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금 체험수기] 장려금이란 단비가 3살, 6살 아이를 성장하게 했어요!

조회수 2019. 7. 5. 15: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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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행복한 미용사로 살아가는 두 아이의 엄마, 이름은 이난주라고 합니다.

 5년 전 미용업을 시작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근로장려금 공모전을 계기로 수줍게나마 써 보려 합니다.

꽃보다 예쁜 6살, 3살 여자아이들을 버리듯 제게 혼자 두고, 젊은 아빠는 날개를 단 듯 우리들 곁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 삶은 뭐든 도전을 해야 했고, 반드시 해내야만 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스스로 울타리를 치듯 힘든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떼어내듯 살이 마를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반지하 집에 보일러가 터져 젖은 바닥을 쭈그리고 앉아서 닦아내며 결심을 했습니다.


내 아이들은 내가 지키자.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배우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을 좋아했고 그쪽 계통에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을 생각하고 보육교사에 도전하였습니다.

자격증을 갖추고 취업도 하였습니다.

보육교사의 일은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둘째 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열심히 아이들을 돌봤고, 집에 오면 내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엄마의 역할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 후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또 욕심이 났습니다. 복지사 공부를 하고 싶었지요.

사회복지사는 공부를 더 많이 해야 되므로 시간이 많이 필요했지만,

학점을 따면서 조금씩 배움의 길에 도전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또한 행정관리사에도 도전을 해서 복지사의 일을 하는 데 있어 플러스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저는 공부가 늘 부족했습니다.

부족한 살림살이가 걸림돌이 되어 하고자 하는 일에 늘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그래도 배움을 갖추고 사회에 당당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이들 또한 성인이 되어서 성실한 사회구성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새벽까지 공부하는 엄마를 보았고, 어렵게 일하며 함께하려는 엄마를 알기에 공부도 열심히 해주었습니다.

상장은 못 타왔지만,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책을 많이 읽어 독후감을 쓰면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아이로 성장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소박한 감사 기도를 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냈던 것에 저는 저 스스로도 저에게 칭찬하곤 하였습니다. (쑥스럽네요. 하하.) 이렇게 살아가는 제 삶이 소중하고, 크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당시 이사한 옥탑방은 여름이면 실내 온도가 40도에 육박하였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그곳에서도 희망의 빛줄기는 얇고 또는 굵게 내렸습니다.


저희에게 내려진 빛줄기는
근로장려금·자녀장려금!

백만 원이 생활비인 우리에겐 큰 빛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빛줄기를 잡고 작은 것도 나누며 아이들과 견디었더니 또 다른 것도 채워 주시더군요.

그것은 어느 날 날아온 임대 아파트 당첨 통지서!!

이 또한 저희들에게 큰 선물이었습니다.

튼튼한 집은 우리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그 따뜻한 기운이 또 다른 일도 잘 되게 도와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감사한 일들이 우리 가족에게 많이 일어났습니다.^^

저의 복지사 생활은 어려운 아이들을 내 아이들처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들과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같이 뛰어놀며 문집도 내어보는 성취감을 맛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문집을 보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그 후 아프신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 주어져 저는 어르신들과 매일 호흡하며 일을 하였습니다.

보람되었습니다. 더 돕고 싶었습니다.

나도 어려운 사람이지만 힘든 사람들의 맘을 내가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복지사의 임금은 그리 많지 않기에 나라에서 주어지는 근로·자녀장려금은 가뭄에 빗줄기처럼 값진 것이었습니다.

한 달 월급 같은 큰돈이었기 때문에 큰아이 학원비, 작은아이 학원비, 튼튼한 운동화, 따뜻한 겨울옷 등을 기분 좋게 사줄 수 있는 단비 같은 선물이었습니다.


그 단비는 아이들을 성장케 했고

우리 가족의 생활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복지사의 일도 행복했고, 손님들의 머리를 자르며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지금의 미용사 일도 (자영업이라 만만치는 않지만) 복지사의 연장선인 것 같아 행복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행운과 노력이 있었지만 금전적으로 다가오는 정부 지원금의 도움이 컸으며, 특히 근로·자녀장려금 제도는 다시 일어서고 싶은 저희 같은 시민들에게 큰 희망입니다.

그냥 들어오는 공돈이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쓰일 때 다시 일어나고픈 도전을 일으키게 하고, 그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됨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두 아이 중 큰아이는 어느덧 성인이 되었습니다.

급여를 받는 근로자가 되었습니다.

장려금이 원동력이 된 아이가 잘 커서 더 나은 사회구성원이 되어 가는 것도 감사하고, 잘 자라고 있는 것에 또 감사합니다.

성공이 아닌 성장을 지향하기에 나라에서 지급되는 이 제도는 금액이 크든 작든 땀 흘려 일한 자들에게 쉼이자 영양제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작은 것에서부터 온다지요?

작년 겨울 코트 속에서 발견한 만 원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어느 날 통장정리를 하다 발견하는 반짝반짝이는 장려금 또한 커다란 행복입니다.

글을 써 내려가는 내내 다시 한 번 이십 년 전을 회상하며 눈물이 조금 나기도 하고 참으로 감사한 마음도 들곤 합니다.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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