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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호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회수 2020. 8. 11. 10: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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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세포분열에도 자기 복제를 허용치 않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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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대학로 소극장을 찾던 때가 있었다. 안톤 체호프 같은 고전부터 토니상을 수상한 브로드웨이 연극, 국내 창작 뮤지컬까지 두서없이 봤다. 모두 좋았다. 작품마다 맛이 달랐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세상만사가 마냥 정겨웠다. 무엇보다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울고 웃고 노래하는 배우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때 박호산을 만났다. 작곡가 이영훈의 곡으로 채운 주크박스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 그는 이문세처럼 노래하고, 오이디푸스처럼 고뇌했으며, 베르테르처럼 사랑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작품이 끝날 즈음엔 몇 번이고 술자리를 같이한 선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고 그의 연기를 보기 위해 대학로를 찾았다. 다행히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박호산은 한창때의 스티브 부세미나 명계남처럼 동시에 여러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에릭 사티>・<빨래>・<빅 피쉬>, 연극 <얼음>・<광해>・<갈매기>까지 무수한 캐릭터로 살았다. 때론 전형적인 캐릭터를 만들었고, 어떨 때는 격정적으로 분노했으며, 이따금 처절할 정도로 불행한 표정을 지었다. 막이 내리고 관객이 앙코르를 요청하면 어깨에 기타를 메고 나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유튜브엔 그의 기분 좋은 앙코르송이 여러 편 있다). 꽤 여러 작품을 봤지만 거기에 박호산의 이전은 없었다. 그것이 그의 힘이었다. 자기 복제가 없는 연기자, 자신이 창출한 세계를 바로 다음 무대에서 부수는 배우. 그건 어떤 재능이나 노력, 운 무엇 한 가지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태 과정이다. 오롯이 ‘그것’으로 살아내고 새로운 ‘그것’으로 탄생하는. 그래서 다작을 하지만 박호산의 연기는 질리지 않는다. 소진되고 있다는 위태로움도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는 캐릭터마다 가슴 한구석을 아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악하거나 천하거나, 밋밋하거나 평범한 누구를 연기하더라도 연민이 느껴진다. 실없지만 정이 가는 사람, 사연이 뭔지 듣고 싶은 사람. 박호산보다 연기를 잘하거나 감정을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연기자도 있겠지만, 그처럼 캐릭터에 마음 쓰이게 하는 배우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배우 박호산의 연기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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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곤) 힘들었나?아주 편안하게 촬영하는 것 같았다. (손사래 치며) 어렵다. 지금 아주 어색하고 불편하다.(웃음) 3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하면서 오늘을 포함해 딱 두 번 해봤다. 아직까지 무대가 편하다 보니 촬영은 낯설다. 드라마 촬영 땐 ENG 카메라 같은 건 없다 생각하고 하는데, 화보 촬영은 카메라의 존재감이 강해서인지 좀 부담스럽다.(웃음)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팬데믹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더 혼란스럽다. 올해 초반은 거의 쉬었다. 뮤지컬 지방 공연이 취소되고 촬영도 뒤로 밀려서. 덕분에 잘 쉬었다. 서핑을 좋아해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강원도로 내려가 두문불출했다. 공연이나 촬영을 할 땐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지만, 민폐 끼치기 싫어서 혼자 놀았다.

영화나 드라마도 그렇지만 공연계의 타격도 만만치 않겠다. 대학로는 말도 못한다. 특히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친구들은 원체 힘든데, 요샌 더하다. 그런데 연극이라는 분야는 인류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없어지지 않았다.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도 극을 올렸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아직까지 내 정체성도 무대 배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일 같지 않다.

나도 무대에 서는 박호산이 익숙하다. 아직도 대학로에 산다고 들었다. 내 삶의 터전이니까. 여전히 마실 가듯 마로니에 공연장을 다닌다. 술집에 모여 연극 이야기도 하고.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공연했다. 1996년에 뮤지컬 <겨울 나그네>로 데뷔했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뜨고 창작극이 막 생겨날 때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뮤지컬이 낯설었다. <아가씨와 건달들> 정도나 공연할 때니까. 그런데 막상 데뷔하니 뮤지컬이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더라. 그래서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 연극을 했다.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데 왜 뮤지컬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나. 노래를 잘하진 못한다. 좋아한다. 그리고 기타 치는 것도. 대학 때 별명이 베짱이였다.(웃음) 캠퍼스 구석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비만 오면 소주 사 들고 동아리방에서 노래 부르고 그랬다. 연기도 그렇다. 지금도 나는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고 계속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내가 좋아해야 남도 좋아할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한다.

그래서 한동안 정극만 했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매우 많다. 포털 사이트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작품도 많더라. 연극 <변태>에도 이름을 올렸다. 7~8년 전쯤 연우소극장에서 초연을 본 기억이 있다. <변태>는 연우무대 작품은 아니다. 극본과 연출을 최원석 형이 했는데, 초연을 보면서 엄청 울었다. 서점을 운영하는 민효석이라는 주인공이 연극하는 우리 현실과 너무 닮아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진 나는 다짜고짜 최원석 형을 찾아가 졸랐다. 그랬더니 “너는 시인 이미지가 아니라 안 된다”고 말하더라.(웃음) 그래서 내가 “그럼 형은 뭐 시인 이미지야? 그리고 배우가 이미지를 만드는 거지 이미지를 따라가면 그건 하수지”라고 건방진 소리로 우겨서 간신히 배역을 맡았다. 3~4년부터 합류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론 뮤지컬 <광화문 연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번이나 봤다. 그때 고전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연기하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극을 보기 편안했다. 발성도 단단했고. 내 소리는 성악을 기반으로 훈련된 것이 아니다. 그냥 노래하는 게 좋아서 부르다 생긴 내 목소리다. 그래서 ‘날티’가 날 순 있지만 편안하게 느껴지긴 할 거다. 소리 만드는 걸 좋아한다. <광화문 연가> 같은 경우 약간 (순간 <광화문 연가>의 상훈 목소리로 변했다) 중후하고 굵은 톤의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게 (다시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문래동 카이스트로 변한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하고 다 망가져서.(웃음)

그걸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발음이나 발성 좋은 배우가 그런 연기를 한 것이 신기했다. 연극배우가 발음 나쁘면 밥줄 놔야 한다. 그렇게 또박또박한 말은 아니어도 중간은 갔는데, 문래동 카이스트 역을 맡으면서 다 무너졌다. 한 6개월 고생했다. 말도 노래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성악 기반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가 유연할 수 있다. 연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생톤으로 장기 공연에 들어가면 관리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몸도 잘 쓴다. 뮤지컬 <빅 피쉬>는 정말 쉼 없는 1인극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무리 없이 해내더라. 춤은 정말 아니다. 제일 자신 없는 분야? 막춤을 추라면 하겠는데, 군무나 딱딱 들어맞는 건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빅 피쉬> 같은 경우 원 톱으로 극을 끌고 나가야 하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거짓말 안 하고 땀을 2리터씩 흘리면서 공연했다. 그거 하면서 살이 5kg 넘게 빠졌으니까. 그런데 역시 뮤지컬은 앙상블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앙상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다.

<빅 피쉬>의 에드워드는 박호산 외에도 대한민국의 날고 긴다는 뮤지컬 배우들이 거쳐갔다(물론 <광화문 연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박호산의 연기가 가장 자연스럽고 인상적이었다. 몸에 꼭 맞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주인공의 비중이 높은 작품이다 보니 배우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에드워드는 따듯한 허풍쟁이, 악의 없는 거짓말쟁이, 유쾌한 과장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랄까. 그런 인간적인 면이 좋아서 그 부분을 많이 부각하려 했다.

어느 순간 드라마와 영화에 나왔다. 무대에서 자주 보던 배우를 TV나 스크린에서 보니 반갑더라. 고집스럽게 무대에 남으려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멋 부리는 건데.(웃음) ‘나는 무대에 있어야 해’, ‘나는 무대를 지킬 거야’ 그런 객기가 있었다. 마흔 살 전까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섭외가 들어오면 단칼에 거절했다. 아쉽지 않았다. 정말 무대가 좋았고, 자신 있었으니까. 공연을 한다는 건 배고픈 직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여러 개 하면 된다. 난 1년에 10작품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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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앙상블만 한다 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주연배우가.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다 했다. 뮤지컬 5개, 연극 5개 한 적도 있다. 쉬는 날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방송하면서 쉬는 날이 생겼다. 한창때는 오전에 A 연습하고 오후에 B 연습하고, 저녁에는 C 공연장 가고 다음 날은 더블 캐스팅으로 D 공연하고 이런 식으로 살았다. 그때 가방 안에는 기본적으로 4개의 대본이 항상 들어 있었다.

외워야 할 대사나 노래, 동선이 엄청날 것 같다. 머리가 좋은가 보다. 그건 아니고, 오래 하다 보니 감 같은 것이 있다.

그 고집스럽던 박호산을 영화나 드라마로 이끈 계기는 무엇인가. 영화 <족구왕>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후배 중 하나가 제작사 대표였는데, 그가 영화에 총장 역할로 나온 김왕근 형한테 족구 잘하는 배우 섭외를 부탁했다. 그 역이 전설의 족구왕이라 실제로 족구를 잘해야 하거든. 내가 컵차기라고 배우들 몸 풀 때 하는 걸 잘한다.(웃음) 그걸 보고 추천을 받았다. 영화는 처음이라 많이 신경 쓰였는데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들과 호흡이 좋았다. 공연을 하듯 팀원이랑 친해지는 시간을 갖고 만든 영화가 <족구왕>이다. 앞으로 영화판에 그런 기회는 흔치 않겠지만, 소중한 경험을 했다. 그때 좋은 작품을 만나면 굳이 고집 부릴 이유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오랫동안 무대에 선 배우가 화면으로 오면 겪는 성장통 같은 시간이 있다. 눈빛이나 제스처 등 미세한 감정 처리라든지 톤, 강약 조절 같은 부분을 어려워하고 실제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런 게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첫 드라마 <원티드> 같은 경우 모니터링하면서 깜짝 놀랐다. 딱딱하구나, 큰일 났다 싶고 창피하더라. 그런데 TV가 재미있는 게 후회해도 늦는다.(웃음) 이미 나왔으니까. 영화는 모니터를 보면서 다듬을 수 있는데, 드라마 현장은 “OK! 다음!” 이런 프로세스라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딱딱하다거나 어색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크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딱 적절한 분량이었다고 생각한다.(웃음) 그때 공부를 많이 해서인지 드라마 <피고인>을 할 때는 조금 편했다. 나름대로 성장통을 겪었다고 할까.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선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튀는 캐릭터 중 하나인데도,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사실 혀가 짧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과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거든.(웃음) (다시 혀 짧은 소리로) 이런 식으로만 말해도 다 과장스럽게 들리지 않나? 그래서 나머지 부분을 자연스럽게 가기로 했다. 말투를 제외한 부분에선 일상적으로,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연기를 하려고 했다. 다행히 신원호 PD도 과장된 걸 싫어했고, 이규형 씨와는 바로 직전까지 둘이 2인극을 석 달 넘게 한 터라 따로 호흡을 맞출 것도 없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물론이고 <나의 아저씨> 속 박상훈은 기본적으로 희극적 요소가 많은 캐릭터지만 이면에 슬픔이 묻어 나온다. 그 이질적인 느낌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내 인생 자체가 조금 어둡긴 하다. 그게 연기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다. 속내를 들킨 기분이긴 한데, 나는 그런 면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스크래치가 있다. 내가 가진 딱지들이 사람을 표현할 때 어쩔 수 없이 나온다.

그러다가도 <인간수업>을 보면 장르 영화의 정석 같은 연기를 한다. 한 면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캐릭터. 촬영을 두 번 했다. 처음엔 좀 따듯하게 가고 싶었다. 아이가 이렇게 삐뚤어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좀 만들어주고 싶어서. 실제로 도박꾼 중에는 감정적인 사람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개차반’이지만 인간적인 아버지를 연기했는데 감독님이 조금 더 나가보자고 하시더라. 그게 주인공의 입장을 보여주는 데 더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새롭게 촬영을 했다.

휴머니스트 같다. 굉장히 진한. 나는 따듯한 스토리를 좋아한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고 성겨서 생긴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리 모두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 그런 사람들끼리 아옹다옹하는 느낌을 좋아한다.

몇 년 동안 꽤 많은 작품을 했다. 단시간에 다작을 하다 보면 소진됐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 개인적으로 배우 박호산에겐 아직 느끼지 못했다. 고맙다. 그걸 굉장히 신경 쓰고 있거든. 배우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한 컬러를 진하게 내는 사골국물 같은 배우가 있고, 뷔페같이 여러 컬러를 보여주는 배우도 있다. 난 후자다. 다양하면 좋겠다. 어릴 때는 막연히 먹고살기 위해 다작하지 않으면 연기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하니 그게 싫었다. 그래서 작품 수를 늘렸는데, 어느 순간 밑천이 돼 있더라.(웃음) 감사한 일이다.

연기에도 트렌드가 있다. 지금 시대가 원하는 배우, 연기. 그런데 박호산은 트렌디한 배우라서 찾는 건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랄까. 요즘 연기 많이 본다. 선배들은 물론이고 후배, 신인들의 연기도. 본질적인 원형이 있을 순 있겠지만, 결국엔 트렌드도 의식해야 한다. 드라마는 특히 더하다. 지금 한 5년 전 작품을 보면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연기에 대한 트렌드는 대학로에서 먼저 시작한다. 그래서 대학로 공연을 꼭 본다.

캐릭터를 만들 때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 무대는 죽기 전까지 설 작정이다. 내 뿌리고 원천이니까. 거기서 받는 에너지, 배우는 부분, 동기부여 같은 게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무대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전보다는 조금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것들을 하고 싶다.

드라마는 물론 영화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배우다. 무대에 서는 게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도’ 있었으면 하는 거다. 돈이 기준인 시스템에서 개인의 이야기는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누구의 삶도 다 가치가 있고, 들여다보면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창동 감독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도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것에 집중하고 주변의 삶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면 한다.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배우도 마찬가지다. 연기를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요새 영화관에서 새로운 작품 보기가 힘들다. 재개봉이 유행인데, 지금 시점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독자에게 공유해줄 수 있을까. 앨런 파커 감독의 <버디>. 굉장히 연극적이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다.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어쩌다 보니 두 영화 모두 전쟁과 관련한 영화인데, 전쟁보다는 그로 인한 상흔과 치유 그리고 연대 같은 부분이 요새 좀 그립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김성용

헤어 재황(A. by Bom)

메이크업 박장연(A. by Bom) 

패션 스타일링 민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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