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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의 청음실로 초대합니다

조회수 2020. 6. 30. 10: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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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와 소리가 빚는 미감을 삶 속에서 즐기는 세 남자의 삶의 미감.
사유의 공간이자 그에게 완벽한 청음실이기도 한 강정태의 작업실

소리가 영감을 부르는 강정태의 작업

건축・인테리어 디자이너 JTK Lab 강정태 소장의 집 겸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안토닌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4악장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절정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의 오디오를 목도하기도 전에 웅장하고 명징한 사운드가 우리 일행을 먼저 맞아준 셈이다. “모든 시작은 디자인이었어요. 커피, 산호, 거북이, 오디오. 이 총체적 취미가 창조적 공간 작업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죠. 항상 뭔가 색다른 경험을 좇거든요. 남들 다 하는 경험은 재미없잖아요.” 입술에 부드럽게 감기는 예나글라스의 넓적한 커피 잔에 그가 직접 로스팅하고 블렌딩한 게이샤 원두로 시간을 들여 내린 드립 커피가 담겨 나왔다. 원두의 감미로운 향이 온기를 타고 파장을 일으키는 동안, 옆으로는 개인 작업실이자 멋들어진 청음실에서 음악이 넘쳐흘렀다.

1 완전무결한 사운드를 위해 치밀하게 설계해 배치한 오디오 시스템.
2 작업실 앞쪽에 둔 신비한 푸른 불빛의 수조.
3 CH 프리시전 앰프 시스템과 다빈치 턴테이블. 벽 안쪽으로 들여놓아 안정감을 부여했다.

다른 한편에는 파란 불빛이 빛나는 수조 안에 신비한 바다가 담겨 있었다. “오디오에 입문한 건 영국 유학 시절의 일입니다. 궁핍한 학생 때는 이베이에서 중고로 조금씩 모으기 시작하다 첫 직장인 런던의 건축 사무소에 들어가 프로악(ProAc) 오디오를 질렀죠. 당시 회사 사수가 DJ 일을 겸해서 일하면서 맥주 마시고 EDM 듣는 게 일상이었지요.” 음악이 삶의 가운데 존재하는 풍요로운 일상과 작업의 나날에 익숙해진 강정태 소장이 한국에 돌아와 스튜디오에 청음실을 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전까지는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좋은 오디오로 들으니 대편성 관현악이 마음을 움직이더군요. 악기 소리 하나하나가 다 들렸어요.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기계 욕심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4 반회전문 형태의 작업실 입구. 좌우에는 그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5 아날로그 사운드의 진수를 뿜어내는 턴테이블, 다빈치 오디오 가브리엘.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기 부상 방식으로 설계됐다.

한쪽을 밀면 다른 한쪽이 밀려 들어오는 구조의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스튜디오의 하이라이트인 그의 개인 작업실, 그리고 청음실이 나타난다. 마치 외부 세계로부터 돌아서서 내면의 세계로 향하는 기묘한 길처럼. 책상을 기준으로 정면을 바라보면 양옆에는 고가의 매지코 M6 스피커가 놓여 있고, CH 프리시전사의 앰프와 다빈치사의 턴테이블은 우측 공간을 파서 완벽히 숨겨두었다. 골드문트의 엔지니어가 독립해 만든 CH 프리시전 앰프의 놀라운 성능이나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력의 M6의 장비, 자기 부상 방식으로 설계된 다빈치 턴테이블 앞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동안, 그는 장비 자랑을 하기 앞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오디오 장비 세팅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공간이에요. 배선, 방음, 공간감 등을 건축적으로 해결했죠.” 벽면을 합판으로 마감한 것도 그가 진정한 오디오 마니아이기에 가능한 아이디어였다. 값싼 합판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구멍을 뚫고 구조를 뒤집는 등 역발상으로 창의적 마감을 완성, 결국 좋은 소리에 걸맞은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오디오뿐 아니라 홈시어터로도 완벽한 공간을 이룩하고자 극장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오로 시스템’ 장비를 13개 채널로 갖추고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상했다. 강정태 소장의 자리에 앉아 영화 <마션>의 로켓 발사 장면을 잠시 감상했다. 영화를 채우는 사소한 효과음 하나하나가 저릿하게 가슴을 울렸다. 이곳에서라면 몇 날 며칠의 자가격리도 기꺼이 할 수 있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

장 프루베의 블랙 시테 체어에 앉은 김인혁 이사.

고전음악이 흐르는 작은 방, 김인혁

화창한 봄날 오후 2시, 평창동 기슭에 자리한 한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북한산으로 창이 난 현관 쪽 방 안에 봄빛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유통회사를 운영하는 김인혁 이사의 집에 마련한 자신만의 고전음악방이다.

“어릴 때부터 10년 정도 피아노를 쳤어요. 당시엔 지겨웠는데, 신기하게 피아노를 그만둔 뒤부터 클래식이 좋아지더라고요. 중・고등학생 때 열심히 클래식 CD를 사 모았어요. 손 닿는 곳엔 늘 고전음악이 있었죠.” 청음실 안으로 들어서면 LP에 딱 맞는 높이로 짠 나무 장이 양옆에 놓여 있고, 그 안에는 공들여 모은 클래식 LP가 빼곡히 꽂혀 있다. 대부분 출장길에 잔뜩 사오는데, 희소성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탓에 현재 한 장에 200만 원을 호가하는 음반도 있다.

북한산의 녹음이 내다보이는 김인혁 이사의 내밀한 청음실.

좋아하는 LP를 보여달라는 말에 프랑스 빈티지 안경 너머 진지한 눈으로 빠르게 LP 컬렉션을 스캔한 그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피가로의 결혼> 음반을 골랐다. 능숙한 손길로 판을 꺼내 턴테이블 위에 올린 뒤 신중하게 침을 놓는다. 그 짧은 찰나, LP 보존 상태가 이토록 훌륭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디오는 1974년 로저스사에서 만든 LS 3/5a 15ohms를 사용하고 있어요. BBC 방송국에서 개발하고 영국의 여러 스피커 제조업체에서 라이선스로 생산하던 소형 모니터 스피커예요. BBC의 전설이라 불리기도 하죠. 여러 제조사 중 최초였던 로저스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이 두터울 정도로 인기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000번 안쪽의 초기형은 특히 귀한 대접을 받아 구하기가 어렵죠. 제 건 300번째 작품입니다.” LS 3/5a 15ohms는 그의 생애 첫 오디오이기도 하다. 이후 좋다는 오디오를 여럿 사용해봤지만, 오랜 세월을 돌아 LS 3/5a 15ohms로 돌아오곤 했다. 마치 첫사랑과의 재회처럼.


트리플라나 톤암을 세팅한 스파이럴 그루브 턴테이블과 저음역 앰프.

“LS 3/5a 15ohms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를 내요. 방 안에서 혼자 듣기 좋고, 스피커의 몸집에 비해 좋은 스케일을 빚어내죠. 첫 오디오로 느낀 감동을 잊지 못하는 향수도 있지요. 다만 저역이 없어 저렴한 가격에 구한 우퍼를 기대 없이 연결해봤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좋더라고요. 사무실에서는 채트웰에서 제조한 동일 모델을 사용하는데 로저스가 좀 더 밝고 고역도에서 선명한 소리가 나는 반면, 채트웰은 둥글둥글한 윤곽에 부드러운 소리가 나요. 둘의 다른 뉘앙스를 즐기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대단한 클래식 마니아로 알려진 김인혁은 여러 오디오 마니아들과 교류하며 음감회를 즐긴다. 그러다 인연을 맺은 녹음 스튜디오 오디오 가이 최정훈 대표와 함께 몇 년 전부터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모차르트:레퀴엠〉 등 클래식 음반을 비롯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평소 좋아하는 라이카로 아티스트의 사진을 직접 찍어 의미 있는 재능 기부를 하기도 한다. “수집이란 자신에게 꼭 맞는 단 하나의 물건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북한산이 담긴 창가의 봄날 풍경 속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LP를 응시하며, 언젠가 책에서 읽은 구절을 되뇌었다.

디터 람스의 턴테이블에 LP를 끼우는 김희수 작가.

디자인의 소리가 채운 김희수의 방

아티스트이자 수집가 김희수는 기묘한 은둔자다. 한국에서 미드 센추리 디자인이 별로 주목받지 않던 약 17년 전부터 수집을 시작한 그는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수집이 창조가 될 때>의 작가로 참여할 정도로 디자인 오디오 수집에 정평이 났지만, 정작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을지로에서 운영하던 작업실 겸 쇼룸은 언젠가 소리 없이 사라졌고, 최근 기척 없이 연희동으로 터를 옮겼다. ‘취미공간(取美空間)’이라 이름 지은 공간은 아름다움을 취하는 공간이자 오롯이 그의 취미를 위한 방이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조지 넬슨의 버블 램프를 보고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어 삐걱거리는 오래된 빨간 철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별다른 치장 없이 투박한 공간에 툭 놓인 디자인 가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피셔 알레그로 디자인의 오디오. 문을 열면 로봇의 변신처럼 턴테이블과 스피커 시스템이 하나씩 나타난다.

“어릴 때부터 오디오에 관심이 많았어요. 수집에 발을 들인 건 미국 유학이 계기였죠. 처음부터 수집이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책상용 의자로 임스 플라스틱 체어를 들였는데, 점점 디자인사에서 가치 있고 독특하거나 희귀한 걸 찾게 되더군요. 소더비, 크리스티 등 경매에 자주 드나들고 딜러도 많이 만났어요. 원래 기계에 관심이 많아 특정 디자이너가 만든 오디오를 수집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죠.”


캐나다 클레어턴사의 오디오 G2. 프랭크 시내트라와 메릴린 먼로도 사용한 모델이다.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가 흔히 극장용 시스템을 탐내는 것과 달리, 그는 일상에 놓이는 홈 오디오에 관심을 기울였다. 기준이라 한다면, 수집적 가치가 있으면서도 직관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 조지 넬슨이 디자인하고 알렉산더 지라드가 고운 색감의 패브릭을 입힌 오디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라디오, 임스 부부가 디자인한 라디오, 미국의 건축가 크레이그 엘우드가 책장 겸 오디오로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 뉴욕 패브릭 디자이너 베라 노이먼이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캐나다 클레어턴사의 오디오 G2,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출장 시 포터블로 들고 다닌 것과 동일한 모델인 피셔 알레그로 디자인의 오디오 등. 세월과 이야기가 축적된 손때 묻은 오디오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미학적 가치를 입고 취미공간의 분위기를 더한다. 김희수에게 작동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디자인이 대개 기능과 본질에 충실함으로부터 피어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아름다운 오디오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사진가 겸 디자이너 윌리 리조가 만든 오디오를 구했습니다. 운이 좋았죠. 전 세계에 몇 피스 없거든요. 어디 있냐고요? 지금 배 타고 오는 중이에요.(웃음)”


1 조지 넬슨이 디자인하고 알렉산더 지라드의 패브릭을 입힌 스피커, 그 위에는 한스 구겔로트의 오디오.
2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라디오. 그의 모듈 건축 스타일이 여실히 드러난다.

켜켜이 수집한 물건 사이로 김희수 작가가 최근 마스킹 테이프로 완성한 작업, 이병호 작가 등 친한 아티스트의 작품이 놓여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취미공간은 김희수 작가의 은밀한 놀이터지만, 미리 예약하면 친구 집을 방문하듯 들를 수 있다. 어차피 취향과 안목이 통하는 관계라면, 누구든 금세 친구가 될 테니까.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이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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