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한가운데서 그를 보내다

조회수 2017. 4. 13. 2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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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의 홍수 속에 안간힘을 쓰며 구현하려던 저널리즘의 정수

※ 뉴미디어와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고 《뉴욕타임스》 종이신문을 오랫동안 열독해온 손재권 《매일경제》 모바일부 기자가 아래 글에 큰 영감을 줬습니다. 다만 본문 내용은 온전히 필자의 자료조사와 비평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기자는 작은 회의실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 앞에 4명이 둘러앉았다. 그들은 한창 잘나가는 어느 인터넷 미디어의 편집책임자들이었다. 젊은 인터뷰이들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늙은 인터뷰어는 무표정했다.


뉴미디어 기자들은 라이베리아 내전의 선정적 장면을 보도한 일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뉴욕타임스》가 한가한 기사를 쓰는 동안 우리는 직접 본 것을 전한 거죠.”

늙은 기자는 노트북 자판을 두들겨 패던 손가락을 멈췄다.

“잠깐, 타임아웃. 이것 봐요.”

1명의 늙은 기자는 구부정한 목을 들어 4명의 젊은 기자들을 노려봤다.

“당신들이 그 나라를 알기도 전에 《뉴욕타임스》는 라이베리아 대학살을 보도하고 또 보도했어. 당신이 사파리 모자 쓰고 거길 한번 가봤다 해서, 《뉴욕타임스》를 모욕할 권리를 갖는 건 아니야.”

젊은 기자들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물론, 저희는 저널리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늙은 기자는 그 말을 낚아채 패대기쳤다.

“맞아. (모르는 게) 분명하군. 그만 됐어. 그냥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요.”

이 할아버지, 뭐지? 나는 완전히 매혹됐다. 화면 너머의 그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오만함이 아니라 자부심이었다. 그가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미디어 전문기자 데이비드 마이클 카(David Michael Carr)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17년 차 기자로선 부끄럽게도) 지난해 여름, 아마존에서 직구입한 다큐멘터리 DVD를 노트북으로 보기 전까지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제목은 ‘페이지 원(Page One)’. 2010년 한 해 동안 《뉴욕타임스》 편집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미디어 부(Media Desk)’ 중심으로 취재한 다큐 영화였다. 뉴저널리즘의 거두인 게이 탈레시, 워터게이트 특종의 칼 번스타인, 취재원 보호를 위해 징역형까지 감수한 쥬디스 밀러 등 전설적 기자들과 함께 허핑턴 포스트의 어리나 허핑턴,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 뉴욕타임스의 빌 켈리 등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창업자 또는 책임자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그런데 다큐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라 어느 늙은 기자였다. 그는 틈만 나면 뉴욕타임스 본사 앞 길바닥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말할 때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나고 입술에선 침이 튀겼다. 후줄근한 외투에 꼬깃꼬깃한 비니 모자를 쓰고 다녔다. 기자가 아니라 노숙자의 행색이었다.

‘페이지 원’에 출연한 데이비드 카.

다큐는 (현실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에는 (현실의) 인물이 필요하다. 미디어 부장보다 나이 많은 평기자에게 ‘쇠락하는 올드 저널리즘’의 캐릭터를 부여한 것이구나, 속으로 다큐 감독의 의중을 짐작했다. 틀린 생각이었다. 다큐 감독이 그에게 성격을 덧입힌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늙은 기자 스스로 다큐멘터리 전체를 지배했다. 


데이비드 카가 등장하는 여러 장면 가운데 하나. 늙은 기자는 어느 날, 언론 관련 토론회에 참석했다. 또 다른 뉴미디어 창업자가 《뉴욕타임스》의 후진성을 비판했다. 가만 듣고 있던 늙은 기자는 (언제 준비해왔는지) 종이 한 장을 들어 청중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저 사람이 일하고 있는 뉴미디어의 인터넷 초기 화면입니다.”

뒤이어 다른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였다.

“그 많은 기사 가운데 《뉴욕타임스》가 쓴 기사를 모두 오려낸 결과입니다.”

종이의 절반 이상이 구멍 뚫려 너덜너덜했다. 청중은 웃었고 뉴미디어 창업자의 얼굴은 귀밑까지 빨개졌다. 늙은 기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해 없기를. 뉴미디어가 악이고 올드미디어가 선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전혀 아니다(진실은 대략 그 반대다). 다큐를 보는 내내, 그에게 완전히 매혹당한 나 자신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 빠져드는 것이지?


그 정체는 생경함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뉴미디어 앞에 당당한 올드미디어 기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한국(그리고 아마 세계)의 모든 기자들은 ‘뉴미디어라는 유령’을 만나 깊은 열등감에 빠져 있다. 지금까지 익히고 행한 일을 통째로 부정당한 상실감에 젖어 총에 맞은 새처럼 숨만 겨우 쉬고 있다.


그런데 늙은 기자는 달랐다. 뉴미디어? 무슨 기사를 쓰는데? 그게 좋은 기사 맞아? 다큐 안에서 그는 ‘기자를 비판하는 (동시에 가르치는) 기자’, ‘언론을 감시하는 (한편 인도하는) 언론’의 표상이었다. 뉴미디어의 폭풍 아래 홀로 우뚝 선 그는 갈피를 못 잡으며 멀미하는 기자들에게 호통치고 있었다. 뉴미디어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자의 뺨을 때리고, 뉴미디어라며 우쭐대는 기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 정체가 궁금했다. 구글을 두들기며 알아보니, 그의 형형한 눈빛은 어둠에 잠긴 지옥의 시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심리학과 언론학을 공부한 그는 1980년대 초반, 미니애폴리스의 어느 주간지에서 기자 이력을 시작했다.

촉망받는 기자는 아니었다. 그 무렵부터 마약에 손을 댔다. 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고, 이혼 뒤 마약 거래상인 어느 여성과 동거하다 쌍둥이 딸을 낳았다. 아버지 구실도 하지 못했다. 갓 태어난 두 딸을 차에 내버려두고 코카인을 사러 갔던 일이 빌미가 되어 (동거녀와 함께) 양육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그는 다른 여자와 두 번째로 결혼한 뒤, 쌍둥이 딸을 데려와 길렀다) 여기에 알코올 중독까지 겸하여 몇 차례 재활 치료를 받았다. 혈액암에 걸려 투병한 적도 있다.


그의 통찰과 문장은 비극적 삶을 거치며 진화했을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마약 중독과 싸우는 와중에도 미디어 관련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그는 2002년 《뉴욕타임스》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경제부에서 매거진·출판 기업을 취재했고, 이후 문화부에서 영화를 담당했으며, 최근 8년 동안 저널리즘과 뉴미디어를 다루는 전문 칼럼 ‘미디어 방정식(Media equation)’을 매주 월요일마다 고정 연재했다.


그의 칼럼은 신문, 방송, 라디오, 인터넷, 영화 등 모든 매체를 넘나들었고, 저널리즘, 언론시장, 뉴미디어, 테크놀로지 등 모든 시각을 가로질렀다. 그의 칼럼은 직설적이고 명쾌하면서도 위트 넘쳤다. 대체로 모든 사안에 냉소적 톤을 드러냈으나, 독자들은 통찰로 가득한 그의 냉소를 통해 언론의 치부와 첨단을 헤집어 보았다. 그는 《뉴욕타임스》를 대표하는 칼럼니스트가 됐다.


그의 칼럼을 읽어온 손재권 《매일경제》 모바일부 기자는 ‘미디어 방정식’의 가장 큰 장점으로 ‘시의성’을 꼽았다. 구름에 달 가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논평이 아니라, 최신 뉴스를 직접 취재하여 이에 대한 시각을 제공해왔다는 것이다. 비록 다큐에서는 뉴미디어 관련자를 여러 차례 패대기쳤지만, 정작 그 자신은 뉴미디어를 적극 수용했다. 그가 쓴 글 가운데는 “이제야 언론의 전성기가 왔다”며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찬탄하는 내용도 있다.


그가 최신 흐름에 바탕을 두고 끝없이 저널리즘의 혁신을 도모했던 흔적은 곳곳에 있다. 2008년 그는 자서전 『총의 밤(The Night of the Gun)』을 《뉴욕타임스》에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마약 중독 시절을 회고하는 글은 (적어도 미국에선) 드물지 않다. 이 책의 특별함은 그가 자신의 기억에 바탕을 두되, 이와 관련한 주변 인물 60여 명을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다시 조사하여 그 기억의 진실성을 되묻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데 있다.

자서전 『총의 밤』과 출간 당시의 데이비드 카.

『총의 밤』은 한가한 회고록이 아니다.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에 기초하여 사실을 재구성하는 기사는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동시에 그것은 무너져 내린 한 인간에 대한 냉철한 관찰에 바탕을 둔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새로운 지평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여러 자리에서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내러티브 기사의 확장성에 대해 강연했다. (물론 그는 언론과 관련된 거의 모든 강연, 토론, 대담 등에 초대되어 발언했다) 지난해부터는 보스턴대학 언론학과의 초빙교수가 되어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현대 언론을 강의했다. 그는 뉴미디어 시대를 참된 저널리즘의 전성기로 보았다.


다만 그가 지독하게 경계한 두 가지가 있다. 영혼과 철학이 없는 언론,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영혼과 철학을 약탈하는 독점 언론시장이었다. 그가 뉴미디어 관련자들을 혼낸 것은 그들의 ‘뉴미디어’가 아니라 그것에 담는 ‘저널리즘’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훼손하는 신생 미디어의 엉성한 기사를 매섭게 비판했고, 저널리즘을 이윤논리로 덮어버리는 거대 미디어 기업의 전횡을 타격했다.


다큐멘터리와 같은 제목의 책 『페이지 원』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뉴스가 전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클릭 한 번으로 읽어 버리는 시대에 《뉴욕타임스》의 가치는 무엇인가? 신문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하거나 트위터에서 왜곡된 내용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때 웹에서 좋은 뉴스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웹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웹의 시대에도 제자리를 지키는 진정한 저널리즘을 갈구했던 것이다.

논평만 쓰는 한국의 칼럼니스트와 달리 데이비드 카는 칼럼과 함께 탐사취재도 종종 진행했다. 다큐멘터리 ‘페이지 원’의 마지막은 그의 탐사보도에 대한 것이다. 전통의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의 모기업인 트리뷴 컴퍼니를 돈벌이를 위해 인수한 랜디 마이클은 경영 논리를 앞세워 언론사를 말아먹었다. 데이비드 카는 그의 부패를 오랫동안 추적해 보도한다. 저널리즘을 황폐화시킨 악덕 언론사주는 그의 기사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다. 악덕 사주가 물러나던 날에도 늙은 기자의 표정은 변함없이 덤덤했다.


구부정하고 추레하고 가난하여, 줄담배와 개 한 마리를 벗 삼은 노년의 신문기자가 뉴미디어의 홍수 속에 안간힘을 쓰며 저널리즘의 정수를 구현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다음, 나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다. 연민과 상련이 덩굴처럼 자라나 가슴을 채웠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한국 언론의 단신 보도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덩굴에 불을 지폈다. 2015년 12일 저녁 9시께, 데이비드 카는 뉴욕타임스 본사 편집국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미 CIA의 내부 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을 다룬 다큐 영화가 개봉했는데, 이를 비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직후였다. 사인은 폐암 합병증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뉴욕타임스》는 다음날 신문 1면에 부음 기사를 실었다. ‘데이비드 카,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이자 언론의 제왕, 58세로 사망하다.’ 언론의 제왕은 언론사주가 아니라 미디어 전문기자라고 그 신문은 똑똑히 적었다. 그 신문의 발행인 아서 옥스 술즈버거 주니어는 “뉴욕타임스에서 지금까지 일한 기자 가운데 가장 재능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애도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데이비드 카 부음 기사.

돌연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스》는 발 빠르게 관련 기사를 신문과 인터넷에 동시에 실었다. 생전의 주요 기사와 칼럼, 주요 발언, 주요 대담·토론 영상 등을 링크해 게재했다. 그 가운데는 데이비드 카의 어느 동료가 쓴 추도의 글도 있다. 

우리는 그가 그 상태로 영원히 살 것이라 믿었다. 담배 피고 커피 마시고 밤을 꼬박 새워 일하고, (우리에게) 친구처럼 말하고 말하고 거듭 말하면서. 물론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있다. 당혹하여 슬퍼하면서,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세계 최고의 언론이라는 그 신문에 실린 추도사를 읽으며 깨달았다. 지금 한국 언론에 필요한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라 뉴미디어의 폭풍 아래 저널리즘의 정수를 온전히 보존하여 이 항해를 계속 이어가게 할 어떤 기자다. 미국 기자들은 데이비드 카가 떠난 자리에 모여 슬퍼한다. 한국 기자들은 그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한 자리에 모여 그저 허허로울 뿐이다.


원글: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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