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식민지가 된 삶에 대하여

조회수 2017. 4. 7. 2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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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재미'가 사라진 시대, 공부의 식민지가 된 대한민국

※ 이 글은 엄기호·하지현 선생님의 저서 『공부 중독: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의 서문을 발췌·편집한 것입니다.


나는 공부의 자식이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공부로 지금에 이르렀고, 공부로 먹고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공부를 계속하며 살 것 같다. 공부를 싫어하며, 앞으로도 공부를 계속하며 살 것 같다.


공부를 싫어하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공부하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우고 그럴 때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하고 뺄 것 없는 공부의 자식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공부하는 게 재미없고 가르치는 게 고역이다.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으며 학생들에게 내가 배운 걸 이야기해줄 때도 쾌감이 없다. 배우고 가르치는 게 기쁜 일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일이 되었다. 공부가 이렇게 무의미하다고 느껴본 적이, 공부를 매개로 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지겹기만 한 적이 없었다. 그 살벌한 입시 경쟁을 치렀던 고등학교 때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다.



공부하는 ‘재미’가 사라지는 시대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공부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외려 삶을 질식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짝짝짝. 서커스 보고 박수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관객이 떠나고 난 다음 빈 서커스장에서 목에 족쇄를 차고앉아 있는 원숭이가 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르치는 내가 이런데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은 어떨까?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들 역시 원숭이가 된 느낌이라고 한다. 배우긴 배우는데 뭘 배우는지 모르겠고, 배웠기는 배웠는데 할 줄 아는 건 없다. 배워서 알면 그 아는 것을 익혀서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드는 익힘의 과정은 공부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그래서 나보다 잘난 원숭이가 떠드는 말을 머리에 쑤셔 넣고 경탄하고 끝난다. 그리고 다음 원숭이의 말을 머리에 채워 넣기 위해 서둘러 다른 강의실로 떠난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럴수록 사람들은 더 ‘공부’한다. 공부만 한 것이 문제의 근원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격이다. 자기 자식과 문제가 생기면 자식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거나, 혹은 서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떨어져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하는데 반대로 상담을 공부하러 간다. 상담을 공부해서 자식을 대하는 기술이 늘어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애초에 상대를 그렇게 공부를 통해 배운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였으니 말이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


공부가 재미없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를 하면 언어를 배우게 된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늘어나는 것이 공부의 과정이다. 예를 들면 ‘구조’라는 말을 알 때와 그러지 못할 때 세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획기적으로 달라진다. 공부는 사실 이렇듯이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일어난다. 세상과 삶이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추상화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언어도 삶을 그 자체로 풍부하게 재현할 수 없다. 모든 재현은 불가피하게 삶을 추상화하고 규격화한다. 이 규격화의 과정에서 자칫하면 삶이 도식적인 것으로 분해되고 내가 겪었던 경험은 형해화된다. 대신 그 자리를 개념들이 차지하면서 나의 경험은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구체적 삶은 왜소해지고 대신 이미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어떤 개념들이 그 구체적 삶의 자리를 분해한다. 나의 삶은 그 개념들의 지식 권력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내가 아는 공부는 반대였다.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미 권력화한 지식에 포획되지 않은 ‘삶’을 포착하려는 것이었고 그 삶이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공부였다.


그랬기에 공부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그런데 이런 삶의 도구로서의 공부가 어느 순간부터 내 옆에서 사라졌다. 나 또한 그런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를 잊어버린 것처럼 공부한 것으로 삶을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그건 참으로 편리한 것이었고 편리한 만큼 유혹적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공부는 ‘공부는 열나게 하지만’ 삶에 대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공부한 것으로 적당히 적용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판기에서 캔음료가 나오듯이 삶은 적당히 설명되었고, 그 설명된 것만으로도 지식을 팔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공부 중독에 빠진 대한민국

출처: JAWBONE

나는 하지현 선생과 대담을 하면서 이렇게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되는 것, 즉 공부 중독 현상이 나만, 내 강의실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빠진 모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구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하게 중독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회학자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상담이 아닌 공부가 지향하는 것이 개별성이 아닌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이 대담은 나로 하여금 내가 빠진 현실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대담에서 오랜만에 공부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강조한다면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하지현 선생과 함께 우리에게 공통의 것으로 주어진 동시대성을 공부를 화두로 찾아보려고 했다. 공부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려고 했다. 이 동시대성을 자각하는 동시대인을 지향하기 위해서 때로는 세대론이라는 방편을 쓰기도 한다. 세대론은 한 특정 시기에 태어난 동년배들의 문화적 특성을 집단화하지만 그 집단화는 종국에는 동시대인이라는 보다 큰 보편성 속에서 용해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에서 때로 나는 ‘요즘 애들론’과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그건 이 동시대인으로 가기 위한 방편이지 결코 그걸 지금 청년 세대의 특성으로 본질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동시대성의 발견과 그 동시대성에 공동으로 대결하는 동시대인의 형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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