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난 후 어르신은 동네에서 자취를 감췄다
조회수 2019. 1. 15. 08:00 수정
아무것도 아닌 내의 한 벌 덕분에 어르신의 겨울은 따뜻했나 보다.
설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여덟 살 때쯤 우리 동네엔 남루한 차림으로 고물을 줍던 어르신이 있었다. 이 집 저 집에서 끼니를 해결했고, 도움받으면 골목을 쓸어 보답했다.
설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길에서 졸고 있던 어르신을 데려왔다. 엄마는 목욕물을 받았고 아버진 입을 만한 옷을 꺼냈다. 엄마가 어르신이 입던 까만 내복을 빨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새 내복을 내놓았다. 아버지의 잿빛 내복과 바지, 점퍼를 입은 어르신은 생각보다 훨씬 인자한 모습이었다. 엄마가 따뜻한 밥을 지어 드리자 어르신은 말없이 먹곤 조용히 나갔다.
설이 지난 후 어르신은 동네에서 자취를 감췄다. 엄마는 어르신의 까만 내복을 곱게 개어 옷가지와 챙겨 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겨울날 어르신이 작은 상자를 들고 우리 집에 왔다. 그 안엔 잿빛 내복 한 벌이 들어 있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육이오 전쟁 때 피난길에서 헤어진 가족을 찾아 오랜 세월 떠돌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까지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찾아왔단다. 이젠 가족 모두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믿으며 가족 같은 이웃과 지낼 거라고 했다.
까만 내복은 어르신이 처음 우리 동네에 왔을 때 어느 아저씨가 내준 내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받은 아버지의 잿빛 내복으로 어르신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내의 한 벌 덕분에 어르신의 겨울은 따뜻했나 보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이연지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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