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기본소득 그림이 주는 혼란과 오류

조회수 2017. 3. 15. 16: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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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에서 무한대를 창조하는 무한동력 창조경제?

이재명이 지난 2월 올린 그림이 최근 활발하게 공유되고 있다.

이 그림은 대단히 여러 부분이 잘못되고 여러 가지 개념이 섞여 있어서 사람마다 지적하는 부분이 다 다른데, 그것들을 최대한 한 글에 담아 보았다. 예를 들면 본문 중에서 “정책 시차”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재고관리 결정” 같은 주제는 이 글에선 한 문장만 적었지만 글 하나로 비판할 수도 있는 주제다.



1


일단 저 그림은 호텔, 침대, 치킨, 문방구를 모두 10만 원으로 상정하여 혼란을 준다. 예시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각 재화가 무엇인지는 그냥 생각하지 말고 특정한 재화라고만 하고, 10만 원이란 단위도 100만 원을 넣든 1,000만 원을 넣든 의미는 같으니 그냥 같은 단위라고만 생각하자. 

2


그리고 저 그림에 생산활동이 전혀 없으므로 “거래”만 일어났고 생산 활동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그림을 간단히 그리다 보니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하자. 또한 실제 침대 판매점과 치킨 판매점, 문방구의 생산활동 기여분은 거래 가격이 아니라 딱 소매점이 기여한 부가가치 수준이겠지만 그것도 무시하자. 즉 침대 치킨 문방구 모두 10만 원에 준하는 생산활동이 이뤄졌다고 생각하자.

 


3


저 그림은 정부재정지출승수, 이른바 “재정승수”의 실현 과정과 비교할 수 있다. 재정승수는 1을 투입하여 n을 만든다. 그런데 저 그림은 1을 투입하여 무한대를 만들고 그나마 1도 회수할 수 있다고 한다. 둘은 아주 중대한 차이다. (무한동력이냐 아니냐!)


저 그림에서 무한대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저 그림은 침대-치킨-문방구-호텔로 돌아왔지만, 만약에 문방구가 호텔에서 빌린 돈을 갚지 않고 다른 재화를 또 구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저 그림은 무한대가 만들어진다. 무한대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우연히 문방구에서 멈춘 것이다.


이 때문에 저 그림이 “경제순환 원리를 알려주므로 유효하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더 정확하게 1을 투입하여 n을 만드는 재정정책의 유효성을 말할 수 있는데 저 그림은 0을 투입하여 무한대도 만들 수 있으며 재정정책 유효성 말고도 다른 것들도 섞여 있기 때문이다.

 


4


재정승수가 무한대가 아니라 n인 이유는, 사람들이 돈이 생겼을 때 그걸 반드시 죄다 쓰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한계소비성향은 1이 아니라 0과 1 사이에 있다. 이재명 그림 버전으로 설명하면 10만 원이 생겨도 9만 원만 침대를 구입하고, 8만 원만 치킨을 구입하며, 7만 원만 문방구에서 쓴다. 그래서 문방구가 다른 재화를 또 구입해도 결국 그 양이 계속 줄어들어 60-90만 원 정도에서 멈춘다.


여기에 당장 쓰지 않고 나중에 쓴다든가 하는 정책의 시차 문제도 있고, 앞에 2번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 생산활동은 여러 생산 공정의 조합이며 생산이 이루어지는 결정은 재고관리 결정과도 결부되어 있다는 부분도 크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금액은 반드시 갈수록 줄어든다. 또한 재정정책과 이전지출의 차이도 영향을 미치지만 이 부분도 편의상 생략한다.

 


5


그리고 저 그림의 마지막에 있는 예약취소, 예약 때문에 10만 원 침대를 구입했는데 예약이 취소되었으니 호텔은 침대를 괜히 구입한게 되었다. 즉 호텔은 10만 원을 손해 본 것이다. 자기 돈 10만 원을 들여서 마을 경기를 살아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호텔도 돈을 날렸으니 장기적으로는 예약취소를 못 하게 하거나 예약취소를 못 하게 한 이후에 침대를 구입할 것이다. 추가로 노쇼(No show)로 인해 마을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경제학에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역시 아주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회계적으로는 호텔이 구입한 침대가 호텔의 자산으로서 제 역할을 할 거라고 예상할 수도 있지만, 투숙객이 온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구입한 침대가 투숙객 예약이 취소되었을 때 “유용한” 자산으로서 기능할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호텔은 구입하지 않아도 될 자산을 구입한 것이다. 이때 만약 호텔에 빚이 있는 상황에서는 호텔의 경영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



6


저 그림에서 호텔에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고 헷갈리게 만드는 장치가 문방구가 10만 원을 호텔에 갚았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10만 원을 받을 채권은 이미 호텔의 권리였으므로 문방구가 갚건 말건 호텔은 손해 보는 게 없다. 이게 유의미하려면 오석태 님 말씀대로 호텔이 문방구에서 받을 채권 10만 원이 악성채권이어야 한다. 즉 호텔은 저 돈을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저 채권 10만 원의 가치는 500원인 상태이고, 그런데 문방구가 10만 원을 갚았다면 호텔은 10만 원을 얻는 셈이 된다.

하지만 악성채권이 횡행하여 저런 상황이 되려면 금융시장이 폭삭 가라앉을 정도로 망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아니면 애초에 “빚 자체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여 경제 전체에서 빚을 없애는 게 좋다는 전제를 깔면 가능할 수 있으나, 그건 금융기관의 통화승수효과를 완전히 무시한 결론이므로 동의할 수 없다.


저 그림이 들어맞는 사례는 금융위기 상황에서 과도한 부채로 인해 가계소비가 얼어붙었을 때에 한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막대한 부채가 소비를 제한하고 있을 때 일정액을 투입하여 부채가 감면된다면 소비를 진작할 수 있기는 하다. 이것이 금융위기 상황에서 구제금융의 필요성이다.


이 경우에도 구제금융이 n을 해결할 뿐 무한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평소 경제 활동이 아닌 빚이 누적된 상황에 한정된다는 문제는 남는다(저 그림의 원본이 되는 미하엘 슈미트 살로몬의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라는 책에서 금융저널리스트 루카스 차이제가 언급한 일화에도 적용되는 비판이다). 오히려 저 그림을 거꾸로 설명하여 예약 취소된 호텔이 다른 곳에 빌려준 돈을 회수한다면 호텔부터 시작해서 각각의 점포가 모두 부도가 나는 상황도 그릴 수 있다.


이런 정책을 통해 경제가 부양되고 그걸 바탕으로 세수가 늘어나서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건 저런 정책이 아니라 역시 일반적인 재정정책이나 이전지출을 통해서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호텔 취소와 10만 원을 갚는 과정은 5-6번에서 말했듯이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으므로 빼야 하고, 역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한대의 거래나 생산 창출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므로 그 주장이 저 그림을 변호하지는 못한다.


 

7


이재명의 기본소득론은 이른바 “지역상품권”론과 합쳐져 있고 이 그림 원본에서도 이재명은 지역상품권은 저장해 봤자 의미가 없으므로 반드시 소비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시 위에 4번에서 말한 것처럼 즉시 모두 소비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역상품권도 결국은 정부 재정에 부담을 주는 것이다. 지역상품권을 줬다 뺏을 생각인가?


재정정책이 미래의 조세 부담이 되고 이것이 재정정책의 유효성을 저해한다는 것은 경제학에서도 활발한 논쟁거리 중 하나다. 최근 들어서는 국가가 더 많은 부채를 감당할 수 있고 위기 상황에서는 특히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말이 많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과도한” 국가부채의 위험성은 인정하고 있다. 버니 샌더스와 비주류 경제학에서 주장한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 MMT) 같은 경우 정부재정균형을 지나친 수준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이 그림도 비슷한 오류가 있다.


만약에 상품권과 달리 물건을 팔고 지역상품권을 받은 상인들도 그걸 현금화할 수 없고 물건만 구입할 수 있다면 지역상품권 발행에 따른 정부 재정 부담은 없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지역상품권 발행=통화 증발을 의미하고, 이걸 국가 단위에서 행할 경우 반드시 통화 증발로 인한 화폐 가격 하락, 즉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

 


8


저 그림엔 그러니까 기본소득론, 지역상품권, 금융무용론 혹은 금융위기에서의 구제금융 상황, 정부재정균형 무시 등이 마구 섞여 있다. 틀린 것도 있고 한 가지만 강조해서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그걸 몽땅 섞었으니 0에서 무한대를 창조하는 무한동력 창조경제라는 결론이 나와 버렸다.

 


9


오석태 님 말씀대로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은 ‘고등 수학’이나 ‘첨단 계량경제 스킬’을 동원해서 입증했다 한들 큰 의미가 없다”. 경제학이 복잡해도 그 뒤에 깔려 있는 직관이나 전제는 생각보다 간단해서 몇몇 것들로 보통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보통 경제학적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설명은, 맞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그림이 알려주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는 것,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주장을 섞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이 그림이 허접하다는 것뿐입니다. 마구 섞여 있기에 이 그림의 문제만 갖고 기본소득 전체를 부정하거나 지역상품권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본소득론에는 회의적이지만 과감한 재정지출에는 우호적입니다.


원문: 경박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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