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삶의 한가운데

조회수 2017. 6. 28. 18: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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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세월을 거쳐 중년기로 내던져지다.

40대, 삶의 한가운데

40대는 41세부터 49세까지의 사람을 한데 일컫는 말이다. 인생에서 40대는 삶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연령대이고, 그래서 가운데 중(中) 자를 붙여서 중년이라고 한다. 사실 몇 살까지가 중년인지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없다. 하지만 40-50대를 중년이라고 하고 그 이후를 노년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람들의 수명이 예전보다 늘어서 50대 이상을 중년이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40대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구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궤적을 염두에 둔 가름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도 40대 중반쯤 접어들면 중년이라는 소리를 피하기 어렵다. 수명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늙어가는 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진 것은 아니다. 아직 자신이 쌩쌩하다고 자부하는 40대에게는 섭섭하고 속상한 얘기겠지만, 중년기가 시작되면 늙어감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 40대는 1968년생부터 1977년생까지다.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만 나이로 40~49세이며 이들은 그 어느 연령대보다 출생자 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출생자 수는 해마다 늘어났고 정부는 1960년대부터 ‘가족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결국 1970년대 초반부터 출산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1970년대의 출생자 수는 한 해 평균 80만 명을 훌쩍 넘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심지어 1970년 전후로는 한 해에 100만 명 이상이 태어났을 정도다.

통계청이 출생자 수를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한 때가 1970년이기 때문에 40대 중에서도 1968-1969년생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나마 공식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주민등록을 근거로 연령별 인구수를 계산해 보면 알 수 있는데, 2017년 2월 기준 40~49세 인구수는 약 878만 명이며 이 중 여성이 432만 명, 남성이 445만 명 정도다.


현재 인구를 10세 단위로 연령 구간을 나누었을 때도 40대의 수가 가장 많다.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일명 ‘베이비붐’ 세대인 50대(1958~1967년생)도 845만 정도로 많긴 하지만 40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최근 10년간 태어난 아이들, 그러니까 0~9세 아이들 수가 455만 명이 채 되지 않는 것에 비하면 40-50대는 ‘머릿수’만큼은 어디 가서도 밀리지 않는 세대다. 게다가 한창 활동하는 세대기도 해서 사회에서의 역할과 영향력도 아직은 건재한 편이라 볼 수 있다.



40대의 연혁

지금의 40대들이 태어난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하던 제3공화국(1962~1972년), 제4공화국(1972~1981년)에 걸쳐 있다. 40대 후반이라면 제3공화국 시절에 태어나 현재의 제6공화국까지 경험한 셈이다. 40대 초중반은 제3공화국을 거치진 못했지만 40대 후반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부터 시작해 박근혜 대통령까지 8명의 대통령을 경험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조기 대선을 치른 2017년 지금, 9명째 대통령을 경험하고 있다.


40대의 유년 시절은 유신 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40대 후반은 제3공화국 시절에 태어나 유신 체제로 불린 제4공화국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0년대 말에 국민학교 고학년이었던 40대 후반은 반공, 새마을운동, 장발 단속, 국민교육헌장, 통금 따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작고한 가수 신해철은 그의 노래 ‘가버린 70년대에 바침’에서 1970년대를 이렇게 표현한다.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가위를 든 경찰들 / 지금 와선 이상하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비록 한 시절을 살아가긴 했지만 대부분의 40대는 그때가 독재 시절이었는지를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다. 사회나 정치에 관심을 둘 나이도 아니었고, 비록 어른이라고 해도 독재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도 못하던 시절이기도 했으니까. 10년 가까운 터울 때문에 40대 후반의 어릴 적 기억은 40대 후반 이하의 사람에게는 낯선 얘기기도 하다. 40대 초반인 1976-1977년생이라면 1980년에 고작 너덧 살이었으니 40대 후반과는 기억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많은 40대에게 공통적일 기억 하나를 꼽자면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사건인 일명 ‘10.26 사건’을 들 수 있다. 20년 가까이 독재를 한 대통령이 자신의 수하에게 총격당해 죽은 사건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근대에 들어 현직 국가 원수가 부하에게 살해된 일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유례없던 장기 독재 체제의 종말이면서 ‘그’가 없는 1980년대를 시작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작가 유시민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유시민 작가는 10.26 사건 당시에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시민 작가가 학교 안에서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쳤는데 아무도 잡으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유시민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당시는 ‘샤우트 3분에 징역 3년을 정찰제로 때리던’,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헌법적인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 냉혹하던 체제가 멈춰버린 것이다. 기억 못 하는 이도 간혹 있겠지만 (40대 초반인 아내는 TV에 나오던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을 기억한다지만 두 살 위인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40대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획을 그은 때를 함께 살았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나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된다. 그해 12월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최규하 정부는 불과 8개월 정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1979년 12월 21일에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이미 12월 12일에 전두환 소장이 군사반란(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군사반란 세력은 대통령을 겁박해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완전하게 정권을 장악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군사반란 세력의 우두머리인 전두환 소장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군인 출신 독재자가 사망하자 다른 군인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40대 후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40대가 대통령이 어떤 지위인지 대충이라도 인식하게 된 때는 1980년대 이후라고 봐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국민학생이 되어 벽에 걸린 대통령 사진을 보면서(당시에는 교실이나 복도, 혹은 교무실에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국가 중심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이들이었던 지금의 40대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은 관심 밖이거나 어른들의 어려운 얘기일 뿐이었다. 그때의 대통령이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는 것, 대통령이 되기 전 5.18 광주 민주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것, 99.9%의 찬성률로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나중 일이었다.


엄혹했던 그때도 국민학생, 중학생이었던 40대에게는 그저 ‘학창시절’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경제는 호황이었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흑백텔레비전으로 태권V를 보던 아이들에게 컬러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은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발전과 반공 사상의 승리를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른들은 여전히 체제 순응적이었다. 정치 체제가 어떻든 간에 삶의 질은 나아지고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펼쳐 사람들의 이목을 정치에서 떼어놓았다. 프로야구를 보러 야구장으로,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통금이 없는 밤을 즐기기 위해 시가지로 나선 사람들에게 정치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체제 변화에 대한 요구는 커졌다. 대학교 있는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유독 심했던 대학생들의 시위 행렬과 까만 헬멧을 쓰고 방패와 진압봉을 든 전경들의 대치 장면, 하굣길 버스 안에까지 스며들던 최루탄의 메케하고 따끔한 냄새를 말이다.


지금 40대 중반이라 해야 중학생이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 리 없었다. 밥상머리에서 어른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을 데모꾼이라 욕하는 소릴 들으며 하라는 공부도 안 하고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나쁜 형, 누나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저항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환경과 사회환경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들 알지만, 어렸던 그때 사회에 이해는 온전한 나의 몫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런 상황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참여했던 40대가 있다면 당시 대학을 들어갔던 1968년생이다. (그때는 연초 출생으로 학교를 또래보다 1년 일찍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1969년생도 일부 포함된다.) 지금 50대를 바라보는 만 49세의 40대 최고참들이 흔히 말하는 ‘386세대’의 서열 마지막에 있는 사람들이다. 1990년대 중후반 당시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을 386세대라고 부르니 386의 세대의 서열 막내가 ‘87학번’이고, 이들이 ‘빠른 69’를 포함한 1968년생이다.


그들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현장에서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절차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직선제로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덕분에 지금 40대들은 투표권을 처음 행사할 때부터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었다.


직선제라는 시스템을 ‘쟁취’했음에도 많은 시민이 염원하던 정권교체는 이루지 않았다. 김대중, 김영삼이라는 민주세력의 두 지도자가 단일화에 이르지 못해 결국 1987년 12월에 있었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인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이어졌던 노태우 정권은 군사 독재 세력의 잔재였지만 표면상 이전 체제보다 온건했다.


세계 경제의 호황을 등에 업고 연평균 8%가 넘는 경제 성장률, 실업률 2%대를 기록하는 등 삶의 환경도 크게 나아지고 있었다.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세계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전 몇십 년에 비해서는 자유와 번영이 판을 치고 있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마이카(My Car)’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문화적 다양성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한국 상업 음악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해가 노태우 정권의 말기인 1992년이었다.)


지금 40대 초중반은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자본주의 체제 논리에 의해 입시교육에 떠밀렸다. 40대 중후반은 대학교 진학률이 30~40%대였지만 1977년생이 입학하던 1996년 대학진학률은 50%를 넘었다. 1990년을 기점으로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미디어에 숱하게 등장했다. 학업 스트레스, 정확히는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학생들이 죽음을 택하는 일이 잊을 만하면 뉴스를 탔다.


당시 어른들은 ‘좋은 대학 = 좋은 직업 = 행복한 인생’이라는 등식을 강요했다. 그 등식은 지금도 유효해 어른이 된 지금의 40대는 그 등식에 동조하며 (동의하지 않더라도) 살아가고 있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이 노태우 정부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았다. 지금 40대의 절반이 그 당시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번영의 축복은 계속될 것 같았고 어느 정도는 그러한 기조가 이어졌다. 하지만 1997년에 터진 외환위기는 지금의 40대에게 눈앞의 삶을 현실의 문제로 제시했다.


당시 20대였던 지금의 40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매료되어 있던 X세대였고, 급속하게 보급되던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던 IT 1세대였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감투는 외환위기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대학을 휴학, 포기했고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갓 들어간 직장을 잃는 일을 경험했다. 심한 경우 가계가 파탄 나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지금의 40대가 태어나던 시기는 국가가 나서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던 때였다. 하지만 25년 정도의 시간 동안 세상은 변했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끝자락에 벌어진 외환위기 사태는 우리나라에 신자유주의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했고 그때 얻었던 삶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지금 40대의 트라우마이자 의식의 중추가 되고야 말았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을 쏟아부었고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위기를 벗어났다. 또 2000년 6월에는 분단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전 정권 때에 비하면 자유와 안정의 기운이 ‘상대적으로’ 넘치던 때였다. 지금의 40대에게는 특히 그랬다. 사회적으로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가장 역동적인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니 말이다.


‘청춘’이라는 훈장을 달고 꿈과 미래를 그리던 그들에게는 국가가 파산할 수 있던 지경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두 팔을 벌려 반길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처방했던 정책들이 결국 40대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시절 뿌리를 내렸던 신자유주의의 기운은 지금의 40대들을 자본주의 체제 앞에서 더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2002년, 지금의 40대들은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포진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장 진보적인 연령대에 있었으며 실제로 가장 진보적이었다. 2003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20대, 30대는 60%대의 지지를 2부 리그에 머물러 있던 노무현 후보에게 몰아주었다. 이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기성세대에 대한 세대교체 요구였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할 시기에 있거나 이미 사회에 진출해서 삶을 일구어야 하는 20-30대에게 기존 프레임은 낡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과는 달리 경제적 암울함은 조금씩 깊어져 갔다. 집값은 폭등했고 양극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좋은 일자리 대신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평생직장 개념은 옛날얘기가 되었다. 몸과 마음은 2002년 월드컵 4강을 응원하던 광장과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던 촛불 집회에 있었지만 현실은 사오정(45세가 정년)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필요한 때였다.

이전 정권과 대립하던 정치세력이 다시 집권한 2008년, 지금 40대의 모두는 30대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세대이기에 그만큼 바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결혼, 육아 등의 의무가 주어졌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 밤낮없이 분투해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재임 동안 딱히 나아진 것은 없었다. 4대강 개발이니, 천안함 격침사건이니, 구제역이니 하는 사회적 이슈들로 시끄러웠다. 세대 갈등이 뚜렷해졌고 권위주의적인 풍조로 다시 회귀하는 듯했다. 경제 양극화는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안락한 미래에 대한 보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시 30대들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속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 패배감에 휩싸였다.


밀레니엄 버그를 걱정하던 2000년을 20년 가까이 지난 2017년. 1968~1977년에 태어난 대부분의 사람이 40대가 되었다. 2017년을 모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1977년생 일부가 만 39세이지만, 그들도 곧 40대가 된다. 40대가 사는 세상은 살아온 만큼이나 퍽퍽하기 이를 데 없다. 부모의 재력이 자식의 능력이 된다는 의식이 공공연할 정도로 빈부의 양극화는 가속되고 있으며 아예 부모의 재력과 능력을 수저의 구성 물질로 구분하는 게 보편적인 표현 방법이 되어버렸다.


삶의 피로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비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으며 청년 실업률 또한 최고치를 경신한다. 비록 40대들은 ‘청년 실업’의 해당자가 아니지만 이태백, 88만 원 세대, 삼포 세대 등으로 자신들을 규정하는 젊은 세대에게 미안함을 느낄 새도 없다. 오히려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의 불안마저 어쩌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어쩌면 본격적인 늙음을 눈앞에 두고 젊은 세대보다 더 불안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원문: 마흔하나, 생각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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