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마주보는 시간

조회수 2017. 6. 10.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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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생각의 편린을 정리하고 두리뭉실한 생각을 육화시키는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좀 부정적이다.



1.


글 쓰는 게 취미다 보니, 글 쓰는 것에 관련해서 오해도 많이 받고 질문도 많이 받는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대략 세 개다: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 바쁜 시간을 쪼개 글을 쓸 이유가 있느냐는 것, 마지막으로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팁 같은 거 없느냐는 것. 뭐 내가 남한테 조언을 할 정도로 글을 잘 쓰는지는 의문이지만, 오늘은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소재 하나 주웠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내가 글감을 얻는 곳은 매우 평범한 일상이다. 이른 아침 헬스장을 나오면서라던가, 지하철역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버스에 앉아 있던 도중이라던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떠오르면, 일단 아무렇게나 적어 놓는다. 그리고 이런 글 조각들이 충분히 모이면, 그제서야 하나씩 짜 맞춰서 글 한편을 써낸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넣고 이런저런 링크를 달아 블로그에 올리면, 새 글 한 편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대나 서울대 입구의 어느 카페에서 iPad를 옆에 둔 채로 뭔가 끄적거리고 있는 20대 후반 남자가 있다면… 그게 나다. 특히 카푸치노를 앞에 두고 틈틈이 소녀시대 제시카 사진을 꺼내 보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좋아하고 있다면 거의 100%다. 그렇다면 이제 답해야 하는 건 두 번째 질문, 그러니까 왜 글을 쓰느냐는 것일 게다.



2.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하나는 미리 계획을 잘 세우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요구 사항 변경에 최대한 유연하게(Agile) 대응하는 방식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두 방식이 모두 동일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라는 것이다. 작업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 물론 그들도 대략 이러저러한 게 있어야겠다… 는 정도의 어렴풋한 생각은 있다. 하지만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수학적으로 엄밀히 정의된” 수준엔 택도 없다. 중요한 내용들이 빠져 있거나, 정리가 잘못되어 있거나,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버젓이 함께 있거나 하는 식이다.

이 사례는 생각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사람의 생각은 지극히 두리뭉실하며, 애매모호하다. 심지어 그 생각을 하는 당사자조차 그걸 잘 모를 정도로.


심지어 수학자들이나 컴퓨터 전문가들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도 이런 사태가 어김없이 벌어진다는 걸 보면 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프로젝트가 됐건,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일단 뭐가 필요한지,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눈에 보인다. 미리 특정하게 정해진 형식의 문서에 요구 조건을 하나하나 기술해 가는 방식이든, 일단 컴퓨터 언어로 간략하게 기술한 뒤 관계자에게 보여 주고 유연하게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나가는 방식이든 말이다.



3.


흔히 공대생, 혹은 엔지니어는 글쓰기와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천만의 말씀이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생각을 엮는 작업이다. 이성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공학과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행위인 거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글쓰기는 기계 설계도 작성이나 전기 회로도 구성, 소프트웨어 코딩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내게 글을 쓰는 시간이란 두리뭉실했던 생각을 육화시키는 시간인 동시에, 생각의 편린들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나는 내가 이런 과정 없이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매일 쓴다.


버스에서 읽은 책 내용에 대한 간단한 메모에서부터 영어로 된 본격적인 기술 문서에 이르기까지. 블로그를 통해 공개되는 글들은 전체의 30%도 안 된다. 그리고 살펴본다: 빠진 것은 없는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은 없는지. 전체적인 모양새는 어떠한지.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생각 속을 들여다보고, 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4.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에 답하겠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한테 내가 하는 말은 딱 하나다: 지금 당장 시작해라.


텀블러건 워드프레스건 아무거나 하나 잡고 쓰기 시작하라는 얘기다. “글솜씨가 없어서 부끄러운데요.” “소재가 없는데요.” 이런 소리는 하지 마라.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단 써 놔야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게 될 것 아닌가?


소재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앞서 나는 글이 생각을 엮은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좀비가 아닌 이상 생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 그보다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은 뭔가? 그건 생각이 아닌가?


앞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자신의 생각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글을 잘 쓰고 싶다.” 이 소재 하나만 가지고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생각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나? 나는 어떤 글을 잘 쓰고 싶나? 현재 내 글에서는 뭐가 불만족스러운가? 내가 아는 글 잘 쓰는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그들은 보통 어디에 대해서 쓰나?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 문제는 첫 번째 질문인 “글을 어떻게 쓰십니까” 와도 연결되는 문제다. 글을 쓰려면 시간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소재도 있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소재를 얻을까? 좀 말장난 같지만, 글 쓰면서 얻는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내 스스로의 생각에 대해 잘 알게 되는 만큼 주변의 사물들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그러면 거기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새로운 소재도 나온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흔히 글을 잘 쓰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건 닭이 먼저나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다. 책을 읽는 이유는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스스로를 마주 본 적이 있었다는 얘기다. 스스로를 마주 보는 데 글쓰기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또다른 독서, 또다른 생각을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하다.


이따금 보다 보면 쓸 것이 없다, 소재가 다 떨어졌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충분히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물물은 퍼낼수록 더 나오듯이, 소재 또한 쓰면 쓸수록 더 나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소재 걱정 같은 건 하지 마라. 일단 당장 가지고 있는 소재를 가지고 쓰기 시작해라. 그러면 그 과정에서 소재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5.

최근 한 매체에서 '당신에게 이로운 13가지 새해 결심'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 첫 번째: “새로운 것을 배워라” 아직도 글쓰기를 안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새해에는 글쓰기를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는 것 또한 무시 못할 이점이다.


원문: 고레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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