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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걸그룹이자 최초의 한류스타 ‘김시스터즈’ 이야기

이 '원조 걸그룹'의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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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원조 걸그룹이 있었습니다.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의 이 걸그룹은 이미 1950년대에 미국 진출까지 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한류스타인 셈이죠. 팝 음악의 본토인 미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한국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 이미 한국 최초의 원조 걸그룹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저고리시스터즈’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젝트 걸그룹인 셈이죠. 심지어 김시스터즈는 저고리시스터즈 멤버의 딸이라는 독특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한류스타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즈


1953년, 세 명의 소녀는 걸그룹을 결성하여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미8군’의 무대에 섰습니다. 김숙자, 김애자, 김민자로 구성된 이 그룹은 겨우 1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가창력과 퍼포먼스로 관중을 휘어잡았고 미8군무대에서 유명해졌습니다.


한국은 1950년부터 3년간 치른 6·25전쟁으로 연예산업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연예인들은 미군이 운영하는 쇼 무대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저고리시스터즈’로 활약했던 이난영은 이 김시스터즈를 한류스타 원조 걸그룹으로 키워냈습니다.

김시스터즈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공연 모습. 김시스터즈는 춤, 노래, 연주, 퍼포먼스 등 모든 방면에서 출중한 엔터테이너였다.

미국 병사들 사이에 김시스터즈에 대한 입소문이 퍼졌고, 결국 미국의 한 에이전트와 연결되었습니다. 1959년 8개월짜리 공연계약을 맺은 이들은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로 떠났죠. 해방 이후 최초의 해외 진출이며, 원조 한류스타의 첫걸음인 셈입니다. 어찌 보면 세계 최초의 걸그룹을 평가받는 ‘슈프림즈’보다도 먼저 도전한 걸그룹인 셈입니다.


이들은 월 400달러의 조건으로 시작했지만, 1년 후에는 한 주에 1만 5천 달러를 받는 유명인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이 2천 달러도 되지 않던 시대였지만,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액 세금납부 4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분장실에서의 김시스터즈. 이들의 모습은 영화 <다방의 푸른 꿈>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의 김시스터즈는 17세와 15세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각 멤버들은 피아노, 기타, 드럼, 베이스, 색소폰, 백파이프 등 20여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거기에 가창력과 춤까지 갖추고 있었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두 시간 정도의 공연은 가볍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등을 다니며 유명세가 더해지자, 당시 유명 쇼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는 비틀즈가 세계무대로 진출할 때 처음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입니다. 김시스터즈는 이 프로그램에 비틀즈보다도 많은 22회를 출연하였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김시스터즈.

김시스터즈는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애칭을 얻으며 유명 잡지인 <라이프>지에도 등장했습니다. 특히 <찰리브라운>이라는 곡은 흥겨운 락앤롤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국내 뉴스 중에는 빌보드 7위에도 랭크되었다는 기사들이 있지만, 실제로 빌보드차트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니 좀 더 조사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시스터즈는 이후 14년간 미국에서 연예활동을 하다 멤버의 결혼과 함께 해체되었습니다. 현재 김숙자 씨는 미국에, 김민자 씨는 헝가리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애자 씨는 폐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들은 종종 한국 방송에도 출연하곤 했다.



영화 <다방의 푸른 꿈> : 김시스터즈 이야기


최근 싸이가 미국 빌보드에 오르며 크게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1950년대 말로,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김시스터즈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김시스터즈는 어떻게 결성된 것일까요? 바로 생활고 때문입니다. 이들을 만든 이난영은 일제강점기 ‘저고리시스터즈’라는 가수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편이 납북되자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죠. 이에 이난영은 자신이 가진 ‘저고리시스터즈’의 경험을 떠올리고 소녀 트리오를 결성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두 딸과 조카를 가수로 키울 생각이었죠.

출처 : <저고리시스터즈의 다방의 푸른 꿈>

남편이었던 가수 김해송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김숙자, 김애자와 작곡가였던 오빠 이봉룡의 딸인 이민자가 멤버로 합류하였습니다. 김시스터즈가 성공한 이후 아들들로 구성한 ‘김보이스’도 결정하였으나 김시스터즈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의 ‘연습생’ 시절은 무척이나 혹독했다고 합니다. 워낙 가난한 시절이었던 탓에 물리적으로 힘겹기도 했거니와 나이도 무척 어렸죠. 그래서 이난영은 “성공하면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당시에는 무척 보기 어려운 과일이었으니까요)”라는 말로 멤버들을 달래며 힘겨운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이때 멤버들의 나이는 겨우 13세, 11세였다고 합니다.

김시스터즈는 자유롭게 악기를 다룰 수 있었다. 이는 김시스터즈의 음악적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미국시장에서 통한 비결이기도 하다.

영어를 배운 적이 없어서 팝송을 연습할 때는 한글로 음을 적어가며 연습했죠. 결국 이들은 미8군 무대에 데뷔하며 진짜 바나나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걸그룹은 노래를 몇 소절씩 나누어 부릅니다. 하지만 김시스터즈는 전곡을 하모니로 같이 부르며 여성 보컬 그룹의 장점을 잘 살려내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잘 훈련된 가창력, 춤, 악기 연주 등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은 당시에도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공연 분위기를 주도하는 퍼포먼스도 강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죠.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그가 자신의 딸, 조카와 함께 미국 TV 방송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김시스터즈는 한국에서 <김치깍두기>라는 노래로 유명해졌으며, 미국에서는 <찰리브라운>이라는 노래를 히트시켰습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최초로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하였습니다. 이들이 미국에서 성공한 후 윤복히, 김치캐츠, 패티김, 김보이스 등이 미국 진출을 이루어냈고, 1959년 이후 한국에서도 다양한 여성 그룹이 생겨났습니다.


한국에서는 ‘김치깍두기’, 미국에서는 ‘찰리브라운’이 히트곡으로 대표되는 김시스터즈는 아시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입니다. 저고리시스터즈가 최초로 활동한 원조걸그룹이라면, 김시스터즈는 최초로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한 걸그룹입니다.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성공한 후 윤복희, 김치캐츠, 패티김, 김보이스 등이 미국 진출을 이루어졌고, 1959년 이후 한국에서도 여러 여성 그룹이 생겨났습니다.


리메이크하여 부른 <찰리브라운>을 들어보면 우리말로 익살맞은 멘트도 들어있습니다. 성공한 그룹으로서의 여유가 느껴지는 곡이죠. 당시 김시스터즈는 미국의 톱스타였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공연을 가질 정도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김시스터즈의 해외진출 이후 아들들로 이루어진 김보이스도 진출하였다. 미국 TV방송에서 함께 연주 중인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스.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


김시스터즈가 정규 멤버와 정규 앨범을 가진 걸그룹이라면, 저고리시스터즈는 지금으로 치자면 ‘프로젝트 걸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시스터즈가 해외에서 이름을 알려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면, 저고리시스터즈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노래로 조국을 위로하였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는 1935년 결성되었습니다. 4인조 여성보컬그룹으로 구성되었죠. 이난영, 박향림, 장세정, 이화자가 그들이었습니다. 또한 이준희, 김능자, 서봉희가 같이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곧이어 김해송, 박시춘, 송희선, 현경섭, 이복본으로 구성된 남성 보컬그룹 ‘아리랑보이즈’도 선을 보였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의 사진. 이난영, 박향림, 장세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멤버들의 이력도 쟁쟁합니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한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가수입니다. 너무나 애절한 목소리 때문에 슬픈 이미지가 강하지만, 원래 모습은 매우 발랄한 여성이었죠. 한국의 초기 재즈 가수이기도 합니다.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은 이난영의 재즈적 음악성이 살아 있는 명곡입니다.


박향림은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곡으로 유명합니다.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노래로, 2000년대에 들어와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한 노래입니다. 장세정은 <연락선은 떠난다>로 유명한 가수이며, 이화자는 민요 가수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서봉희는 무용가로 활동했죠.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와 공연하는 저고리시스터즈의 모습.

저고리시스터즈는 OK레코드사의 기획 작품입니다. 당시 OK레코드는 <타양살이>의 고복수와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히트시킨 기획사 겸 앨범회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저고리시스터즈는 지금의 걸그룹처럼 노래와 춤이 결합된 다양한 공연을 하였다고 하죠.


그 후 아리랑보이즈의 김해송과 저고리시스터즈의 이난영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해방 후 김해송과 이난영 부부는 KPK악극단을 조직하여 꾸준히 연예 활동을 하였죠. 이런 부모의 피가 김시스터즈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 같습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김시스터즈가 공연을 가진 후 찍은 기념사진. 김시스터즈는 마릴린 먼로와도 공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해송은 6.25전쟁에서 납북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이난영은 김해송 없이 KPK쇼단을 구성해서 연예활동을 지속하려 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그룹이 김시스터즈인 셈입니다.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은 김시스터즈의 결성과 연습과정, 데뷔와 미국활동기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 제목은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제목에서 따왔죠.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은 잊혀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머나먼 타지에서 일구었던 푸른 꿈은 이렇게 80년이 지나 걸그룹의 초창기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원문: 키스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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