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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은 존재 가치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다

조회수 2017. 1. 31. 20: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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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존재하는 그 자체로 완벽한 '나의 존재성'

인간은 당연히 서로 다르다. 모습과 성격도 다르지만 가진 능력과 재능도 다르다.


현대 사회는 인간을 그가 가진 능력으로 평가하곤 한다. 한국 사회는 특히 심하다. 어떤 능력이 뛰어날수록 그라는 존재, 그의 존재성의 가치를 높게 쳐 준다.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능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면 그의 존재 자체, 존재성, 존재 가치도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타당할까? 이러한 시각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가?

인간이란 특정 능력만이 아니라 다양한 자기만의 ‘무엇들’로 존재한다. 그 무엇들에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모습, 성격, 인품 그리고 그 외 모든 것들. 어떤 사람이 가진 능력이란 사실 그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능력’이라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사실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뭔가를 하더라도 잘할 때만 그것을 능력이라 이름 붙이고 대접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잘해야 그게 뭔가 더 효과와 효능을 발휘하고 자기와 타이에게 인정도 받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든 잘하는 것은 좋다. 다만 그것이 ‘도구로서의 능력’일 때 그렇다. 만약 그 잘하는 것 즉 능력을 그 사람의 존재성, 존재의 가치, 존재의 의의와 연결시키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존재성, 존재 가치, 존재 의의는 ‘능력’ 따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의 유무, 크고 작음은 나의 존재성을 좌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성은, 그냥 존재하는 그 자체로 이미 항상 온전하다. 이것은 믿음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본래 그런 것을 그런 것으로 눈치채는’ 자각의 문제이다. 또한 ‘본래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눈치채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 능력 없어도 아무 이상 없이 온전히 존재하는 게 인간이다. ‘온전하다’의 본래 뜻이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이다. 인간의 존재성, 존재 의의, 존재 가치는 그가 가진 혹은 못 가진 능력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 항상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


도구야 당연히 다양하게 잘 쓰면 좋다. 그건 각자의 상황에 맞게 하면 된다. 이왕 있는 게 있으면 더 잘 개발하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훈련과 연습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도 된다. 그렇게 자유롭게 하되 우리가 항상 선명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존재 가치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도구로서의 능력’이다.



'도구’로서의 능력


어떤 사람의 존재 가치를 그가 가진 능력으로 결정하려는 사회는, 얼핏 보기엔 뭔가 공정한 것 같고 효율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괴로운 사회이다.


능력을 무시하거나 없는 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있는 능력은 잘 쓰고 필요한 능력은 얼마든지 개발하면 된다. 하지만 능력과 사람의 존재 가치를 연결할 이유는 전혀 없다. ‘본래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눈치채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그 사람의 존재성을 연결 짓는 것은 사실 하나의 최면에 불과하다. 신화적 믿음에 불과하다. 환상에 불과하다. 본래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을 억지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연결에 의해서 말이다. 본래 아닌 것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고 능력이 큰 사람이 적절한 대가를 받고 이점을 누리는 것은 뭐라 할 것이 없다. 도구로서의 능력을 잘 발휘해서 자신과 주위와 사회에 어떤 식이든 기여를 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여기서 더 해서 누구는 더 가치가 있고 누구는 가치가 없고 따질 필요가 없다.

어떤 개인과 집단이든, 그가 가진 능력은 도구일 뿐이다. 무엇을 위한? 물론 1차적으론 자신을 위한, 그리고 나아가 주위와 사회를 위한 능력이다. 능력이란 그런 것이다.


존재 가치로서 능력을 보는 관점은, 또한 그 능력을 그 개인 혹은 그 집단만을 위해 사용하게 부추기는 오류를 자꾸만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커질수록 그 개인과 집단은 이익을 더 얻을지 모르지만, 결국 전체 사회와 구성원들은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결국 그 사회 안의 그 개인과 집단도 그 결과적인 부정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암세포가 자기만 살려다가 몸 전체를 죽이고 결국 자신도 죽게 되는 형국과 비슷하다.


또한 어떤 능력의 유무나 능력치의 크고 작음 때문에 나의 혹은 누구의 존재성 자체가 영향을 받거나 위축되거나 미리 움츠러들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경우든 항상 당당하게, 활짝 펼쳐져서 존재하면 된다. ‘도구로서의 능력’ 관점은 이러한 부분을 더 활성화시켜준다.


왜? 능력이란 단지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도구가 많고 또 좋으면 당연히 더 좋기야 하겠지만, 특정 도구가 있든 없든 존재성에 상관은 없는 것이다. 오직 본인이 허락할 때에만 영향을 받는다. 뭔가 부족하다 여겨진다면 그걸 눈치채고 다른 걸 모색하든지 혹은 보충하든지 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존재성이 위축될 이유는 전혀 없다.


물론 본인은 아무리 눈치채고 아닌 줄 알아도, 타인들과 사회의 압력과 강압이 심하면 그 개인은 어쩔 수 없이 해당 시스템 속에서 고통을 받게도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각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과 사회 전체로 되도록 널리 퍼져 나가야 되는 것이다. 모두가,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특정 능력’만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다양한 무엇들로 구성된다. 능력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중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그것도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니 도구에 의해 내가 결정되도록 할 것인가, 내가 도구를 사용하는 주체가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또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원한다면 계속 ‘존재 가치로서의 능력’을 선택하면 된다. 나와 타인의 존재성, 존재의 의의, 가치가 그가 가진 능력으로 결정되고 한정된다고 여기면 된다.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과정과 결과들이 펼쳐질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라면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여러 부작용들이 있을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라면 그 부작용들도 기꺼이 감수하고 경험해주면 된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할 것이고, 자기는 좀 괜찮다고 해도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결국 자기도 고통스럽게 된다.


그러나 더 이상 능력과 사람의 존재 가치를 연결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고, 능력이란 단지 도구에 불과함을 자각하면서 살겠다면 그렇게 선택하면 된다. 그래서 능력을 최대한 잘 사용하되 그것의 유무, 그것의 크고 작음에 자기와 타인의 존재성을 결정짓지 않는 것이다. 많다고 불필요하게 우쭐대는 것도 아니고 적다고 불필요하게 움츠러들지도 않는 것이다.


그냥 존재 자체로 온전한 자세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할 바, 하고 싶은 바를 다 해 보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자유다.


원문 : 필로 이경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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