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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역군'의 반백 년 노동을 말하다: 내 아버지들의 자서전

조회수 2016. 11. 21. 14: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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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이름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

어느 청계천 간판 장인의 이야기


청계천에 아직 고가도로가 놓여 있던 시절의 얘기다. 도심의 별난 사람들이나 이색 풍경을 아이템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청계천 2가 공구상가에서 제보 전화 한 통이 왔다.  제보 내용은 간단했다. “공구상가 골목의 가게들 간판을 수십 년간 만들어 온 분”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 청계천 공구상가의 모습.

문제의 노인이 있다는 곳으로 가는 함께 와중에 제보자 아저씨는 ‘이것, 저것.. 전부 다예요..’라며 간판들을 가리켰다. 간판들을 눈여겨보니 정말 수백 군데 가게의 간판 글씨체가 똑같았다.


이른바 ‘아이스께끼’체였다고나 할까. 허연 목판에다가 검은색 또는 붉은색 붓으로 또박또박 써 넣고 팔았던 아이스께끼 아저씨 노점 앞에 서 있던 간판 글씨체 말이다. ‘용접’ ‘스텐레스’ ‘밀링작업’ ‘각종 공구 팝니다’ 그 수백 개 간판을 한 사람이 썼다고 했다.

출처: 조선일보

마침내 할아버지를 만났다. ‘박정희 군사혁명하던 해’에 청계천에 와서 ‘할 줄 아는 일이 이것밖에 없고, 사람들이 그래도 찾아 주니까’ 40년 동안 청계천 골목의 한켠에서, 점포도, 작업실도 없이 그냥 으슥한 길바닥에서 간판을 써 왔다는 노인이었다.


청계천 골목을 줄곧 걷다가 간판이 좀 낡았다 싶으면 “다시 써 줄까요?”라고 묻고 답을 듣는 것이 ‘영업’의 전부라며 너털웃음을 웃는 인상이 참 좋았는데, 촬영 얘기하니 그만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안 해요. 그런 건”

“아니 왜요?”

“방송에 나올 만한 일 한 적도 없고, 싫어요.”


40년간 이 한곳에서 자리를 지키신 것만 해도 충분히 방송 나갈 수 있는 일이며… 당신의 손때가 묻은 간판들로 그득한 이 골목만 해도 충분히 기록의 가치가 있으며…. 지금까지 할아버지 간판을 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작은 보답 아니겠느냐……. 등등 별별 감언이설을 다 동원해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되레 제보자 아저씨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저 영감은 한번 아니라면 아니에요. 언젠가 데리고 있던 종업원들한테 못되게 굴던 가게 주인이 있었는데, 저 할아버지가 그 집 간판은 절대 안 쓴다고 그랬대요. 그 주인이 또 못된 인간이라…. 할아버지 물감통 때려 부수고 협박하면서 써 달라고 해도 죽어도 안 쓴다고 그랬어요.”


그로부터 한 열 달쯤 지났을까. 예전의 그 제보자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 같아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골목길 물감통 앞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한 달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괜히 맘이 이상해져서 다시 청계천행 버스를 탔다.


주인 없는 플라스틱 물감통은 이미 인근 상가의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고, 간판에 쓰려던 나무 판자들은 여기 저기 널브러져 발에 채이고 있었다. 40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할아버지였지만 그와 함께 세월을 지새운 인근 상인 중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담지 못한 바로 그 이야기


역사란 좋은 팔자든 나쁜 팔자든 세상의 파도를 타고 넘으면서 살다가 죽어간 개인들의 삶의 총합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굵직굵직한 사건과 영웅들에 주로 눈길을 주고 그를 기준 삼아 역사를 엮어 내기 마련이고,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묵묵히 자기 페이스 유지하면서 최선을 다하다가 살아간 사람들의 미세한 삶들은 쉽게 잊혀지고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청계천에서 스치듯 만났던 간판쟁이 할아버지처럼. 평생을 같은 글씨체로 청계천을 수놓았지만 빈 통과 붓 몇 개, 판자 몇 개로 남았던 이름 모를 간판 ‘장인’처럼.

<내 아버지들의 자서전>은 끝내 내가 만났으되 풀어내지 못한 청계천 간판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을 다룬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왕년에 6mm카메라 들고 다니던 처지라면 책을 읽다가도 뛰어나가 섭외하고, 세월의 먼지 그득한 이야기를 듣고, 그 행동거지를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대상들이다.


어디서 이렇게 성실하게 찾아 놓았는지, 일단 라인업에서부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오래된 이용원의 이발사, 시계 수리 전문가, 세탁소 주인, 전파사 기술자 아저씨, 대장간 주인, 수제 구두 제화공, 양복점 재단사 등등 한때 우리의 일상처럼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추억의 뒷골목으로 모습을 감춘, 그러나 여전히 기운차게 그들의 개인사를 써 내리고 있는 사람들을 어기차게도 모아 놓은 것이다.


대충 낯익은 분들도 있었다. 만리재 기슭의 성우 이용원이나 수색의 대장간 주인장은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된 분들이고 얼굴 또한 낯익다. 아마 TV나 신문 깨나 본 분들이라면 아, 그 양반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정도.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잊었던 것들”의 추억 타령이나 개인에게 과도하게 함몰된 ‘인간탐구’류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전기(傳記)이면서 수필이고, 르포이면서 다큐멘터리이고, 노동의 철학과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을 가로질러 낡은 골목 벽돌 틈에 피어난 미시사(微時史)까지 모두 아우르는 함지박이라고나 할까.



피난 가지 못한 이남열 씨는 만리동 이발사가 되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모든 것을 망라한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라는 얘기다.” 하며 핀잔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리도 많은 요소들이 조화롭게 버무려져 사람의 마음을 끌어내는 책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

앞서 말한 만리동 오래된 이발소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어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이발소를 찾아가는 만리동 길에 ‘뺑뺑이’ 첫 세대로 중학교에 입학한 박정희 대통령의 ‘영식’ 박지만을 위해 신작로가 뚫려 지금껏 ‘박지만길’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만리재 사는 사람들 기가 드세 과거 석전(石戰), 즉 돌싸움으로 유명했고, 하도 다니기에 질척거려 진고개라고 불리웠다는 얘기는 대개 금시초문일 것이다. 그런 잔잔한 사연들의 물결을 헤치고 옛사람의 섬에 이르면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과는 동떨어진 인간과 노동을 만난다.


6.25 때 인민군은 만리재길을 넘어 마포로 진격해 왔고, UN군은 거꾸로 만리재 고개를 넘어 서울 도심을 죄어 들어갔다. 전쟁의 폭풍이 쌍방향에서 휩쓸고 지나간 만리재에서 살던 성우이발관 주인 이남열 씨네 가족은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방송 때문에 그랬는지 피난을 가지 못했고 ‘부역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 형들은 취직도 하지 못했고 불행한 삶을 영위하다가 죽었다. 이남열 씨에게 이발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밥벌이를 위한 호구지책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작지만 빛나는 노동의 파노라마를 꾸려 낸다. 손님 목덜미에 깎은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두르는 화장지 한 조각의 배려부터 “연장을 제대로 갈아야 기술자다. 가위도 못 가는 놈이 무슨 이발을 하느냐.”는 한마디로 게으른 독자의 머리를 죽도로 내리쳤던 늙은 노동자의 외마디까지.

이 책의 매력은 각각의 장마다 소개되는 주인공에 집중하면서도 그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다양한 사람들의 코멘트다. 슈테판 츠바이크부터 신영복까지, 저자가 깊숙이 섭렵한 (이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 맥락과 위치에 맞게 다른 사연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여러 철학자, 역사학자, 작가들의 코멘트와 글줄들이 이발사, 제화공, 대장장이, 세탁소 아저씨들의 삶과 절묘하게 매치되며 그 몸에 훌륭하게 걸맞은 옷이 되어 주인공들의 품격을 더한다.


세탁소 아저씨의 삶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첫 글귀를 보며 나는 무릎을 쳤다. 이 책의 주제, 나아가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의 생을 요약할 만한 앙드레 말로의 한마디.


“인간은 그의 행동의 총체이며 지금까지 해온 일과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이루어진다.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남상순 씨는 도장을 팠다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치며 깨닫고, 가슴을 치며 감동하고, 머리를 두드리며 자책한 적은 줄잡아 스물 대여섯 번은 넘겠지만, 그중 하나로 장애인 전파사 아저씨 남상순 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남상순 씨는 냇가에서 놀다가 밟은 지뢰 때문에 장애인이 됐다. 멀쩡한 사람도 살기 힘들던 시절 “거의가 아니라 아예 끝”이었던 장애인으로서 그는 살기 위해 기술을 배웠고 전파사 기술자로 평생을 보낸다.


그런데 그에게는 평생을 함께 한 인감 도장 하나가 있었다. 그건 장애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한때 익혔던 도장 기술의 소산이었다. 그는 겨우 몸으로 깨우친 도장 기술을 발휘하여 자신의 이름을 팠고 “50년 넘게 쓰다가 모가지가 부러졌는데 버리지 못하고 남은 꼬타리에다 구멍을 뚫어 고리를 만들어 가지고 지금도 이렇게 지니고” 살았다고 했다. 자신의 ‘첫 노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기억이란 결코 늦는 법이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가.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지새우면서 우리는 얼마나 노동의 긍지로부터 멀어졌는가.


“모든 여정에는 목적지뿐 아니라 출발점도 있다.”는 제러미 리프킨(응암동 오거리의 오래된 양복점 주인 ‘임명규傳’의 글머리에 나온다)의 말이 새삼스레 입안에서 감돌다가 머리로 뚫고 올라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신영복 선생의 한마디에 문득 어깨가 굳고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이 책, <내 아버지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수없는 질문을 해야 했다. 명료하지는 않은 어설픔으로, 단호하지는 못한 소심함으로 스스로에게 답한 말은 이것이었다.


“기억이란 결코 늦는 법이 없다.”


빨리 기억해 내든 늦게 기억해 내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기억은 결국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것이고,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원천으로 자리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늦게나마’ 나의 기억을 되살려 준 책에 감사를 보내면서.



어두운 창공의 별 같은 사람들


책을 읽다가 문득 책 제목에 ‘아버지’라는 좀 추상적이고 식상할 수도 있는, 그래서 그다지 책 제목으로는 매력적이지 않은 단어를 왜 썼을까 궁금했다. 책 내용 간간이 드러나는 저자의 아버지의 사연에 이르면서, 그 이유를 시나브로 알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 분야의 장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가족들과 자신에 불성실한 자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개개인의 역사를 충실히 써 왔던 것이고 그 개인사는 얽히고 어우러지고 섞이고 버무려져 역사라는 대로(大路)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데모로 바쁘던 80년대의 저자에게 저자의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에서 나는 그 어느 학자나 전문가를 능가하는 포스가 함유된 ‘통찰’을 느낀다.


나는 한 직장만 다니고 있고, 이곳에서 정년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 세대는 한 직장에 머물지도 않을 것이고, 직장에서도 너에게 평생 일자리를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네가 한 직장에 뼈를 묻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앞으로의 세상은 한 직장만 다니는 게 옳거나 자랑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너보고 직장을 갖고 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데모하러 다니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사람은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니 만약을 위해서라도 자격증을 따란 말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오도엽의 내 아버지傳’을 넣어 아버지를 기리고 있다. 그제야 나는 이 책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는다.


꼭 오래된 이발사나 구두제화공이나 세탁소에만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명절날 찾는 내 아버지의 집, 당신이 즐겨 쓰시는 만년필 하나, 아무렇게나 구겨져 서랍 속에 잠든 카세트 테이프 하나에도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것. 우리 역시 노동으로 한 시대를 엮는, 역사라는 어두운 창공의 별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


고집스럽게 일터를 지키는 아버지들,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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