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싶다던 아이

조회수 2017. 2. 16.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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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저는 어른이 되는 게 소원이에요."

그 방에 방치된 막내 아이

몇년 전 저는 긴급출동 SOS 24라는 프로그램 담당이었습니다. 까마득하지만 선명한 일종의 실패담이에요. 즉 방송을 타지 못한 일입니다.


인천 어느 곳에 4남매가 살았어요. 맏딸은 스무살, 막내는 열 살, 그 사이에 중고생 둘이 박힌 그런 4남매였어요. 그들의 소식을 알려 온 건 동네 교회 목사 사모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애초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사람이었고, 엄마는 빚쟁이에 몰려 집에 들르지도 않는다 했죠. 사모님이 가장 가슴 아파 한 건 막내였어요.

맏언니는 노래방 도우미 나가는 거 같아요. 갔다 와서 내내 자는 것 같고, 둘째와 셋째는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자기들 놀기 바빠요. 막내가 너무 불쌍해요. 밥도 제대로 먹고 다니질 못해요. 학교 급식 밖에는 걔가 제대로 먹는 끼니가 없는 거 같아요. 툭하면 형이나 누나한테 맞는 거 같고.

그 방(집이 아니라 단칸방이었어요)은 둘째와 셋째의 친구들로 들끓었고 담배 연기로 너구리 몇 마리는 잡을 거 같았어요. 술병도 심심찮게 보이고요. 성질 같으면 확 뒤집어엎고 원산을 폭격시키고 싶은 것들이 그 방을 아지트삼아 뒤덮고 있더라고요. 보아하니 컵라면도 끓여먹는 거 같고, 과자 봉지도 나오는 거 봐서 막내가 그렇게 굶는 거 같지 않다고 얘기했다가 사모님한테 혼이 났죠.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컵라면 끓여 먹으면 막내한테 한 젓가락이라도 가는 줄 알아요? 아시다시피 그 집은 부모 없는 애들 놀이터예요. 애들 열 댓명이 그 골방 안에서 놀고 있다고요. 어떻게 그 라면 먹지 않냐고 나한테 따질 수가 있어요, PD란 사람이. 걔 오래 걷지도 못해요. 학교 갔다 돌아오다가 지쳐서 우두커니 길거리에 앉아서 쌕쌕거리는 거 보면 눈물만 나는구만. 

그 싸늘함이라니… 사모님의 그 낮고 조곤조곤한 서릿발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줄기가 식어 올 정도입니다. 정황을 보아하니 정말 그렇더군요.


노래방 도우미로 나가는 맏이는 밤 늦게가 아니라 아침 늦게 돌아와 부족한 잠 보충하기 일쑤였고, 학교 날라리로 소문난 둘째와 셋째는 자기 친구들과 놀기 바빴죠. 누구 하나 챙겨주는 이가 없는 막내는 비썩 곯아가고 있었어요. 애가 코피를 흘리는데 아무도 그걸 닦아 주지 않아서 이 서툰 손으로 애 코를 틀어막았다니까요.


내가 가장 분격했을 때는 ‘빚쟁이에 쫓겨 집에 못 들어온다는’ 안타까운 사연의 그 엄마라는 사람이 또래의 남자랑 그 집에서 300미터 거리에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을 때예요. 무려 2년 동안 그 300미터 거리에서 엄마라는 사람은 한 번도 집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빚쟁이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핑곗거리일 뿐이었죠. 그 새 남자라는 수컷과 엄마라는 허울의 암컷에 대해서 야 이 잡것들아 욕을 퍼붓지 못한 건 내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지마는, 그때 난 그 여자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다 떠나서 당신 막내는 챙겨야 할 거 아닙니까. 당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 대가리 큰 애들이야 제 먹을 것은 제가 챙긴다 치고 막내는 무슨 죄란 말이오.

그 엄마라는 사람, 변명은 청산리 벽계수였어요, 큰딸 도우미 해서 번 돈 달래서 가져간 거까지도 내가 뻔히 아는데 도우미 하는 거 몰랐다면서 땅을 치질 않나, 둘째 셋째도 공부 잘 하는 줄 알았다며 한탄하질 않나, 거기에 막내 얘기를 할 때는 그저 눈물 바람이었더라고요. 모르긴 뭘 몰라 온 이 집 사정은 온 동네에 화제였고 엄마를 만나 그 얘기를 해 줬단 마을 사람들이 1개 분대였는데요.



아이의 낮은 대답

출처: 전국뉴스

막내는 또래 아이들보다 10센티미터 이상 작았어요. 아무래도 영양 부족 탓인 거 같았죠. 아이가 안심하고 먹는 끼니라곤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 그리고 방학 때는 급식 대신 나오는 쿠폰이라고 했습니다. 이 쿠폰을 형이나 누나가 뺏어간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어요. 이럴 때 우리가 상투적으로 묻는 말이 있죠.

우리 철훈이는 커서 뭐 되고 싶어?

이정희 의원이 만난 난곡의 아이는 ‘수급자’라고 장래 희망을 대어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지요? 그렇듯 이 질문에는 참 다양한 그리고 예상외의 대답이 나와요. 대통령부터 연예인까지 골고루 출연하고, 어떤 여자 후배는 “나도 누나 같은 PD가 되어서 나 같은 아이들 도와 줄래요.” 하는 기막힌 멘트를 따 와서는 귀에서 썩은 내가 날 정도로 자랑해 대곤 했지요. 철훈이의 답도 예상 밖이었어요. 푹 소리가 나도록 내 허를 찔렀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어요.
하하, 크면 다 어른 되는 거잖아.
아저씨, 저는 어른이 되는 게 소원이에요.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거든요.

순간 재갈이라도 문 거 같았어요. 꼬질꼬질한 이마와 콧물이 말라붙은 코 사이에서 촛불처럼 가물거리는 아이의 눈동자 앞에서 흡사 결혼 하루 앞두고 파혼 선언 받은 남자처럼 말문이 막히고 말았어요.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죠.


한 방을 단단히 먹은 복서가 허우적거리며 양팔을 휘두르듯 “네가 죽기는 왜 죽어? 보니까 백 살까지 살겠다, 인마.” 하면서 과장되게 눙칠 수 밖에요. 그때 헤 하면서 입 벌려 웃는 아이의 표정 참 오랫동안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그렇게 얘기하는 듯했어요.

이렇게 90년을 더 살라구요?

애를 싸질러 낳기만 하고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엄마, 제 피붙이 동생을 챙기기는커녕 자기 친구 돈가스 대접하려고 동생에게 새우깡 한 봉지 사 주고 쿠폰 빼앗아 가는 형, 누나를 다 엎어놓고 곤장을 치고 싶은 마음이 사태같이 일었습니다. 옛날 김황식 총리의 발언을 빌어 “복지 문제는 가정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국격”이라고 할 때, 국격 하나 장히 망치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염치없는가

하지만 가정이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아이의 밥 먹을 권리를 챙겨야 하는 건 아무리 부인해도 나라일 겁니다. 이러다가 500년 뒤면 한국인이 없어진다고 설레발 까면서 낙태 규제 강화를 대책으로 삼을 만큼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면, 어떤 교수는 “건강이나 경제상의 불가피한 이유 없이 출산을 피하는 행위에 대해 부담금을 물리자“고 기염을 토하는 나라라면 최소한 아이들의 배만큼은 채워 주겠다고 나서는 게 국격 아니겠어요.


아니 이건 격에 해당하지도 않지요. 이건 염치입니다. 사람에게만 아니라 나라에도 염치가 있어야 하는 거죠. 괜히 울컥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남자와 붙어 띵까띵까 하면서 딸이 도우미로 번 돈까지 통장으로 부치라 하던 그 엄마와 이 나라가 그렇게 크게 다를까요.


한 며칠 정말 추웠죠. 이 눈과 추위가 지옥인 분들, 내가 만났던 참 많은 사람이 유령처럼 제 옆자리에 왔다가 뒷자리에 누웠다가 사라집니다. 철훈이도 있네요. 어른이 되는 게 소원이었던 아이. 철훈이도 어른이 되어야 하지만, 정작으로 어른이 되어야 할 사람은 이 나라가 아닐까 해요. 묵은 해 잘 정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 나라 국민으로서 “형편껏” 받아야 할 복인지도 모르겠지만.



추신


이 아이들 어떻게 됐느냐고요? 도무지 솔루션을 제시할 길이 없어서 방송은 포기했는데, 주민센터 가서 좀 ‘갑질’을 했지요. 당시 미안하게도 사회복지 공무원들은 우리를 무섭게 싫어했으니까,

이거 우리가 방송하려다가 일단 유예는 하는데, 좀 도와 주십시오. 일단 막내부터 어떻게 하시든지. 비슷한 아이템을 누가 해 버려서 잠시 유예된 거니까, 한 달 뒤에 와서 상황 똑같으면 바로 방송 겁니다.

이틀 후 바로 전화가 오더군요. 목사 사모님으로부터.

고맙습니다. 뭣이 안된다 규정에 없다 똑같은 말만 하던 공무원들인데, 어제 구청에서까지 나오고 하여간 시끌벅적한 뒤에 정리됐네요.

아빠한테 맞아 죽어 백골이 된 아이나 토막 나서 냉장고에 들어가야 했던 아이들 생각하면, 정말 욕은 좀 먹어도 긴급출동 SOS 24 다시 하고 싶어집니다. 아 물론 막상 하라면 싫겠지만.


서울역에 나와보니 골프장 캐디 하다가 사고로 발톱이 빠졌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이 이 추위에 유인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도 사람들이 안 받아가길래 돌아가서 받아 드리고 왔습니다. 눈을 감으면 지옥은 커지고, 뜨면 줄어듭니다. 보기 싫더라도 보아야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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