 대폭 개편의 회오리가 불게 된다.


라이온즈를 가볍게 제낀 자이언츠의 맞상대는 전통의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 사실 단지 지역적인 연고 차이로 인해 라이벌이 되었을 뿐 단 한 시즌도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무늬만 라이벌이었다. 그나마 최동원이 버티고 있을 당시엔 선동렬을 상대로 팽팽한 힘겨루기를 했지만 최동원이 팀을 떠난 후에는 라이벌이라 불리우기에는 한창 모자랄 정도로 전력이 차이가 컸던 양 팀 간의 관계였다.


그러나 유독 큰 경기에서 힘을 발휘하는 자이언츠의 괴력은 비록 선동렬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강호로서 위용을 잃지 않던 타이거즈마저 밀쳐내고 만다. 특히 마지막 5차전에서 고비 때마다 신들린 듯한 다이빙 캐치를 연거푸 보여줬던 공필성은 타이거즈의 전의를 차츰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 후반에는 한국시리즈 진출을 자축이라도 하듯 공격진이 상대 마운드를 초토화 시키면서 타이거즈라는 큰 산마저 넘어서고 만다.


염종석은 신인답지 않은 배짱과 주무기 슬라이더를 마치 선동렬이 없는 타이거즈에게 본보기(선동렬의 주무기이기도 한 슬라이더)라도 보여주듯이 마음대로 과시하며 상대 타선을 완벽하게 제압한다. 마치 전자오락 게임에서 한 단계 한 단계 격파하며 올라가는 쾌감이라고나 할까. 부산의 야구팬은 이미 황홀경에 접어들었다.



당대 최강팀마저 무너뜨리며 2번째 패권을 거머쥐다


92시즌의 빙그레는 공, 수에서 허점이 보이지 않는 완벽 그 자체였다. 당시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41개)를 작성한 장종훈, 2위와 2푼 이상의 압도적인 차이로 타격왕을 거머쥔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 이정훈, 중심타선의 터줏대감 이강돈, 패기의 강석천 등이 버틴 타선은 말 그대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었다. 투수진 또한 리그 최강의 위용을 과시하였는데 선발, 구원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등판하여 다승왕과 구원왕을 거머쥔 송진우(19승)을 필두로 장정순(14승), 정민철(14승), 이상군(10승) 등이 탄탄하게 뒷받침하였다.


항상 우승 문턱에서 거대한 장벽으로 군림하였던 선동렬과 타이거즈가 이미 대열에서 이탈하였고 시즌 내내 승수 쌓기의 제물 중의 하나였던 ‘만만한’ 자이언츠가 매치업으로 결정되자 누구보다도 내심 우승에 대한 큰 기대를 가졌던 사람은 빙그레 사령탑 김영덕 감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8년 전의 악몽이 재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를 이끈 김영덕 감독.

참으로 야구란 경기는 징크스가 재현되는 묘한 매력과 마력이 있다. 1984 시즌으로 시계추를 돌려보면 당시 리그 최강 삼성은 한국시리즈 파트너를 고르기 위해 져주기 추태까지 불사하면서 ‘만만한’ 상대를 골랐는데 당시 삼성 감독은 김영덕이었고, 그 만만한 상대는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사령탑은 강병철 감독이었다. 8년 후 김영덕 감독의 팀이 바뀌었고, 이번에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을 뿐 8년 전의 상황이 비슷하게 재연된 것이다.


8년 전에 강병철 감독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최동원을 필승카드로 활용하였는데, 8년 후에도 염종석을 필승카드로 활용한다. 하지만 그나마 투수 운용의 폭이 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이언츠 마운드에서 최동원의 대를 이를 거물로 지목되었던 박동희가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부의 분수령은 2차전이었다. 1차전을 적지에서 거머쥔 자이언츠는 버리는 셈 치고 홀가분하게 2차전을 맞이하였는데 선발로 나온 무명에 가까웠던 윤형배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호투를 펼치며 상대의 강타선을 틀어막은 것이다.


결국 염종석을 투입하며 2차전까지 싹슬이한 자이언츠는 여유 있게 시리즈를 진행할 수 있었고, 결국 페너트레이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빙그레를 공, 수 양면에서 완벽하게 제압한다. 자이언츠의 우승의 원동력은 염종석,박동희,윤학길 이라는 다른 팀에 가면 1선발로 활약할 수 있는 대형투수를 한꺼번에 보유한 것도 있지만, 1번 전준호 2번 이종운 3번 박정태 4번 김민호 5번 김응국으로 이어지는 당대 최강의 1~5번 타순과 공필성, 박계원 등의 건실한 수비를 자랑하는 내야진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3번 타자로 활약했던 박정태 선수.

사직구장은 연일 야구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무려 1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야구장으로 향하였다. 만화 같은 기적을 일구어낸 자이언츠의 1992시즌은 84시즌의 기적과 더불어 부산 팬들에게 달콤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문: 나루세의 不老句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