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상 모델 알바 체험기~

조회수 2017. 5. 27. 16:01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나는 미술학원의 그 의자에 앉지 말았어야 했다..

두상頭狀 모델 알바 체험기

소요시간: 4시간
시급: 7,000원/시간
난이도: ★★★
한 줄 평: 찰나의 주마등을 영원으로 늘린 정신과 시간의 회전의자



1. 비루한 통장이 만들어낸 어떤 실수


꽤나 경이적인 보릿고개였다. 4팩에 2,700원 하는 요플레와 650원짜리 라면으로 꾸역꾸역 버티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단기 알바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잦은 술과 규칙적인 게으름으로 단련되어 엿가락처럼 나태해진 육신에 느닷없는 아르바이트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고질적인 빈혈로 택배 상하차 같은 고강도 알바는 쳐다보지도 못했고, 암암리에 인기가 많다는 생동성 시험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쉽사리 지원하기 어려웠다.

어째서 ‘상시 모집’일까……

강한 내적 갈등을 겪던 도중 발견한 것이 바로 미술학원의 두상 모델 알바였다. 홀린 듯 공고를 클릭해 들어갔다. 홍대 모처의 미술학원이라는 소개 글이 나를 반겼다. 미술학원. 그 학구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단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사생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으스대던 어린이를 떠오르게 했다. 물론 훗날에 밝혀졌지만 나는 예술과 관련해서는 보노보 침팬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똥손이었고, 장담컨대 그때 받은 최고상은 공무원의 태업 혹은 일종의 전산 오류였으리라. 


어쨌거나 여러 가지 것들이 흡족스러웠다. 우선 ‘모델’이라는 단어. 무언가 고상한 울림이 있는 것이었다. 추가적으로 ‘미술학원’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깔끔한 분위기와 나부끼는 커튼, 하얀 벽지와 캔버스, 눈을 감고 앉아있는 모델 같은 정갈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 어쩌면, 아름다운 미대생이라든가 뭐 그런 사람도 뭐, 있지 않을까.

미술학원에_대한_아주_잘못된_상상.jpg

부푼 가슴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지체없이 지원했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내일 6시까지 홍대 모 학원으로 오라는 답신이 왔다. 내심 기쁜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지원자가 별로 없나? 왜 이렇게 답장이 빨라? 혹시 원양어선이 아닐까? 


문득 내 통장 잔고가 떠올랐다.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2.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산도 없는데 길을 몇 차례 잃었다. 가까스로 찾은 학원으로 황급히 뛰어들어 갔다. 문 너머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스케치 준비를 하는가 싶었다. 밝게 인사하며 육중한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잠시 간의 정적 후 덩치 큰 남학생들이 거대한 찰흙 더미를 옮기며 날 쳐다봤다. 동시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술학원보다는 대장간 혹은 유도 도장과 흡사한 그곳, 수많은 사람의 머리가 박제처럼 전시된 그곳은 흙으로 사람의 머리를 빚는 조형 입시학원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 머리가 많았다. 정말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나도 모르게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양감이 짙은 우람한 상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관장, 아니 원장님이 나를 인도하셨다. 그는 훌륭한 바리톤 목소리로 정신없이 연락처니 계좌번호니 하는 것들을 쓰게 한 후 내 머리에 ‘삔’을 두 개 꽂았다. 친절하게도 ‘이마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하고 일러주셨다. 여전히 땀은 멈추지 않았다. 거울 안에는 젖은 채 머리에 삔을 꽂은 남자가 상기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포위… 아니 작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중 제일 덩치가 크며 호전적인 인상의 사나이가 ‘모델님-‘ 하고 나를 부르더니 중앙의 의자에 앉혔다. 거의 9척에 가까운 거인이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얌전히 앉았다. 그가 작품을 만들다 흥분한 나머지 내 두상까지 부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여기에 앉아 숨도 쉬지 마세요”라는 환청이 들렸다.

3. 인생은 회전의자


공포와 정신없음 사이에서 방황하던 와중에 내 긴장을 풀어주는 단어는 ‘모델님’이라는 호칭이었다. 어떤 시인이 그러지 않았던가. 이름을 불러주던 순간, 비로소 꽃은 꽃이 되었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델이라고 불리는 순간 나는 10년 차 모델의 자세를 장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크고 강한 학생에게 전달받은 내 업무는 매우 간단명료했다.

정면을 보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가,
5분 경과를 알리는 소리가 나면 90도 오른쪽으로 돈다.
그렇게 4번,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사이클 종료.
총 5번의 사이클이 끝나야만 여길 떠날 수 있다.

오래전 무인도에 가까운 외딴 섬에서의 군 생활도 버틴 나였다. 명상이든 공상이든 가만히 앉아있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아련한 표정 연기나 역동적인 포즈를 주문할까 봐 몰래 연습을 해두었는데 무표정이라는 싱거운 지침이 못내 아쉬울 뿐.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7개의 개인 작업대가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삐- 소리와 함께 초침이 움직였다. 학생들이 찰흙 덩어리를 뼈대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자세와 무표정은 한 시간이 지나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자세가 되었다.

…자 이쪽을 봐주세요.
조금 더 이쪽으로.
고개를 조금만 왼쪽으로 돌려주시겠어요?
아뇨. 오른쪽 말고 왼쪽이요.

모래성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가는 균형과 표정에 학생들과 원장님은 예술적 엄격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교정을 요구했다. 대답도 못 하고 가위눌린 사람인 양 사지를 움찔거리던 나는 괜스레 서러워져 항의하고 싶었지만, 저 큰 찰흙을 가볍게 다루는 그들의 근력으로 내 자세를 영원히 교정해줄 것만 같아서 곧 그만두었다.

눈을 깜빡여서 죄송합니다…

4시간 동안 명상이나 하며 내 척추처럼 비틀린 인생에 대한 반성과 미래설계에 힘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5분마다 울리는 삐익- 소리와 틈만 나면 정면으로 와서 이맛살을 찡그리며 내 두상이며 이목구비를 면밀히 관찰하는 학생들 덕분에 여간 쉽지가 않았다. 


그들은 두셋씩 무리 지어 와서는 흠칫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골똘히 무언가를 조사하곤 했는데, 주로 자신의 손을 척도로 내 귀의 길이며 콧구멍의 크기, 턱의 각도와 높낮이 등을 가늠한 후 돌아갔다. 나는 코끝이 간지러웠고 벌컥벌컥 들이켠 녹차 때문에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프로페셔널한 모델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냥, 기저귀를 입고 왔으면 참 좋았겠다고, 그런 공허한 생각들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4. 값진 노동의 대가, 그리고…


휘몰아치는 잡생각들 가운데서도 바른 자세가 안겨주는 고문은 영원처럼 계속되었다. 알고 보면 지옥은 모든 의자가 두상 모델 회전의자인 공간을 부르는 말이 아닐까.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들을 모아 영원히 두상 모델을 시킨다면 미술의 발전과 사회악 근절에 이바지하는 좋은 정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이쯤 다다를 무렵, 마지막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이제 도구를 사용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크고 투박한 손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내 속눈썹을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며, 철저한 소품의 입장에서 복제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시간에 쫓기는 학생들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리듬감 있게 뛰어다니는 학생들과 그들의 부족한 점을 열정적으로 지적하고 채찍질하는 원장 선생님, 흡사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여기서 내 역할은 드럼이다…

5분이 지나는 삐-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학생들은 더욱 바쁘게 뛰었다. 그들은 진지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면밀히 관찰하고 돌아가 손으로 거칠게 찰흙을 떼어내고, 짓이기고, 덧붙였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손놀림, 진정한 예술의 현장이자 처절한 창작의 시간이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에 감동한 나는 슬쩍 눈을 돌려 한 학생이 만든 나의 두상을 훑어보았다. 


웬 아프리카 고릴라의 형상이 다듬어지고 있었다.

혹성탈출 후속작 주연급의 모습이 눈앞에 존재했다.

저 학생이 똥손인 것일까 내가 고릴라를 닮은 것일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 마지막 바퀴가 끝났다. 원장님은 나를 중심으로 완성된 7개의 가짜 두상을 일렬로 늘어놓았으며, 각각에 대한 전반적인 피드백과 세부적인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내 분신들은 파괴되어 찰흙으로 돌아갔다. 살짝 불쾌하면서도 왜인지 기분이 좋아지는 장면이었다. 


고릴라를 빗어낸 친구는 질책을 들었는지,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듣기로 그는 내일 실기시험을 치러 간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그마한 응원을 보냈다.

힘 내ㅡ
너는 최고의 조형가가 될 거야.
[응원할게ㅡ]

추신 


그 날 나는 4시간 노동의 대가로 3만 원가량의 일당을 받았으며, 당일 신촌에서 강 군, 탁 군과의 인형 뽑기로 모든 금액을 탕진하였다.


원문: Twenties Timeline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