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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 근처에 은행 있습니까?

조회수 2018. 5. 3.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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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가리킨 곳에는 단풍 든 은행나무 한 그루가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시골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용돈을 드리고 싶어 지갑을 열어 보니 천 원짜리 몇 장뿐이었다. 


“할머니, 이 근처에 은행 있습니까?”

“은행? 있기는 한데, 쪼깨 멀어.”

“그럼, 제 차에 타서 길 좀 안내해 주시렵니까?”

“그러지.”


나는 할머니를 옆 좌석에 태우고 차를 몰았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은행이 보이지 않아 계속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이 산중에 은행이 어디 있지?’

“아, 저어 있네. 차 세우라. 다 왔다.”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어디요?”

“저어기, 또랑가에 안 있나.”

할머니가 가리킨 곳에는 단풍 든 은행나무 한 그루가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몇 달 뒤, 나는 할머니를 부산으로 모시고 와 용두산 공원을 구경시켜 드렸다. 화려한 꽃시계 뒤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솟아 있었다.


“할머니, 저기 높다랗게 서 있는 게 이순신 장군 동상이에요.”

그러자 할머니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라모 이순신 장군 셍이(형)는 오데 있노?”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이순신 장군은 통영 제승당에 있고, 동상(동생)은 바로 저기에, 셍이(형)는 서울 광화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날 저녁, 세 살 난 아들 녀석이 거실에 누워서 그림책을 보았다. 할머니가 아들 녀석 엉덩이를 툭 치며 양반 자세로 앉게 했다.


“책을 읽을 때는 센님(선생님)이 앞에 계시는 것처럼 꼿꼿이 앉아 정성을 들여야 하는 기라.” 그러고는 그림책을 넘기면서 아들 녀석을 가르쳤다.


“요거는 셍키(송아지), 요거는 토까이(토끼), 요거는 삐가리(병아리), 요거는 다비(양말)…….” 샐쭉하게 서 있던 아내가 슬그머니 책을 덮으며 말했다.


“주영아, 이제 그만 자자.”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박상주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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