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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day to die: 죽기 좋은 날

조회수 2017. 3. 6. 2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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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good day to die: 죽기 좋은 날은 없다
휴지야, 난 죽는 게 무서워. 어렸을 때부터 쭉 죽는 게 무서웠어.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산 자의 본능이다.

평소 꽤 강한 성격이던 팀원이 회식자리에서 내게 그런 말을 했을 때 좀 충격이었다.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술을 마시는 사람들 틈에서, 꼬막과 홍합 껍데기가 널브러진 술집 탁자 위에서 흘러나온 말이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 아니냐고,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나도 꼬인 혀로 되받아치긴 했지만, 대뇌피질을 알콜로 절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죽음이 무섭다는 것을 쉽게 고백할 수 있다. 그 과정이건 죽음이라는 그 자체건 그 이후의 무엇이건 죽음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죽음은 한 개인의 생명이 끝나는 일이면서 생각보다 많은 이의 손을 거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 그 과정은 꽤 드라마틱해지기도 한다. 장례 절차는 인생의 여러 단계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거치는 일을 하나의 연극처럼 만들어주었다. 누구나 그런 연극에 한 번쯤 참여해보았거나 주인공이 되어보았을 것이다. 그런 일에는 다들 덤덤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이는 누구나 애도하는 죽음이며 알려진 죽음이고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그런 ‘안전한’ 죽음이다. 죽음의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알려지고 안전한 죽음이 아니라 홀로 외로이 맞이하는 죽음이다. 고독사(홀로죽음)말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나는 장례업자가 아니지만, 업무상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한다. 사람이 의사의 사망선고 없이 사망할 경우 국가는 국민의 죽음의 원인을 밝힐 의무가 있으며, 검사의 지휘 아래 사망의 원인을 밝혀내게 된다. 범죄에 의한 것인지 그 외의 다른 원인인지, 다른 원인이라면 그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 과정 중에는 시체를 국가에서 맡게끔 되어 있다. 요즘 대부분의 사망은 병원에서 일어나므로 의사가 바로 사망진단서를 발급해주고 장례절차를 진행하므로 이런 일이 적겠지만, 병원 외에서 사망하는 경우엔 이런 절차가 필수적이다.

사망원인조사는 경찰서 형사과의 형사 당직팀(구 폭력팀)의 형사들이 맡는다. 사망자를 발견하고 신고가 들어오면 유족과 신고자의 진술을 통해 정황조사를 한다. 여기서 타살혐의가 없으면 검사의 지휘를 받아 사건을 종결하고, 사망신고 및 장례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서류를 발급한다.


이것을 변사사건 조사라고 하며, 이러한 변사에는 병사, 사고사, 자살 등이 있다. 홀로죽음(고독사)은 이 세 가지에서 다 나타날 수 있다. 고독사와 무연사회에 대한 시사인 기사에는 장례업 종사자의 시각에서 본 홀로죽음이 잘 나타나 있다. 통계까지 잘 정리된 기사이니 시간 되면 읽어보시라.

 


There is no good day to die: 죽기 좋은 날은 없다


내가 속한 당직형사팀에서 처리한 변사사건 중에도 홀로죽음이 몇 건 있었다. 형사가 처리하는 홀로죽음은 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혼자 사는 저소득층 노인의 홀로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연고 없는 사람의 자살이다.


첫 번째, 혼자 사는 저소득층 노인은 건강이 나쁜 경우가 많아 지병으로 병사하실 때가 있다. 이런 경우 가족 역시 힘들게 살고 왕래가 적은 경우가 많다. 보통 고인이 돌아가신 후 시간이 지나 동네에 보이지 않게 되면 사회복지사나 동네 친구분들이 찾아갔다 발견하고 신고하게 된다.


사망한 후 시일이 지날수록 부패가 진행되고 사망원인을 밝히기 힘들기 때문에 독거 저소득층 노인의 경우 대개 홀로죽음인 걸 알면서도 처음 현장에 들어갈 때는 늘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타살 혐의점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고인을 인도하기 위해 가족을 찾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 역시 유난히 힘들 때가 많다. 가족을 찾아내는 거야 조회를 하면 된다지만 이런 저소득층의 경우 고인만큼이나 가난한 유족들 대부분이 장례절차를 치를 돈이 없어 최대한 빨리 인도만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심지어 인도받지 않겠다고 하는 일까지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사망하면 고인을 장례식장이나 영안실로 모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셨음을 알린 뒤, 발인을 거쳐 매장 혹은 화장을 하는 장례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이래저래 수고로운 일이 많고 돈도 꽤 든다. 따라서 저소득층의 경우 장례절차를 치를 사람이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영안실에 고인을 모시는 데도 비용이 들 정도다) 이런 과정 자체를 생략하려고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어떤 변사사건의 경우 유족이 이러한 장례절차를 시기에 맞춰 정확히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며 아직 검사 지휘가 완료되지 않았는데(보통 3일장 이내에 처리된다) 고인을 매장 혹은 화장하겠다고 서류를 달라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장례도 치르지 않고 가족을 떠나보낸다는 이야기에 경악했지만 곧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유족이라고 왜 장례를 치르고 싶지 않겠는가. 단지 먹고 사는 게 너무나 힘들어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버거울 뿐일 따름이리라. 내가 근무했던 경찰서의 관할 지역은 저소득층이 적잖아 보통 들어오는 사건도 자잘하고 지저분한 음주나 폭행 사건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사건보다도, 홀로죽음처럼 그 동네의 가난함과 삶의 어려움이 와 닿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최대한 빨리 화장할 수 있도록 온 팀이 매달려서 조사를 완료하려 애썼다. 다행히 사회복지사나 종교단체 등에서 장례비용을 지원해줘 장례를 치르게 된 적도 있다.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이 있는 타인이 오히려 따뜻하다는 것을 느낀 한 사례였다고 할까.

두 번째, 연고 없는 곳에 와서 자살하는 사람의 사례다. 이 역시 보통의 절차에 따라 자살이 맞는지를 먼저 조사하고 신원조회로 가족을 찾아 인도해준다. 문제는 고인이 대체 누구인지 신원조차 나오지 않을 때 발생한다. 한번은 KTX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남자가 있었는데 신분증도 없고 지문조회를 해도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외국인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랐고, 그 사람의 얼굴을 곱게 닦아 수배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누군가 이 사람을 알아봤으면, 이 사람의 지인이 나타나 주었으면 했지만 결국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 열차에 뛰어드는 순간을 지켜본 기관사와 CCTV조차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건조하고 서늘한 영상은 내 아이폰 앨범에 꽤 오래 머물렀다. 수배전단에 담긴 그의 얼굴은 지나치리만큼 평온해서, 우리는 “아저씨가 우리 괴롭힌다. 속이 시원하냐. 좋은 데 가시라.”고 농 아닌 농을 하곤 했다. 결국 남자는 가루가 되어 무연고 묘지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이는 아마 우리 팀뿐일지도 모른다.



Good day to die, memento mori: 죽기 좋은 날,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에 대해 좀 더 자극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시취라던가, 구더기가 끓는 소리라던가. 하지만 그런 얘기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괜한 혐오감만 줄 것 같으니 치워두자. 홀로죽음의 현장을 볼 때면 사실 지독한 시취보다도 죽고 나면 남는 것은 썩어가는 몸뚱이뿐이라는 그 사실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그 앞에선 경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삶이 나를 떠나고 남은 몸이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건 너무 슬픈 이야기다. 그건 죽음을 맞은 자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은가. 살아서 남은 자가 죽은 이의 흔적을 바라보며, 좀 더 좋은 생각을, 생산적인 해결책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게 되길, 거기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더불어 돌아가신 분들이 평온하시길 그저 기원할 따름이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술자리로 다시 돌아가 보면,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홀로죽음과 그에 대한 반응은 그 단적인 일면이다. 누군가는 이 사회병리적 현상을 내가 너무 덤덤하게 이야기한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나는 그걸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켜보고 처리하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을 때 죽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래도 느낀 것은 있다. 그 과정에서 지켜본 죽음에는 그저 외면하거나 두려워만 할 수 없는, 더욱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인간은 고독하며, 죽고 나면 이렇게 애써 가꾼 인생과 육체도 다 부질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통해 인생의 존재를 생각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죽기 좋은 날은 없지만 모든 날이 죽을 수 있는 날이며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죽는 순간,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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