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성직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조회수 2017. 4. 11. 22: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가족과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더라도 소명을 저버리지 않을 사람만이 그 길을 가야 한다.

몇 주 전에 우연히 기사를 검색하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뭔가에 북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내가 사진 한 장에 왜 이런 남사스런 눈물을 흘린건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볼 수 없었고, 사무치게 그리웠으나 만날 수 없었던 참된 ‘성직자’의 모습을 너무도 오랜만에 본 감동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위대와 진압경찰과의 충돌 한가운데 서있는 우크라이나의 동방정교회 신부들

성직자는 왕? 변질된 성직주의


지금껏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너무나 많은 ‘개념없는’ 목회자들 땜에 큰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 때문에 교인과 성직자를 엄격히 분리해서 서로 다른 기준과 책임을 요구하는 ‘성직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과 분노를 갖고 있었다.


적어도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경험한 ‘성직주의’는 교인과 성직자의 역할의 차이만을 의미하는 수평적 직분의 개념보다는 위계적 계층구조의 귄위적 상하개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많은 개신교 목회자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교인들 위에 특별한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려 든다. 그리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으로 ‘높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명령하고 무슨 짓을 해도 용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딸뻘 되는 여성도 몇 명쯤 건드리는 성범죄를 저지르건, 수십억에서 수백억 헌금을 횡령하건, 학력 사칭과 논문을 대필하건 자신의 범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다고 강변하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3,000억짜리 건물을 지어 지탄을 받은 강남의 모 대형교회는 최근 정관을 개정했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정말 가관이다. 성도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성도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한다. 정작 성도가 자신이 낸 헌금이 투명하게 사용되는지 ‘재정장부 열람’을 하려면 공동의회 투표를 소집해서 2/3이상 찬성을 받아야 한단다. 보통 등록교인수 대비 실제 출석교인은 2/3가 안되는 경우가 많아 이런 경우 투표가 실제로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성도의 재정적 ‘의무’는 당연하지만,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성도의 ‘권리’는 철저히 박탈하고 있다.


누가 봐도 ‘왕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왕 되신 오아무개 목사를’ 위한 정관이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목사는 왕이고 성도들은 목사와 교회를 섬기는 노예라는 이야기 아닌가?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성직주의’는 ‘성직자만을 위한 이익과 권력의 욕망을 채우는데 성도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성직주의 아닌가?



‘성직주의’가 진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성직’은 말그대로 거룩한 직분이라는 뜻이다. 거룩함이란 의미는 ‘구별되다’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고 한다. 결국 성직자는 이 땅의 속물적 가치관, 돈과 권력이 최고인 가치관과 다르게 ‘구별된’ 기준으로 사는 존재들이란 뜻 아닐까? 그러기에 그들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맘몬(황금의 우상)’과 권력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공평과 정의, 사랑’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을 지배하는 ‘돈과 권력’의 ‘이기적 욕망’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화합할 수 없다. 성직자들이 구별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한 사회나 공동체의 대다수가 ‘자본과 권력’의 이해관계로 작동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들이 가장 ‘비인간화되는 삶’을 향해 나아갈 때, 어떤 이해관계에도 얽매임 없이 그 사회가 듣기 싫어하는 ‘다른 메시지’, 즉 가장 양심적이고 올바른 선지자적 외침을 외치며, ‘다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한 성직자의 대표적인 예가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이었고 신약에서는 선지자 세례요한과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부패를 드러내 성전을 뒤엎었던 예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성직자의 소명과 역할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엄밀히 말하면 개신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직자’의 길을 가겠다는 목회후보생들이 목회현장에서 발견하는 교회의 비리, 담임목사의 비리 앞에 자기 생계와 앞날의 안위를 위해 침묵한다. 정권의 폭압과 눈에 뻔히 보이는 온갖 불의 앞에서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불의에 침묵한다. 거대기업과 자본의 횡포로 무수히 많은 노동자가 죽어 나가도 그 기업 사장이 ‘장로’이고 그 기업이 ‘크리스천 기업’이라며 그들의 편에 선다.

사회 속에서 그 어떤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도 자유로워야 할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양심의 소리, 선지자적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갔는가? 영향력 있는 모든 언론이 권력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진실을 왜곡하는 이 나라에서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하며 용감하게 진실을 외치는 성직자들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성직자’가 ‘성직자’로 구별된 이유는 다수의 힘없는 인간들을 착취하며 이 땅을 다스리는 돈, 권력, 모든 욕망의 우상인 ‘맘몬과 바알’의 위세 앞에 무릎 꿇지 말고 하늘의 원리로 이 땅의 잘못된 것을 싸우고 고치라고 구별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싸움을 위해 끝내 그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면 기꺼이 피를 흘려 그 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만들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 성직자 아닌가? 우크라이나 성직자들이 폭력과 갈등의 최전방에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져 십자가를 들었듯이 말이다.


 

성직자들이 남발하는 ‘공허한’ 진통제


그러나 대부분 성직자들은 자신이 피를 흘려 싸워야 할 싸움의 공간을 ‘성도 개개인의 영혼 안’으로만 한정하며 정작 성도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 속의 온갖 문제는 기꺼이 외면한다. ‘모든 문제는 당신이 마음먹기 달려있고 결국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공허한 진통제와 천국행 처방전을 남발하면서 말이다. 그 약들이 얼마나 효과가 없고 공허한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이자 세대별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각종 지표가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한다는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자살 공화국이라는 이 극명한 모순이 말하는 게 무엇일까? 결국 성직자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한 성직주의가 아니라 거짓에 맞서 진실을 말하고 어그러진 공평과 정의를 위해 가장 큰 불이익을 감수하고 앞장서는 성직자들이 내세우는 ‘성직주의’라면 기꺼이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종교를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세금이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 예레미야서 33:15 새번역

“나를 따르라” 아무나 성직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


가끔 교회에서 목회자들과 다른 생각과 견해를 직설적으로 쏟아 내거나 목회자들에게 덤볐더니, 내가 성직자들을 정말 우습게 아는 교만한 교인으로 오해받을 때가 많다. 많은 교인은 ‘목사’라고 하면 다 똑같은 부류로 보지만 난 ‘목사’들 중에도 ‘성직자’와 ‘종교 직업인’을 구분해서 대우할 뿐이다.


절대 생계를 위해서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나, 권력을 위해서는 들어서지 말아야 할 길이 ‘성직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만큼 성직자는 엄중한 책임감과 용기, 희생, 헌신이 요구되고 심지어 자기 가족과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더라도 절대로 성직자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을 사람만이 성직자의 길을 가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 마태를 부를 때 하신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마태복음 9:9 개역개정

난 이 구절을 다시 읽고 묵상할 때마다, 성직자가 아닌 그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도 너무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깊은 탄식이 나올 때가 많다. 일개 성도도 이런 부담감을 느끼는데 목회자들은 더욱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고난을 겪고 결국 당신 목숨을 버리게 될 때까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다(누가복음 4:18, 19)”.


지금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주로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가난한 자, 포로(노예)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의 편인가? 아니면 가진 자, 노예 삼는 자, 눈 멀게 하는 자, 억압하는 자인가?


국민일보만 보지 말고 일반 신문과 인터넷 뉴스 사이트를 조금만 뒤져보면 지금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주로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저 두 부류의 사람 중 누구 편을 드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성직자 여러분,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