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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겜'과 '망겜'은 한 끗 차이?

조회수 2017. 9. 4. 16: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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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운명, '디테일'이 결정한다?

IGC2017의 마지막 날인 지난 토요일(2일).


평소 친분이 있던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장님의 강연이 예정돼 있기에 들으러 갔습니다.


입장이 시작되자마자 좌석은 금세 다 찼고, 벽에 기대서거나 바닥에 자리를 잡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박수치고 웃기에도 바쁠 만큼 재미있는 강연이었던지라, 그 내용과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사뭇 걱정이 됩니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끄적여 보겠습니다. 

▲"본부! 본부! 좀 더 큰 강연장이 필요하다, 오바"

'이성적인 나'는 전날 저녁 알람을 맞춰둡니다. 꼭 시간 맞춰 일어나리라 다짐하면서 말이죠. 


다음날 아침, '본능적인 나'는 짜증을 내며 알람을 끄거나, 울리건 말건 무시하고 베개로 귀를 막은 채 다시 잠에 빠져들곤 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겪어봤을 상황이죠. 이 다음에 종종 따라다니는 단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성적인 나와 본능적인 나, 둘 중 어떤 쪽이 '진짜 나'인 걸까요?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를 그려낸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015)

답은 '둘 다'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여러 가지 성향이 섞여있게 마련이고, 이들이 서로 모순되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죠.


위 <인사이드 아웃>이 나온 슬라이드의 '나조차도 모르는 내 속의 나들'이라는 말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한 발 더 내딛어 보겠습니다. (자~ 뜬금포 일발 장전.)

사람의 머릿속, 흔히 '뇌'라고 불리는 꼬불꼬불한 녀석이 자리잡은 곳에는 서로 다른 성향의 세 친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각각 '도마뱀', '멍멍이', 그리고 '인간'이라 부르죠. (발사!!)

출처: 이말년 作 <이말년씨리즈>
▲이런 반응, 각오하고 쓴 문단입니다.

위 내용은 1970년 폴 D. 매클린(Paul D. MacLean)이라는 사람이 제시한 일명 '3층 뇌 모델'(Triune Brain Model)에서 나온 이야기인데요.


인간의 뇌는 3개의 층으로 돼 있고, 그것들은 각기 따로 작동합니다. (안 친한가 봅니다) 


그 중 비의식의 영역을 '파충류의 뇌'(도마뱀), 무의식의 영역을 '포유류의 뇌'(멍멍이), 의식의 영역을 '영장류의 뇌'(인간)로 표현한 거죠. 

▲빨간 부분이 도마뱀, 보라색 부분이 멍멍이, 푸른색 부분이 인간을 가리킵니다.

강연자인 이장주 박사님은 강연 내내 '도마뱀', '멍멍이',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덕분에 자칫 어렵고 무겁게 다가올 수도 있는 내용을 보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죠. (덕분에 쓰는 건 두 배쯤 어려웠다는 건 함정)


각기 따로 논다는 머릿속 삼총사 중, 오늘 강연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녀석을 꼽으라면 바로 '도마뱀'(비의식)입니다. 

▲'도마뱀'과 '멍멍이'가 난무하는 심리학 강연, 들어보셨나요.

게이머들은 종종 '갓겜' 혹은 '망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호불호를 표현하는 극단적 표현이라고 할까요. (가끔 '갓망겜'이나 '망갓겜' 등의 컬래버레이션 응용 버전을 구사하는 분도 있긴 합니다.)


보통 특정 게임에 대한 호불호 판단은 한순간에 이루어지곤 합니다. 의식적인 프로세스가 작동할 새도 없이, 비의식적으로 말이죠. 흠… 누군가를 만났을 때 첫인상으로 호감 또는 비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갓겜이니 망겜이니 하는 건, 각자의 판단 기준과 취향에 따라 적당한 근거를 찾은 다음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거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장류의 작화'(논리적 설명)라는 건 언제나 '도마뱀의 평가'(비의식적 판단)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호불호가 비의식적으로 정해진 뒤, 게임 내 각각의 요소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그걸 근거로 비판을 완성하는 건 작화증(Confabulation, 이야기나 세부적인 사항들을 꾸며내어 기억의 틈을 메우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번쩍! 하고 비의식적 판단이 먼저 이루어진 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만드는' 거죠.

▲동공의 확장 및 수축은 본능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의식 프로세스보다 앞서죠. 이유(스토리)는 그 다음에 만들어지고요.

'영장류의 뇌'(의식)가 만들어낸 이러한 말들은 보통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의견'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에게 갓겜인 걸 누군가는 망겜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 '누군가의 분석과 비판은 적당히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머릿속 도마뱀은 소중하니까요.

▲'필터링'은 중요한 법이죠.

게임은 '재미있으니까' 합니다. '파충류의 뇌'(비의식 a.k.a 도마뱀)가 내리는 판단이죠. 물론 머리를 써야 하는 게임도 있긴 합니다만, 그 역시도 누군가가 그걸 재미있다 느끼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지는 겁니다.


또 한편으로, 게임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외부활동을 할 때는 보통 '인간의 뇌'(의식)를 쓰게 되는데요. 


이 시간동안 '도마뱀'과 '멍멍이'는 지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인간'과의 사이가 안 좋아지게 됩니다.

▲'내 속의 나'들이 불균형으로 인해 서로 사이가 나빠지면, '의식 전환'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같이 사는 친구끼리 서로 불편해지는 건 썩 좋은 모양새가 아니죠. 그래서 '도마뱀'과 '멍멍이'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재미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또는 안정감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죠. 


바로 의식 전환의 시작입니다. 재미와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게임 역시 의식 전환의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만약 어떤 이유로 누군가 게임을 못하게 한다면, 도마뱀과 멍멍이는 반항심을 드러냅니다. '히스테리' 상태가 되는 거죠. 비유하자면 '도마뱀과 멍멍이의 이유 있는 반란' 정도랄까요. 

▲뭐가 나아졌는지는 몰라도 됩니다. 정말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면, 그걸로 게임은 목적을 달성한 거니까요.

게임의 본질은 '재미'에 있습니다. 기분이 나아지도록 해주는 데 있고, 지친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은 일상에서 의식 전환을 위해 영위하는 다른 활동들과도 같은 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지름신을 소환한다거나, 적지 않은 금액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은 자리를 예매해 공연을 본다거나, 마음의 안정과 정화를 위해 종교시설을 찾아간다거나…

서로 상관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들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의식 전환'을 위한 행동이라는 거죠. 


하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 직후부터 의식 전환은 시작됩니다. 만족감이나 쾌감, 또는 안정감을 느끼게 되죠. 


이장주 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멍멍이와 도마뱀이 불만족 상태를 해소하고 균형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일그러졌던 세 친구의 균형이 맞춰지면 '몰입' 상태가 찾아옵니다. 머릿속 삼총사가 사이좋게 모두 만족한 상태를 가리키죠.


몰입은 특히 '내 세계 안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새로운 세계와 접촉할 때' 일어나곤 합니다. 


어떤 게임이 미치도록 재미있다면, 그건 그만큼 '새로운 세계'로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재미있던 게임이 갑자기 시시해진다면, 새로웠던 세계가 이제 '내 세계(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는 걸 의미하죠.

▲성관계 시의 오르가즘, 음악 연주의 클라이막스, 스포츠 경기 우승 등등이 '몰입'의 좋은 예입니다.

'갓겜'이 된다는 건, '게이머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줄 수 있음'을 뜻합니다. 


좀 더 어렵게 말하자면 '의식 전환을 위한 수단으로서 게임이 제 기능을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도마뱀'과 '멍멍이'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될 테고요.


게임을 하는 동안,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도마뱀은 계속해서 자극을 받습니다. 즉, 수많은 비의식적 경험을 하게 된다는 뜻이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 마우스 또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는 행위 → 심리적 안정감.


■ 게임 접속을 환영받고, 게임을 하는 내내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 → 내 존재를 존중받는다는 만족감.


■ 동료 또는 팀을 돕고 장렬히 전사하거나, '하드 캐리'에 성공 → 영웅이 된 기분 체험.

▲메모한 걸 보니까 '접촉 위안'이나 '이행 현상' 같은 말도 써있던데…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마뱀의 자극'은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게임을 하면서 얻게 되는 비의식적 경험은 무척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백미로는, 바로 '죽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의 초연함'을 쉽게 표현하자면 '현자타임'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는 비의식적 경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현실에서는 딱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경험이니까요. 

현실에서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서의 죽음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간접적인 경험이고,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는 경험이니 보다 객관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죠.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묘사해주는가 역시 누군가의 도마뱀에게는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는 하나하나에도 '도마뱀'은 모두 반응하기 때문이죠.

죽음에 버금가는 중요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엔딩'이 있습니다. 


'끝'이란 글자 그대로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시 시작으로 연결해주는 고리로도 해석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다시 시작도 있는 법'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머릿속 도마뱀은 이러한 모든 자극에 대해 빠르고 분명하게 호불호를 표합니다. 인간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에도 말이죠. 


게임에 접속한 플레이어에게 환영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심리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게임 종료'를 누른 게이머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느냐에 따라 그 게이머의 머릿속 도마뱀이 느끼는 자극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비단 죽음과 엔딩 뿐만이 아니라, 게임을 이루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다 그렇습니다.

▲<소녀전선>을 가리켜 갓겜이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강연을 들을 당시에는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후기 한 편 쓰겠습니다'라고 이장주 박사님께 호언장담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시간이 걸릴 줄 몰랐죠. (알았으면 안 썼을…… 아, 아닙니다.)


길고 긴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핵심은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갓겜이냐, 망겜이냐를 결정하는 건 아주 작은 부분에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 아주 작은 차이가 게이머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도마뱀과 멍멍이는 너무 눈에 띄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정감을 주는 무언가에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죠. 


그들의 안정감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꾀한 미묘한 변화 몇 가지가, 게임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 서나래 作 <낢이 사는 이야기>
▲요리의 '맛'과 게임의 '재미'는 같은 맥락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슬슬 강연이 마무리돼 간다는 느낌이 들때 즈음, 이장주 박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런 심리학적인 이야기가 '갓겜'이 되도록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망겜'이 되지 않도록 도와줄 수는 있겠죠."


라고요.

망겜이 되지 않고 살아남다보면 갓겜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갓겜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미묘한 깨달음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였습니다.


티끌 같은 디테일의 힘이 모이면 태산을 이룰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때려쳐!' 또는 '내일 쓰면 되지'라는 제 머릿속 도마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쓰는데 성공했습니다. 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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