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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폭력의 다른 이름

조회수 2017. 7. 8. 2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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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질문도, 고민도, 저항도 없는 맹신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된 아메리카 학살

원주민들은 저급한 인류이며, 그들이 우리에게 정복당한 것은 인신 공양과 우상숭배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원주민은 선천적으로 미개하며, 이들에게는 오직 군사적 정복만이 효과적인 선교방법이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책을 둘러싼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와 후안 지네드 드 세풀베다 논쟁의 한 장면이다. 위의 워딩은 당시 세풀베다의 입장을 대변한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가톨릭 수사이자 역사가로 스페인군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폭력들을 기록하고 고발했다.


그의 저술 『인도의 폐허(The Devastation of the Indies)』에는 스페인군의 폭력적 만행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스페인군은 대량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혹사했으며,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조차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40년 동안 자행된 기독교인들의 잔혹한 폭력으로 1,200만의 성인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학살 당했다.

- 위의 책, 40쪽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혹시 아니? 모르지, 그들의 본성 자체가 사악하고 잔혹하기 때문일지도.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야. 그들은 어떤 신을 숭배 하는 데, 우리가 그 신에게 예배하길 원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억압하고, 죽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야.

- 위의 책, 54쪽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다. 존 레디 펠란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이 지구 어딘가에 존재할 거다”라는 생각은 당시의 아주 보편적인 통념이었다. 유럽인들은 대개 그 에덴 동산이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콜럼버스가 아시아를 발견했다며 감격했던 이유은 단순히 새로운 대륙의 발견을 넘어 하나님이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한 지상낙원, 에덴동산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했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십자가와 총포를 들고 상륙하였다. 콜럼버스다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하고 호의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하고, 압제했다.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된 흑인 노예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인류의 잔혹한 폭력사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미국의 노예제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제도적 폭력이었다.

함의 운명은 아프리카 후손들을 형성하고 특징 지었다. 이 운명이라고 하는 건 함의 피부색과 그가 겪었던 운명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지어준 운명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James Henry, 미 상원의원)
노예제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함께 생겨났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신구약 성서 모두가 노예제도를 지지한다. 노예제도가 존재 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노예제도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 속에서 형성되었고, 예술이 발달한 나라 안에서 나타났다. (Jefferson Davis, 미 남부연방 대통령)
노예를 소유할 권리는 명백하게 성서에 기반한다. (R. Furman 목사,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침례교회)
성서에는 노예제를 금지하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노예제도를 규제한다. 부도덕한 것이라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Alexander Cambell 목사)
인류의 희망은 흑인들의 참정권을 없애는 것이다. (Jack Rogers 목사, moderator of the Presbyterian Church)

저스틴 캐논의 『동성애를 비난하고 노예 제도를 지키기 위해 사용된 성경(Biblical Texts used to defend slavery and Biblical texts used to condemn homosexuality)』에 따르면 성서 본문 중 창9:16, 출21:2, 레25:44, 신5:7-8, 롬13:1-5, 디3:1, 2:9, 몬, 벧전 2:13-18, 골3:22, 고전 7:21-22, 엡6:5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신학적, 성서적 전거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된 여성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메사추세츠 회중교회 목회자 연합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힌다.

여성으로서 가지는 적절한 책임과 영향력에 대해선 신약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 여성의 힘은 의존성에 있다. 하나님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연약한 여성들이 의식적으로 의존하게끔 만들었다. 여성들이 사회 개혁가로서 남성의 위치를 점하거나 남성과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 여성들은 하나님이 의존할 때만 쓰라고 허용하신 여성의 힘을 이에 맞지 않게 발산하는 것이고 … 이는 여성들을 본성에서 어긋나게 한다.
누가 여성에게 투표권을 요구하는가?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자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와 다른 계급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예외는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자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 명부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내는 일이고, 가정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박차는 일이며, 불경스럽고, 파멸을 몰고 오는 것이다.

이런 성차별적인 주장들 역시 바울 서신에 의해 정당화 되었다(고전 11:3, 4, 7-9, 7-12, 고전 14:34-35, 2 Timothy 3:1-7, 엡 5:22-24, and 딤전 2:11-14). 이런 끔찍한 폭력들은 성서 그리고 교리에 의해 정당화 되었고,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되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된 일본 식민 지배

2014년, 문창극 당시 총리 후보자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망언을 했다. 서정민 교수에 따르면 그의 이런 발언은 일본의 한국 침략 당시 일본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내세웠던 명분과 맥을 함께한다. 서정민 교수의 블로그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 땅은 일본의 선조(先祖)에게 이미 약속하신 땅이며, 이를 잘 계발하여 동양평화에 기여할 친권(親權)과 의무를 지녔다는 것이다.

즉 일본국은 명분문제에 위축되지 말고, 맘껏 한국을 병합(倂合)하고, 잘 통치하여, 일본의 선조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좋아할, 성서적(聖書的), 섭리적(攝理的), 신권적(神權的) 병합명분이었겠는가.

여기에다 당시 일본 그리스도교지도자들은 한수 더 떠서, 한국민족과 유대민족을 비유해가며,한국크리스천들에게 대단한 위로까지 더하여 준다.

유태민족이 고난의 민족사에서 성자(聖子)를 잉태했듯이, 민족의 수난의 역사에 들었다고 비탄에 머물지 말고, 잘 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뜻이 있어 그대들에게 고난의 기회를 주었으니, 잘 살피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태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하여 벌인 그 전철(前轍)을 따르지 말고, 즉 감정적으로 치우거나, 폭동이나 봉기(蜂起)를 일으키지 말며, 오히려 유태민족의 실패, 그것을 거울삼아, 자중(自重)하라는 충고도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일본그리스도교의, 극우적, 독선적, 제국주의 신학적 한일역사이해이다.

저 망언이 더욱 소름 돋는 이유는 그것이 그 한 사람만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아니라 크리스천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심지어 지지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망언은 최근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몇 년 전 온누리 교회에서 했던 발언이며 오랫동안 문제시 되지 않았다.


이 망언이 이슈화 된 이후에도 오마이뉴스의 취재에 따르면 온누리 교회 교인들의 반응은 이를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두둔하는 목사들이 광고를 내고, 칼럼을 쓰기까지 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민도, 저항도 없는 “하나님의 뜻”은 폭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린 노예제를 폐지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쟁취한 역사가, 인종차별에 맞서고 성차별에 저항했던 역사가,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갈구했던 역사가,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가 “하나님의 뜻”에 의문을 던지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정면으로 맞섰던 이들에 의해 성취될 수 있었단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대체 언제까지 크리스천들은 압제의 신에게 순종하며, 폭력을 “하나님의 뜻”으로 고백하고, 은혜로 소비할 것인가?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 하는 압제자들의 하나님. 아무런 질문도, 고민도, 저항도 없는 맹신. 이런 신앙에서 자라난 “하나님의 뜻”, 그것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원문: 홍신해만의 블로그


참고

네이버캐스트
Bartolome de Las Casas, The Devastation of Indies
John Leddy Phelan, The Millennial Kingdom of The Franciscans in the New World
Would Jesus Discrimi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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