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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생각

할머니와 함께 사라진 말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사투리에 어떤 온기가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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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 교양 국어 교수님은 첫 강의 시간에 리포트를 하나 내 주셨다. 

'사투리 200개 조사해 오기'


한 학기 동안 그 리포트 하나만 내면 된다고 하니 경상도 토박이인 나와 친구들은 식은 죽 먹기라며 좋아라 했다. 


그러나 단순히 어휘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사투리를 쓰는 누군가를 찾아가서 채록하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어디에 사는 누가 쓰는 사투리인지 표기하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쓰시는 경주 사투리를 채록했다. 일흔이 가까운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받아 적다 보니 금방 리포트 작성이 끝났다. 사투리 아닌 말씀이 없었으니까.


“빼다지에서 버신 가온나(서랍에서 버선 가져와라).” 

“단디 보고 해라카이(잘 보고 하라니까).” 

“머시마가 애리애리한 기 파이다(남자애가 여려서 별로이다).”

“섣낟삐까리를 누 코에 붙이노(그렇게 양이 적어서 누구에게 주나).” 

“참지름 정맬로 꼬시다(참기름 진짜 고소하다).” 

“돌삐 치아라(돌멩이 치워라).” 

“만디에 나물이 천지삐까리라(고개에 나물이 지천으로 널렸다).”


13년이 지난 지금 그 일을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아프다. 7년 전에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할머니. 이제 어디에서도 할머니의 사투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내게 할머니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려 주시지 않았다. 몇 달 만에 고향 집에 갔더니 할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내 턱 밑에 손바닥을 펼치고 “천 원만 도.” 하셨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만 원, 십만 원이 아니라서 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날 나는 할머니를 목욕시켜 드리면서 이게 마지막 효도겠구나 싶어 소리 죽여 울었다.


할머니의 육성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그때 리포트 복사본을 하나 남겨 놓지 못한 것은 더 안타깝다. 


사실 위에 쓴 것들은 내가 리포트에 썼던 할머니의 사투리와 다를 것이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겨우겨우 복원한 것이니까.


서울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나는 내 고향의 말을 잃어 가고 있다. 어휘를 잊어버리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억양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사투리에 어떤 온기가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할머니도 보고 싶고 살가운 할머니 말투도 그립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최영현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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