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에 강렬한 노랑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조회수 2018. 2. 1. 14: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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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슴이 저릿해졌다.

알코올 병원 사무직으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병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알코올 교육을 했다. 나 역시 강의를 듣기 위해 토요일에도 출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시작되고 30여 분이 흘렀을까. 뒷문을 열고 지각생이 들어왔다. 보라색 베레모에 선글라스를 쓴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심상치 않은 차림새였다. 


이내 그녀의 치마에 시선이 멈췄다. 그렇게 강렬한 노란색 미니스커트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젊은 여성도 쉽게 소화하지 못할 과감한 의상이 아닌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잠기운이 단번에 날아갔다. 그녀를 길 가다 만났어도 분명 시선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지난 강의 때도 그녀가 궁금했다. 매번 화려한 옷을 입고, 지각을 했는데도 맨 앞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듣는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수업이 끝나고 퇴근하는데 때마침 버스 정류장에 그녀가 서 있었다. ‘이때다.’ 싶어 말을 걸었다.


“오늘은 왜 늦으셨어요?”

강의실에서 나를 본 기억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고, 가는 방향도 같아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슴이 저릿해졌다.


“스물여섯 살짜리 내 딸이, 2005년에 갑자기 하늘로 떠났어요. 난 원래 술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입에도 안 댔거든요. 근데 이상하대. 상 치르고 너무 힘들어서 널브러져있는데 눈앞에 술병이 보이더라고요. 술 마시면 뭐든 다 잊힌다고 하니까 한번 마셔 봤는데 그대로 기절해 버렸어요.”


딸을 여읜 괴로움을 술로 잊고 싶었던 것이다. 한 번 마시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셨단다. 깨어 보니 자신이 방 안에 누워 있고 머리 위에 어지럽게 널린 술병을 보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괴로움은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알코올 중독에 이르렀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했지만, 간간이 손을 떨었다. 부모는 떠나보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다 키운 딸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나이가 우리 엄마와 비슷했다.


“요즘은 토요일이 가장 좋아요. 나만을 위해 보내는 날이거든요. 토요일엔 남편과 아들한테 밥도 알아서 먹으라고 해요. 이 강의도 내가 좋아서 듣는 거예요. 그래서 난 토요일이 즐거워요. 화사하게 차려입고 여기 오면 행복해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린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이 뭉클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단지 멋 부리기 좋아하는 중년 여인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굴곡 많았던 그 시간을 버티고 노란 미니스커트를 꺼내 입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까지, 아픔을 겪어 보지 않고서 어떻게 그 상처를 헤아릴 수 있을까.


그녀는 알코올 교육이 끝난 지금도 단주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토요일이면 화사한 옷을 입고 병원에 온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무척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난 아직도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행복’이라는 단어를, 그녀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꺼낸다. 의심이 많은 나인데도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혹 길을 가다가 노란 미니스커트를 입은 또 다른 중년의 여인을 만나면 이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야겠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전은선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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